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

chukang 2011. 11. 5. 23:52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들 갈라디아서 3:1-9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나는 착한 사람이다.’입니까? 아니면 나는 악한 사람이다.’입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그에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어떤 행동을 하기 때문에 착하다고 생각한다는 제시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나 행동이 내 자신에 국한 된 것인가? 아니면 내 가족에 국한 된 것인가? 좀 더 확장하여 내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나 단체까지 포함이 됩니까? 나를 비롯한 가족 직장 동호회 등에 대하여 우호적이거나 이타적인 모습을 보이며 잘되기를 바라고,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와 나를 아는 사람들과 내가 속한 집단에서는 나를 평가할 때에, 잘한다고 할 것입니다. 잘한다는 것 자체가 착하다는 것과 동일시 할 수는 없겠지만, 잘한다는 평가는 착하다는 것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평가는 반대로 나와 또 나와 관련된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하여서는 특히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에는 잘 되기를 바라기 보다는 잘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행동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즉 나와 내가 속한 집단과 경쟁적인 관계나 이해관계에 있는 상대방이나 집단일 경우에는 나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나쁜 사람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을 위하여, 다른 사람과 다른 집단에 대하여 불리한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개념과는 일치할 수가 없겠지만, 어쨌든 상대편에서는 좋지 않게 볼 수도 있고 나쁜 평가를 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의 문제의 답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착하다는 것이 성선설이고,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것은 성악설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동일한 인간 행위의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합니다. 서로 다른 해석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품을 단정 지어 말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며, 그러한 단정에는 모순적인 측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1. 성선설

  성선설은 "인간은 선하다"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집안이든 나라든 모든 사회는 '인간'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人治). 이들은 인간 안에서 '선한 요소'를 찾는데, 그 요소는 '도덕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성이 인간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하며, 이 이성을 계발한 사람은 지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지식인이란 그런 이성과 인격을 함양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선설은 지식인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인이 관료, 정치가이어야 하며, 관료, 정치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사대부(士大夫)'지식인이며 관리이며 지주'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결국 '지식-권력-경제'의 삼위일체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성선설은 지식인과 관료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소(J.J.Rousseau : 17121728)는 서양의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民約論(Contact Social)에밀(Emile)의 두 저서를 남겼는데 민약론에서는 정치문제를 논하였고, 에밀에서는 교육사상을 발휘하였습니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모두 극히 자연 상태를 강조하였고 자연생활을 주장하였습니다. 인류의 자연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歷史文明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가야고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반드시 참되고, 참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하다."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다 선하지만 일단 人爲를 거치면 으로 변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2. 성악설

  순자(筍子)가 주장한 학설로서 "인간은 악하다"고 보므로 사회나 국가를 인간이 이끌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바깥에서 국가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을 찾습니다. 그 원동력을 순자는 예(행위 규범)라고 보았고, 한비자는 법과 권력(法治), 묵자는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周禮)나 법은 국가의 제도이며, 이 제도를 운영하는 힘이 권력입니다. 그리고 그 제도와 권력을 최종적으로 쥐고 있는 사람이 군주이며 하느님을 대신해서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것도 바로 군주입니다.

  따라서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강력한 군주 이론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국가의 구성원을 크게 보아 '백성-관료-군주'라고 한다면 성악설은 군주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국가의 힘은 백성의 생산과 전쟁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관료의 착취와 비능률을 제거하고 백성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군주권과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악설은 백성을 옹호하는 이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관료와 지식인 중심의 성선설과 대립합니다.

  이 외에도 묵자는 약자의 입장에 서서 "왜 강자는 힘으로 약자를 겁탈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현실이란 힘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힘이 꼭 그렇게 겁탈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반대로 그 힘으로 약자를 사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묵자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사랑을 강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럽고 추악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겸애(兼愛)라고 합니다.

  한비자는 인간의 욕망에는 식욕과 성욕같이 생리적인 것이 있고, 권력욕이나 소유욕, 명예욕같이 사회적인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자나 순자는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동물적 욕망으로 보는 반면, 한비자의 성악설은 권력욕, 소유욕 같은 사회적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한비자가 설명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하고, 그가 제시한 극단적인 인간 통제 방법, 즉 정치론은 섬뜩할 만큼 억압적이고 전제적입니다. 그러나 한비자가 설명하려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적인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최고 권력자의 일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먼저 성악설이 생기고 난 뒤에 성선설의 관점이 생겼습니다. 서양의 사악한 인성관은 사악한 세계관에 근본을 두었고 사악한 세계관은 종교의 영향에서 생겼습니다. 기독교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원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악한 길로 떨어졌고 그 후손들은 태어나면서 악한 경향을 가지고 나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신조가 되어버려 이에 대해 의심하거나 논변을 벌일 여지도 없었습니다. 중세의 교부 어거스틴(Augustine) 이래의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N.Machiaveli : 14471527)와 영국의 홉스(J. Hobbes : 15881679)와 독일의 쇼펜하우어(shopenhauer : 17881860)는 모두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을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한다고 합니다. 즉 성악설은 '인간을 멸시하는 이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악설이 모든 인간은 악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합리적이라는 것도 아니고, 악과 불의를 위한 이론인 것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비이성적이라면 이 세상에 남는 것은 무질서와 혼돈뿐이며, 아무런 철학도 심지어는 성악설 자체도 펼 수 없을 것입니다. 성악설은 오히려 이 세상의 악과 불의를 물리치기 위해 악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처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에서의 성선설과 성악설은 세상을 다스리는 왕과 관리와 백성에 대하여 어떻게 대우를 해야 하는가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정치와 전쟁과 노역과 세금이라고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성악설을 주장하였던 순자의 예(행위 규범), 한비자는 법과 권력(法治)이라고 한 것을 바리새인들의 율법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하므로 법을 만들어서 규제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본질적인 차이점은 순자와 한비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통하여 백성들을 통제하려고 한 것이라고 한다면, 율법은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묵자는 하느님이 다스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하늘이 다스린다는 것으로, 자연적인 순리를 말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천지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태초부터 ()’하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뱀(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후부터는 그 마음이 ()’하게 변하게 되었고, 그 악은 없어지지 않고 자식들에게 그대로 유전되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아담과 하와의 행위를 중심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행위 이전에 그들의 마음이 먼저 타락했습니다. 따라서 더욱 중요한 점은 마음과 생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정리하게 되면 그 논란의 중심 주제는 행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마음이고 그 다음이 행위이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둔 다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무엇 때문에 그토록 책망을 하고 있는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한 요지는 구원입니다. 너희들이 무엇으로 구원을 받느냐는 것을 물어 보고 있습니다. 당시에 갈라디아 교회에도 율법 구원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 할 때에 바나바와 마가를 데리고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13:13, 16-41). 이때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대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는 이 지역에서 쫓겨나게 됩니다(13:42-52).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반대로 인하여 쫓겨나며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실패를 한 것 같았지만, 결국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갈라디아 지방의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며 이곳에 교회가 서게 되는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14:17). 뿐만 아니라 2차 전도 여행에 있어서도 갈라디아에 들려 그들의 신앙을 더 굳게 만드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도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직 성숙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개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의 남쪽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바울의 선교 시에도 방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떠난 후에도 율법 준수를 강요하여 구원에 대한 혼돈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편지를 보내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는 진리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므로, 의로움 즉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이기에 의롭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1절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에 전도할 때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였습니다.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이 말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을 어떻게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복음을 통하여 그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초대 교회 때에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이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결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유혹에 대부분의 성도가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왜 잘 믿는다고 하는 성도가 넘어질까요? 우리의 마음에는 성선설과 성악설에서 보듯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본성은 착한 일을 하고 싶다는 것, 높은 사람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 내 유익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마음에 찔림을 받게 됩니다. 내가 착하게 살지 못했구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나는 나쁜 짓을 하고 있구나! 물론 이런 마음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이런 마음에 나쁜 씨앗을 뿌리면서 유혹할 때에 질문하는 것이, ‘너는 그렇게 나쁜 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을 받을 줄로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이런 말에 흔들리게 되는데, 성도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어찌 성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당연히 성도는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러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돌이켜 바른 생활을 통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는 교훈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혹을 합니까? 너희가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해도 착한 행실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우리를 세뇌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조항들이 있는데, 무려 613가지나 되는 그들의 율법입니다. 그러면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 다 613가지 조항들을 다 지키고 있었을까요? A.D.75년에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에는 성전 제사와 관련 된 조항들은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613 조항을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 시대의 저명한 유대인 랍비이며 사상가로 알려진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입니다. ’하라는 긍정적 계명이 248,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365개라고 합니다. 248은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의 총합이며, 3651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유대인이 지킬 수 있는 규정은 긍정적 계명 77개와 부정적 계명 194개로 모두 271개라고 하며,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조항은 긍정적 계명 33개와 부정적 계명 135개 조항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조항들을 주어진 이유와 정신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이 참고를 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율법조항들을 지키지 않게 되면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5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고 요한복음 8:7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행위 중심은 결코 구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써 사랑과 용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613개의 조항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지키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시키는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가 시키는 짓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약한 성도는 찔림을 받아서 그만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스스로 절망하게 되어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래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자책하면서 율법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남을 정죄하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율법주의자들과 동일합니다. 다른 성도의 조그마한 잘못을 들추어내어 공격하지 말고, 먼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서 고쳐나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율법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행위를 살펴 볼 때에 하나님 중심인가? 아니면 사람 중심인가?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성도가 교회 안에서 어떤 물질적인 봉사를 하였다고 할 때에, 그 성도의 마음에 목사님에게 잘 보이려고, 장로님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다른 성도들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나는 이렇게 착한 일을 합니다.’고 내세우기 위하여 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 행위가 어찌 하나님께서 인정하실만한 착한 행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마음의 감동으로 이 일은 내가 하고 싶다.’는 은혜가 임할 때에 조용히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3,4)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어떻게 하여 성령을 받았느냐고 2절에서 묻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어떻게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들이 착한 일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성령을 부어주셨나요?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구원자로 믿을 때에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3절에 보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또 질문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은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육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육체적인 시도, 외형적인 제도나 방법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헛된 노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영접한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제는 그들을 인도하시고 지키시는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고, 어리석게도 다시 자기의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적인 시도에 의해서 발생하는 무거운 죄의식 아래 얽매이게 하는 율법주의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익한 것을 좇고 있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은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무시하고, 진리를 왜곡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의 행실을 따라가게 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 온 믿음의 노력들이 모두 헛수고에 불과하게 될 매우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염려는 과거 바울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을 때의 잘못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분명하게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크고 작은 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사람의 노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신앙의 흐름은 성도로 하여금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그 대신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즉 행위구원론이 대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죄의식을 깨우치게 만드는 율법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구원의 능력이 되는 믿음이 중요합니까?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라고 하였습니다(15:6). 로마서 4:3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이 항상 아브라함의 후손 된 것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율법적 행위, 즉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큰 의의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단지 할례 받은 자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믿는 자들의 참된 영적 조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좇아 행하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비록 이방인이지만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구원주로 영접하여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이야말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악에 속한 자들입니다. 마음도 악하고 행위도 악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을 주셨습니다. 악에서 빼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성령으로 역사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마귀만 이롭게 하는 악한 행위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셔 믿음이 없는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 전제 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악함을 용서받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온전한 믿음을 우리의 마음에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우리의 착한 행실도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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