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35장 강해 - 벧엘로 올라가자

chukang 2011. 11. 18. 18:53

창세기 제35장 강해 벧엘로 올라가자

 

   하란에서 돌아오던 야곱은 숙곳과 세겜에서 오랜 기간을 머무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지쳐있는 육신의 피로를 풀며 쉬어간다는 명분이었지만, 영적으로 볼 때에는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숙곳과 세겜은 초지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목축을 하기에는 매우 적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겜에서의 디나 치욕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이 야곱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여 도망을 하다 하룻밤을 벧엘에서 지낼 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28:10-14), 야곱은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을 쌓겠다고 약속했습니다(28:15-22).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가나안 땅으로 거부가 되어 귀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숙곳과 세겜에 머물며 벧엘로 올라가지 않는 야곱에게, 디나의 치욕 사건 이후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야곱은 디나 사건으로 인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 곧 벧엘로 출발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 어떤 면에서 보면 야곱의 신앙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벧엘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방 신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라헬이 친정에서 훔쳐 온 드라빔을 비롯해 세겜 포로들이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정결케 하는 작업입니다. 둘째는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몸을 깨끗이 씻을 뿐 아니라 더러운 생각들도 다 버리는 것입니다. 즉 흑암의 더러운 모든 것을 버리고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셋째 의복을 바꾸는 것인데, 이는 외적인 정결을 의미합니다. 영적, 도덕적 정결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영육 간에 완전한 정결을 유지해서 벧엘 제단으로 나아가는데 거리낌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야곱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과거의 벧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대응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겜에 안일하게 거주하고 있던 야곱에게 디나의 치욕과 아들들의 살육 사건으로 충격을 받게 하시고 벧엘에서의 서원을 이행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야곱과 함께 거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우상을 비롯해서 귀고리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귀걸이는 우상 숭배를 위해서 귀에 차고 있던 것입니다. 귀고리에는 신상이나 주문을 새긴 것도 있었으며, 이런 귀고리를 달고 다님으로써 악귀를 쫓아내고 행운을 불러들인다는 미신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우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거두어 상수리나무 아래 땅에 묻었습니다. 이는 우상이 주는 어떤 영향력이나 오염을 철저하게 제거하며 단절한다는 야곱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하나님과의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세겜을 떠나 벧엘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대개는 주위 부족들이 합력해서 야곱 일행을 공격했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두렵게 만드심으로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모습입니다. 서원대로 벧엘로 돌아가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야곱의 결단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항상 무릎을 꿇으며 어떤 약속이라도 지키려고 하는 성도는 그 어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반드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6,7: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루스는 꿈속의 사닥다리 사건(28:10-19) 이후 야곱이 벧엘이라 이름을 붙인 곳의 원래 지명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한 지 30년 만에, 그리고 귀환한 지 10여년 만에 비로소 벧엘 서원을 이행하게 되었습니다.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지난날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을 회상하면서 감격에 겨워 야곱이 명명한 이름입니다. 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야곱의 신앙 간증이며, 신앙 고백이라고 할 것입니다.

 

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이며 야곱의 모친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25:23) 차남인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리브가의 유모는 드보라인데 리브가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돌보던 하녀로, 리브가가 브엘세바로 시집 올 때 같이 따라왔습니다.(24:59) 주인의 어린 딸을 모시던 유모나 몸종이 그 딸이 출가한 후에도 계속 따라와 수종을 드는 것은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머니의 유모를 장사한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드보라가 야곱과 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리브가가 야곱이 걱정이 되어 밧단아람으로 보냈을 수도 있고, 야곱이 숙곳이나 세겜으로 돌아오는 소식을 듣고 드보라가 찾아 갔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드보라의 죽음을 애곡할 정도였다면 상당히 특별한 관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드보라는 야곱과 리브가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며, 야곱 집안의 신실하게 충실한 여종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밧단아람은 야곱의 모친 리브가의 고향이며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했던 외삼촌 라반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하란은 밧단아람에 속해 있는 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이 5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밧단아람으로 도망할 때 벧엘에서(28:10-20), 두 번째는 외삼촌 라반으로부터 떠나 가나안 귀환을 명하실 때 하란에서(31:11-13), 세 번째는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얍복강 나루터에서(32:28), 네 번째는 디난 강간 사건 이후 세겜에서(35:1), 다섯 번째는 30년 후 야곱이 서원대로 벧엘에서 제단을 쌓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친히 나타나셔서 이끌어 주시고 새로운 소망을과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야곱 대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이 부여된 것은 얍복 나루터에서 이미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그 사실을 반복하시는 것은 야곱에게 신뢰와 확신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보입니다. 과거 야곱이란 옛 이름 속에 담긴 탐욕의 모습을 버리고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과 더불어 영육 간에 새롭고 변화된 언약의 후사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전능한 하나님무엇이든지 할 수 없는 것이 없으신 무소불능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한계를 초월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시는 무한한 힘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이)라는 명칭은 항상 택한 백성이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처할 때 들려진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메시지는 최초의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지극한 복이었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계승이 되었습니다. 이제 단순한 번성을 넘어서 국민이나 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볼 때에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국가가 등장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2,1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올라 가시는지라.

  가나안 땅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볼 때 이루어질 것이었습니다. 야곱에게 다시 주신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말씀하신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반드시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대대로 후손들이 살아갈 곳이라고 확약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전에는 꿈이나 기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셨지만, 이번에는 직접 친히 야곱이 볼 수 있는 형태로 임하셨음을 뜻합니다.

 

14,15: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할 때에도 루스에서 베게하고 자던 돌을 세운 적이 있었으며, 그 때의 회상과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에 또 다시 돌기둥을 세운 것입니다. 전제물은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말합니다. 이는 거룩하게 성별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두 번씩이나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그만큼 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다시 부르고 있습니다.

 

16,17: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에브랏이라는 말은 풍성한 땅, 비옥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지금도 상당히 비옥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격한 곳에브랏에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곳을 말합니다. ‘신고하더니신고는 어려움에 처하여 당하는 고통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는 해산의 고통을 말합니다. 라헬은 요셉을 낳은 지 16년 만에 다시 해산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산파는 이번에도 아들을 낳는 중이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네페쉬로 영혼, 생명, 삶 등의 의미입니다. 라헬의 생명이 끝나려고 할 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라헬은 그 아들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죽음으로써 슬픔 중에 얻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른편은 힘, 행복, 총애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노니는 슬픔과 고통과 좌절이지만 베냐민은 기쁨과 소망과 위로의 이름입니다.

 

19,20: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가지 라헬의 묘미라 일컫더라.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이며, 예루살렘 남쪽으로 약 1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묘지에 돌비를 세웠습니다. 라헬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가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헬의 묘지는 사무엘 때까지도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상 10:2).

 

21: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에델 망대는 양떼의 망대라는 뜻입니다. 목자들이 양떼를 지키기 편리하도록 높이 만든 망대입니다. 그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베들레헴 남쪽 약 2km 지점에 있었다고 합니다.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을 열둘이라.

  빌하는 라헬의 시녀이며 야곱의 첩입니다(30:3-8). 따라서 르우벤의 근친상간은 야곱의 권위와 명예를 짓밟는 범죄 행위였습니다. 이 범죄로 인해 르우벤은 후일 장자권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49:3,4). 야곱은 모두 12 아들을 두었습니다. 야곱의 아들에 대한 내용은 다음 절부터 나옵니다. 이 부분은 다음 절과 붙여야 좋을 듯합니다.

 

23-26: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아들들의 이름은 태어난 순서가 아니라 모계(母系)에 따라 분류되었습니다. 서자(庶子)보다 적자(嫡子)가 먼저 열거되었습니다. 야곱이 도피 시절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자식들입니다. 다만 베냐민의 경우에는 가나안 땅에 완전히 정착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함께 묶어서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 아비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의 우거하던 헤브론이더라.

  기럇아르바는 네 개의 도성이라는 뜻으로, 야곱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 근처에 위치한 헤브론의 옛 이름입니다(23:2,19). 마므레는 헤브론 지역의 한 지명으로 일찍이 이곳 상수리나무 곁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13:18;14:13;18:1). 그 후 이삭도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 온 이후 10여 년 동안 숙곳과 세겜 등에 거주하면서 가끔 부친 이삭을 방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함께 살기 위하여 거주지를 헤브론으로 옮겼을 것입니다. 이 때 야곱이 108, 이삭은 168세로 추정되므로, 이들 부자는 12년 동안 함께 산 것이 됩니다.

 

28,29: 이삭의 나이 일백 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삭은 137세 때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자식들에게 유언을 했습니다(27:1). 그 후로도 43년이나 더 산 것입니다. 이삭은 60세에 야곱을 낳았으므로(25:26), 이 때 야곱의 나이는 120세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에게 죽었습니다.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이는 육신의 사망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며 통로임을 확신하고 있는 내세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임종을 묘사할 때도 사용이 되었습니다(25:8). 야곱은 이삭의 죽음을 예감하고 세일 산에 사는 에서에게 알렸던 것 같습니다. 에서가 헤브론으로 내려와 장자로서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이삭은 두 아들에 의해 평안히 선영(先塋)인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었습니다(49: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