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32장 강해 - 얍복 강가의 기도

chukang 2011. 10. 22. 19:29

창세기 제32장 강해 얍복 강가의 기도

 

  지난 장에서 라반과의 화친을 맺은 후 계속해서 가나안으로 귀향하는 장면입니다. 귀향 도중에 하나님의 사자, 곧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호위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시 34:7;히1:14). 천사들은 20년 전 야곱이 도피할 때에 벧엘에서도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28:12). 이제 다시 가나안 귀향길에 나타난 것은 야곱의 귀환을 환영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야곱과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당한 어려움보다 더 큰 위험이 야곱 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병사를 거느리고 야곱의 생명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게 되고, 이 기도로 말미암아 야곱은 새롭게 다시 변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출발해서 갈르엣(31:47)을 거쳐 남쪽 방향인 얍복 강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그 도움의 손길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곱과 만났으며, 야곱은 어떻게 천사를 볼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꿈속에서(28:12), 영안(靈眼)을 통하여(왕상 6:17), 가시적(可視的) 현현(顯現)을 통하여(18:2) 영적인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군대는 히브리어로 ‘마하네(מחנה)’입니다. 마하나임(מחנים)은 복수형으로, 두 떼 혹은 두 진영이란 뜻이므로, 두 진영으로 구성된 천군이 야곱 일행을 전후 혹은 좌우에서 완벽하고 보호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3,4: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세일 땅은 본래 ‘호리 족속’이 살던 척박한 산악 지역인데(신 2:4; 대하 20:10), 에서가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거칠고 험악한 이곳 산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삭의 예언으로(27:39), 예언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야곱이 보낸 사자(使者)는 식솔 등 중에 보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에서에게 할 말을 부탁하였습니다. ‘주의 종’ 여기에서 ‘주(主)’는 에서를 말하고 야곱은 에서를 주로 불러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입니다.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이 말은 밧단아람으로의 도피 이후 야곱은 지금까지 20년을 외삼촌 라반과 함께 지내었습니다.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 하라 하였더니

  야곱은 사자들에게 먼저 자신에게 가축 떼가 있음을 알리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에게도 재산이 있으므로 부친 이삭의 유산에는 아무런 사심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며, 형에게 어떤 물질적인 피해를 전혀 입히지 않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사람이란 물질과 관련 될 때에 마음이 풀어지기도 하고 욕망으로 인한 다툼이나 분노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전하게 했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고 자신을 받아주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고대 족장 시대에 400명이라고 하는 군사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는 칼을 의지하고 생활하는 자답게(27:40) 에서가 그만큼 강력한 부족을 거느린 족장으로 성장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 대한 분노를 아직 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7,8: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사자들의 전갈을 듣고 본능적으로 보복의 두려움을 받은 야곱은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야곱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무려 20년이나 지났지만 야곱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의식은 뿌리깊이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가축 떼를 두 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는 자구책의 일환입니다.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식솔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에서의 칼 날 앞에 선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를 거론하는 것은, 언약대로 조상들에게 신실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동일하게 실실하심으로 지켜 보호해 달라고 하는 믿음과 소망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하란으로 도피할 때에(28:13-15) 나타나셔서 무사히 다시 돌아오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지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여기에서 ‘주(主)’는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주의 종’은 야곱입니다.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과 함께 하시면 베푸신 모든 은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야곱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통하여 야곱이 매우 인격적으로 성장하여 겸손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이 지팡이만 가지고 도망했던 자신이 이제는 이렇게 두 떼나 되는 가축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이라고 고백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야곱은 이제 절박한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구를 통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는 야곱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에서의 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는 절박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처자식을 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언약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22:17). 이 약속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계승이 되었습니다. 에서의 보복을 눈앞에 둔 야곱은 이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13: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야곱은 사자들(정탐꾼)의 보고를 받고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습니다.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으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입니다. 밤새 얼마나 많은 생각과 궁리를 하였겠습니까? 야곱은 형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방법으로 예물을 바치기로 했습니다.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한다.’(잠 18:16;19:6)는 말씀도 있습니다.

 

14,15: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야곱이 정성껏 택한 예물의 목록입니다. 총 580마리입니다. 이런 가축의 규모는 매우 큰 예물이며 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수를 적절히 조화시켜서 예물을 택한 것은 가식적인 예물이 아니라 가축들이 새끼를 낳을 수 있게 배려했다는 점에서 매우 정성을 들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6: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눠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 종들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상거가 뜨게 하라 하고

  가축을 종류별로 나누어서 ‘상거’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한 것은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물을 계속해서 받아 마음이 흡족해지도록 하는 일종의 심리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17,18: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일반적으로 목자들은 자신이 앞서 나가고 뒤에 가축이 따라오게 하지면, 야곱은 가축 떼를 목자들보다 앞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예물을 보여 형의 분노를 완화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야곱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가축에 대하여 물을 때에 대답할 말을 가르친 것은, 야곱은 전혀 도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며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였고 만나러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20: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 가는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고하고,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이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은 단순한 선물이 아닌, 형에게 대한 전적 복종과 예속의 성격을 가진 조공(朝貢)과 같은 것입니다. 예물 속에 담긴 자신의 뜻을 에서가 알아주면 지난날의 쌓인 감정을 풀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21: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야곱은 또 다시 밤을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들고, 마음이 심히 초조하였을 것입니다.

 

22,23: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두 아내는 레아와 라헬이며, 두 여종은 실바와 빌하입니다. 열한 아들이라고 하였으므로 아직 베냐민이 태어나기 이전입니다. ‘얍복’ 강은 요단강 상류의 동쪽 지류로, 수량이 일정하였습니다. 야곱이 건너는 곳은 얍복 강 본류가 아닌 지류로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와디’입니다. ‘얍복 나루’라는 말로 보아 물이 아주 적은 개울로 사람이나 가축이 건널 수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처자식과 모든 소유는 이미 얍복 강을 건넜습니다. 홀로 된 야곱은 한 사람을 만나서 씨름을 하게 됩니다. 이 씨름은 단순히 육체적 힘겨루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영적 씨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실제로 씨름하듯이 밤새 매달리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야곱의 처절하고도 필사적인 간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표현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밤에 영과 육이 혼연일체가 되어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습니다.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 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야곱을 이기지 못함’은 야곱의 필사적인 간구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환도 뼈는 엉덩이 아래쪽 넓적다리 상단에 있는 좌골(坐骨)로 골반을 형성하는 좌우 한 쌍의 뼈로, 몸의 중심 부분이며, 힘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환도(還刀)뼈라고 번역한 것은 병사들이 칼을 차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위골(違骨)이라는 말은 부러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 중심이 되는 부분인 환도뼈를 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인간 자신의 힘과 머리만 믿고 살아온 야곱을 완전히 꺾음으로써 인간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고 이후로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어떤 사람’ 곧 천사는 날이 새려고 하니 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이는 야곱의 승리를 확신시켜 줌과 동시에 소원을 말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얍복 강가의 씨름은 야곱과 비밀리에 이루어진 일이므로, 날이 밝아 사람들에게 목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천사는 야곱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매달리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고, 계속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씨름을 끝내려고 한 것입니다.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야곱은 씨름 상대자가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신적 존재임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만 한다는 간절함과 결코 축복을 받기 전에는 보낼 수 없다는 결연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천사가 야곱의 이름을 모르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야곱 스스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름의 뜻대로, 속이는 자, 빼앗는 자, 발뒤꿈치를 잡은 자 등의 부정적인 이름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계교를 버리고 합법적인 언약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속 뜻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겼다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해 주셨다는 차원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과 승리를 의미하는 이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존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요 1:47; 롬 9:6-8)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은 자신에게 새 이름을 부여한 신비스러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담대하게 물고 있습니다. 그의 존재와 속성을 알기 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고 합니다. 이미 야곱이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작하지 못했다면 어찌 밤새도록 씨름을 하며 축복해 달라고 했겠습니까. 또한 이름을 가르쳐 준다고 할지라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어찌 다 이해를 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함은 이미 야곱은 그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던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축복을 받은 것을 기념하여 붙인 지명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는 살 수가 없었다(출 33:20, 23)는 개념은 모세 시대 이전인 야곱과 그 이전 족장 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볼 경우에 죽는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일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나, 혹은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성자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할 경우는 죽지 않았습니다.(16:13; 삿 6:22; 13:21-23)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 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야곱이 절게 된 것은 얍복 강가의 씨름이 실제 사건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환도 뼈가 위골된 것은 옛사람 야곱을 깨뜨린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며, 사랑의 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후 12:7-10; 갈 6:17).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 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 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환도 뼈 큰 힘줄을 먹지 않는 관습은 오늘날 탈무드 규례로 발전되어서 지금도 짐승을 잡아먹을 때 엉덩이에서 다리로 연결되는 큰 힘줄 부분은 먹지 않고 끊어내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의 얍복 강가의 씨름 사건을 기념하고, 그 때 환도 뼈 큰 힘줄 부분은 하나님께서 취하신 거룩한 부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