창세기 제38장 강해 – 유다와 다말
유다는 가나안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하여 엘, 오난, 셀라 3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다말은 첫째 아들 엘과 결혼하였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엘이 죽고, 동생 오난은 형수를 취하였으나 또 악을 행하여 역시 죽음을 당하였고, 셋째 아들은 아직 어려서 형수와 혼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아내가 죽은 후에 정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딤나에서 창녀와 동침을 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창녀가 알고 보니 아들의 아내인 다말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유다가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는 내용입니다.
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 가니라.
그 후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판 이후로, 형제들 간에는 적지 않은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형제들은 아마도 흩어져서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유다도 형제들을 떠나서 헤브론 골짜기에 있는(수 12:15;15:35) 가나안 성읍 중 하나인 아둘람으로 발길을 옮겨 그곳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26:15).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종교적 윤리적인 타락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섞여 살고, 이방인 딸과 혼인을 한 것은 타락의 전 단계입니다.
3-5: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엘’은 ‘경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오난’은 ‘힘’이라는 뜻이며, ‘셀라’는 ‘평화’ 또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셋째를 낳을 때에 유다는 집에서 떨어진 거십이라는 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의 무사한 출생을 비는 심정으로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어느덧 세월이 흘러 유다의 아들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수 있을 때가 되어, 첫째 아들을 ‘다말’과 혼인을 시켰습니다. 다말도 역시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종려나무’입니다.
7: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엘이 여호와께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10절의 동생 오난의 경우와 연결해서 추측해 볼 때에 성적인 문란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8: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유다가 오난에게 시킨 것은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 ‘형사취수법(兄死取嫂法)’으로 불립니다(신 25:5-10). 결혼한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을 때에, 남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아주는 법입니다. 낳은 아들은 형의 자식으로 법적 상속자가 됩니다.
9,10: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오난이 체외 설정(泄精)한 이유는, 자기가 낳은 첫아들이 형의 가문과 재산을 잇고, 또 그로 인해 자신이 장자로서의 권한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형제 사랑에 대한 거부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 제도를 무시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오난의 행위를 악으로 보시고 그를 죽이신 것입니다.
11: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수절(守節)은 정절을 지킨다는 뜻으로,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 그 상태로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유다는 다말이 불행을 가져오는 여자로 간주하여, 셋째 아들을 줄 듯이 말하고는 친정으로 쫓아 버린 것입니다. 유다는 왜 두 아들이 죽었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성도는 불행의 원인을 타인에게 찾기보다는 자기와 자기 가정을 살펴 자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얼마 후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라는 뜻입니다. 유다가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그가 애통하는 기간을 모두 채웠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 애도기간은 30-70일 정도이며(민 20:29; 신34:8), 보통은 7일간이었습니다.(50:10; 삼상 31:13) 마침 양털을 깎는 시기로 유다는 자기의 양털을 깎는 것을 보려고 딤나로 갔습니다.
13,14: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과부의 의상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적 보호대상자였던(출 22:21,22; 신 14:29) 과부는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일반인과 다른 옷을 입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말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큰 의복으로 몸을 감싸고 변장을 하였는데, 곧 고급 창녀의 모습이었습니다. 창녀로 변장한 이유는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기 위함입니다. 시아버지가 왕래하는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의 열려진 곳’ 즉 성읍의 광장에 해당하는 곳에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고 유다를 유혹하려는 이유는, 셋째 아들이 셀라가 이미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남편으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는 다말의 잘못이기는 하지만, 잘못을 하도록 만든 것은 유다의 약속 불이행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당하는 불행의 많은 부분들이 스스로의 과오와 범죄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약 1:13,14).
15,16: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 자부인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여기에서 창녀는 ‘간음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우상 신전에서 종사하는 성적(性的) 봉사자들(21,22)과는 구별되는 일반 매춘부를 말합니다. ‘들어가게’ ‘들어오다’ 이 말은 당시 창녀들이 각자 자신들의 방을 가지고 손님을 맞이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창녀로 변장한 다말은 몸을 허락한 대가로 유다에게 화대로 무엇을 줄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17,18: 유다가 가로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가로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約條物)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당시 매춘부와 하룻밤을 지내는 대가로 염소 새끼 한 마리가 통상 가격이었던 것 같습니다(삿 15:1). 약조물은 약속의 증표, 곧 담보를 말합니다. 다말이 요구한 약조물은 상거래 필수품이자, 기본 개인 장구들입니다. 그 중에 도장은 자신의 의지와 신분을 상징화한 도구로 이를 통해 상대와의 소유권 등에 관한 계약을 하였습니다. 당시 도장은 손가락에 끼는 반지형과, 명주실로 끈을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형이 있었다고 합니다. 유다는 목걸이형의 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팡이는 각종 짐승이나 식물 등의 문양을 아로새겨 넣은 일종의 장신구로서, 베벨론 지방 같은 곳에서는 모든 남자들이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다말은 잉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19: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시아버지로 인해 잉태한 다말은 목적을 달성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이 일로 시아버지에게 복수를 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간음과 불륜의 개인적인 책임은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으로는 목적을 당성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정당화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20-22: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약조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으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으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유다는 자신의 자행한 일이 스치스런 일임을 깨닫고 자기 소장품을 찾아 나서지 못했습니다. 친구인 아둘람 사람은 가나안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부탁하여 약속대로 염소 새끼를 주고 자신의 소장품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유다에게 돌아와 창녀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23: 유다가 가로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내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으니라.
유다는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 이 하나님께 범죄한 존재라는 사실보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그 명예가 실추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더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는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의식하는 자에게 죄악은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범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책임 회피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창녀와의 약조를 분명히 지켰다는 것입니다. 다만 친구가 창녀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에게는 이처럼 타인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는 파렴치한 버릇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허물을 솔직히 고백하는 자에게만 참된 자유와 해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마 26:75).
24: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으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석달이라는 기간이 지난 것은 다말이 임신한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시기입니다. 과부가 잉태한 것을 주위 사람이 모를 리가 없고 임신은 행음으로 인한 것이 분명하므로,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유다에게 알렸습니다. 유다는 그 소식을 듣고 다말을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에 행음이 중범죄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훗날 율법에는 음행죄에 해당하는 다말의 경우에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이 정해졌고(신 22:20-24), 심각한 반인류적 범죄 또는 종교적 타락의 경우에 한해서 화형이 내려졌습니다(레위 20:14;21:9;신25:13). 유다는 자신의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며느리의 악행만을 분히 여기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무감각했기에, 이로 인하여 더 큰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다말의 용의주도하면서도 지혜로운 면이 보입니다. 그가 보인 유다의 소지품은 시아버지의 수치를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시아버지 유다의 실책을 명백히 밝혀내는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는 다말의 무죄를 선언한 것이 아니라, 유다 자신의 허물에 비해 다말이 훨씬 낫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셀라를 약속하고서도(11절), 고의적으로 회피했고 또 창녀와 쉽게 동침하는 등의 자신의 허물보다, 후손을 얻고자 하는 다말의 행동이 상대적으로 덜 악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이후로 유다는 두 번 다시 며느리 다말과 육체적인 결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자각과 통회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27,28: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 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산기가 되어 고통이 시작되고 보니, 밖으로 손이 나왔습니다. 정상적인 경우에는 머리부터 나오기 시작하지만, 손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난산을 의미합니다. 산파가 장자를 표시하기 위하여 손목에 붉은 실을 매었습니다.
29,30: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손에 홍사를 맨 아이는 다시 그 손을 뱃속으로 들이고, 그 뒤에 있던 아이가 먼저 나오면서, ‘터치고’ 그 어미의 몸이 찢어졌습니다. 사모는 먼저 태어난 아이를 ‘터뜨리다’는 뜻의 ‘베레스’라 명명했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장자는 홍사를 맨 ‘세라’(나오다, 오르다, 광휘의 뜻)지만, 베레스가 먼저 태어남으로써 이 출산에 있어서 인간의 기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 사이의 부정한 결합으로 출생한 자, 그것도 인간적 측면에서 차자(次子)에 해당하는 베레스를 통하여 메시아의 혈통을 잇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의 실패와 타락과 절망 위에서 희망찬 은혜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총원한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유다와 다말의 불륜의 관계 속에서도 베레스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서 구속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불륜 사건의 주인공인 유다의 며느리 다말, 훗날 기생 라합, 이방 여인 룻,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는 인간의 부패함 속에서도 변함없이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구원 계획을 변경시키지 아니하시며, 죄악의 어둠을 뚫고 은총의 빛으로 그 계획을 온전히 이르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은혜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롬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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