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사무엘하 15:1-18
다윗의 첫째 부인은 사울의 딸인 미갈이었으나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여 발디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삼상 25:44). 둘째 부인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암논이며, 넷째 부인 마아가에게서는 셋째 아들 압살롬과 다말을 낳았습니다. 솔로몬은 여덟째 부인에게서 낳았습니다. 그 외에 첩들도 많이 두었습니다.
큰 아들인 암논은 배다른 여동생인 압살롬의 동생인 다말을 사랑했습니다. 다말은 매우 아름답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 13:1).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데, 매우 간교한 자였습니다. 요나답은 암논이 수척해 지는 것을 보고 그 원인을 물었더니, 암논이 다말을 사랑하는데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므아는 암논에게 악한 계책을 알려주었습니다. 병든체 하고 있으면 아버지 다윗 왕이 문병을 올 것이므로, 그 때에 다말이 와서 음식을 만들고 차려서 직접 손으로 먹여주게 해 달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처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암논의 부탁을 들어서 다말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도록 했습니다. 다말은 아버지의 명을 따라 암논의 집에 가서 자기가 만든 과자를 가지고 침실로 들어갔을 때에, 암논은 다말을 추행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암논의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사모하던 다말을 심히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하인을 시켜서 끌어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율법을 어긴 것으로 사악한 친구의 간교한 말에 이끌려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다윗의 온 집안을 파탄의 수렁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참된 친구는 친구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지만 악한 친구는 도리어 그 생명까지도 잃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오라비인 압살롬이 알게 되었는데, 압살롬이 당장은 암논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누이에게 잠잠하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 누이를 추행한 암논을 제거할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버지인 다윗 왕도 이 사실을 알고 매우 노하였지만, 악행을 저지른 암논에 대하여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 압살롬이 양털을 깎을 때에 다른 모든 아들들을 청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양털을 깎는 것은 년 중의 큰 행사이기 때문에 일가친척들과 주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하는 것이 풍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압살롬이 다른 왕자들을 부르는 것은 아무런 의심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압살롬은 이 잔치에서 암논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압살롬은 ‘그술’로 도망을 했습니다. 그술은 이스라엘 북쪽 경계선에 있는 곳으로 시리아와 접경을 이룬 곳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이곳 왕 ‘달매’는 자신의 딸 마아가를 다윗과 정략결혼을 시켜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삼하 3:3). 따라서 압살롬은 외할아버지에게로 도망을 한 것입니다.
도망한 지 3년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가장 똑똑하고 잘 생겨서 후계자로 생각했던 압살롬에 대한 미움이 없어지고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그를 매우 보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마음을 안 군대장관 요압이 계책을 써서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첨하는 입술로 다윗의 판단 능력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못하게 하여 훗날 더 큰 불행을 잉태시키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윗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부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하여 그를 적군의 손에 죽게 한 죄의 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암논의 잘못을 징계하지 못한 것도 바로 자신의 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암논의 추행 사건과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사건에 다윗이 본의 아니게 다 개입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암논에게 보낸 것도 다윗이고, 압살롬의 양털 깎는 곳에 암논을 보낸 것도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의 죄악에 대한 재난이 임할 것을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말씀하셨는데(삼하 12:10-12) 그 재난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압살롬이 비록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의 귀환의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인본주의적인 동기와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공의를 실행해야 할 다윗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은 서로 진정한 회개와 용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반역의 싹이 트게 된 것입니다. 압살롬은 은밀하게 반역을 준비했습니다.
1.군사 준비
그 첫 번째로는 자신을 위하여 군사를 준비한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였습니다. 이는 반역에 필요한 기초적인 장비와 병력을 갖춘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귀환으로 왕자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차기 왕권의 계승자로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이방의 왕들이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곧잘 병거를 타고 50명의 호위병을 거느리며 행차는 것은 관례였다고 합니다. 이런 압살롬의 행위는 이방의 관습을 좇아 백성들의 관심을 모으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암암리에 나타내고자 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압살롬의 인간성이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고자하는 오만한 마음과 이방 제도를 무분별하게 도용하는 교만한 마음과, 겉치장에 신경을 쓰는 허영에 들뜬 마음입니다. 이러한 욕망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배’ 50명은 왕이 행차할 때 왕이 탄 병거 앞에서 달리며 왕의 병거가 지날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고 왕을 호위하던 호위병들입니다. 이는 혹시 있을지 모를 군사적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2. 재판관 노릇
압살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 길 곁에서 송사가 있는 사람들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에게 접근하여 인적사항을 물어 봅니다. 이는 관심을 가진 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며, 다윗 왕은 전혀 송사에 대하여 재판할 재판관을 두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만일 재판할 일이 있으면 자기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서 송사를 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도와준다고 하는 왕자가 얼마나 고마울 것입니까? 그래서 절하려고 하면 그 사람을 붙들어 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성문은 왕궁의 문으로 이스라엘에 재판 제도가 정착되기 전까지 법정으로 이용이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왕이 임명한 장로와 재판관들이 나와 정치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문제들을 재판하고 토론했으며, 또한 예언자들이 예언을 선포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압살롬은 교활하게도 재판하는 장소인 성문으로 가서 재판을 구하는 백성들의 문제를 자신이 판단함으로써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압살롬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 판단이 잘못된 것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떨 때에는 압살롬도 공정한 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판이 공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판결을 내리는 재판장이 불완전하며 부도덕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판결은 이미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재판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재판관 행세를 하는 것은 사악한 음모로부터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공정하든지 불공정하든지 다만 사람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드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사 내용도 자세히 묻지 않고,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법적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판결하는 것으로, 그들의 한심을 얻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다윗이 임명한 재판관들에게 판결을 받아 패소한 사람들이 다윗 왕과 정치에 불만을 품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압살롬 자신이 참 재판관임을 나타내려고 하는 감언이설이며, 자신만이 공의로운 재판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강조하여 다윗 왕의 통치가 잘못된 것이라고 백성들의 마음에 새기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친근한 상대, 손님 등에게 하는 인사법입니다. 압살롬은 입을 맞춤으로써 자신이 백성들의 편임을 나타내며, 자신이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고 있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심어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모든 행위는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렇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상대편을 선하게 보고 그 편을 들게 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기에게 어떤 유익이 올 때이고, 둘째는 자기편을 들어줄 때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어찌 압살롬이 반역을 꿈꾸며 자신의 마음을 훔쳐가는 줄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3. 철저한 준비
압살롬은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는 일을 무려 4년이나 했습니다. 이는 그가 매우 교활하면서도 끈질기고 집요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4년 동안을 어떻게 아닌 것을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이 우습게 여기는 백성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었겠습니까? 준비된 자가 성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록 압살롬은 악한 음모를 꾸미기는 했지만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속이며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란을 시작할 지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곳이 ‘헤브론’입니다. 헤브론은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소이며, 7년 반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로(삼하 2:1-3),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로서(창 13:18)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겠다고 말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만큼 맥을 짚을 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헤브론으로 가는 것은, 다윗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규합하기 위함입니다. 즉 초기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것에 불만을 품은 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의 철저한 모습은 헤브론으로 갈 때에 첩자들을 각 족속에게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민심 파악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반역을 봉기할 때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전혀 압살롬의 반역 음모를 알지 못한 채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압살롬을 평소에 얼마나 사랑했는지 전혀 의심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가지는 다윗의 자세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암논이 범죄를 저질렀고, 압살롬도 범죄를 저지르고 반역을 초래하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마음을 품게 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압살롬은 암몬을 죽이고 그술에 쫓겨 갔다가 용서 받고 돌아와서도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시키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용서한 아버지 다윗 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사악한 목적을 위하여 군사를 준비하고,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했습니다. 그리고 백성을 선동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하여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돌아가는 이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판세를 잘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방법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왕자라고 하는 존귀한 신분으로, 왕자들 중에서도 다윗의 가장 큰 사랑을 받고 후계자로 까지 생각되었던 자가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호위하며, 찬양하는 지위에 있던 천사가, 자신도 하나님처럼 영광을 받고 싶어서 자기 처소를 떠나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므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고, 영영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 사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나에 대하여 알지 못할 때에 다른 사람이 속이려고 하면 속고 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추기게 되면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악한 원수 마귀의 계략입니다. 이런 계략에 속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네가 제일이다.’라고 속삭입니다. ‘네가 옳다.’고 속삭입니다. 내가 나에게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탕발림에 넘어가고 악한 일에 이용이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을 속이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 사람을 속이고 마음을 도적질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하며,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되게 이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은 때로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대편의 작은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 사람을 파멸시키고, 그 파멸을 딛고 자신이 출세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상대방보다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는 더 큰 죄와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들추어내고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권세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잇대라고 하는 사람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도망치는 다윗에게 찾아와서 도움이 되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하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런 다윗을 돕다가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잇대는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압살롬의 잘못을 꿰뚫어 보고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성도들이 때때로 잇대와 같은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악인에게 유리하고, 악인의 편에 서야 성도에게도 유익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의 유익은 오히려 나중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오직 바른 길, 바른 판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편이 바로 예수님의 편입니다.
성도라고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난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결코 채찍질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핍박을 받는 자, 환난을 당하는 자가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마 5:11-22). 또한 주님의 본받아 살려고 하는 성도에게는 환난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딤후 3:12).
세상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기에 있습니다. 이럴 때에 일수록 우리의 마음을 더욱 잘 간수를 해야 합니다. 사탄의 속삭임은 우리의 귀와 마음을 솔깃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불의라도 눈감고 동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나에 대하여 바로 알게 될 때에 이런 속삭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이렇게 못한 모습일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이렇게 어렵게 사는데, 무슨 성도요, 무슨 응답을 받느냐고 하는 사탄의 조롱에 넘어지면 결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은 어느 한 순간도 나와 떨어져 있는 법이 없습니다.(롬 8:39)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내게 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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