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는 왜 미움을 받았나? 누가복음 18:1-10
삭개오는 세리 장입니다. 세관에서 제일 높은 사람입니다. 즉 세리들을 관리하면서 세리들이 거두어들인 세금을 로마 정부에 직접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도 세리였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이 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까지도 꼬투리를 잡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때에 하신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을 통하여 볼 때에 우리가 병든 자이며, 죄인이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하여 부르셨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임을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미워했을까요? 당시 유대는 로마에 점령당하여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많은 점령지를 쉽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의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였으며, 예루살렘과 유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총독뿐만 아니라 상업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마의 행정 관리들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관원들로 하여금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 곧 인두세(人頭稅)과 지세(地稅) 같은 세금을 정기적으로 징수하는 직접적인 책임을 맡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로마 관리들은 육로나 해상으로 수송하는 재산(노예 포함)에 대한 통행세 징수는 일부 청부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 청부업자들은 일정한 지역에서 통행세를 징수하는 조건으로 약정된 금액을 미리 세관에 지불했고, 통행세 징수를 통해 자기의 이익을 남겨 재산을 모았습니다. 이런 청부업자들은 때로 로마인이기도 했으나 유대인들도 상당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관리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관리들과 세금 청부업자들은 실제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서 많은 하수인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용된 하수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직업인 팔레스틴의 세리는 정복자에 의해 강제로 징수되는 온갖 종류의 세금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유대민족들에게 큰 저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유대인들은 본래 세금 자체를 공공의 과세로서가 아닌,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일종의 범죄로 인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납세에 대한 기피증이 생긴 것입니다. 둘째 세금 징수가 그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를 돕는 데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들 세리들이 로마인과 자주 교류하며, 또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동족을 착취한다고 하여 로마 세관의 유대인 세리들을 매국노나 변절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따라서 보수를 위해 이 일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압제자들의 강탈행위와 백성들의 비난으로 이중으로 천대를 받고 멸시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세리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벌금을 책정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악랄한 수법으로 이를 징수했으며, 또 일정한 세금 액을 세관에 바친 후 그 이상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자신이 착복하는 횡포까지 부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세리에 대한 원성이 더 높아지게 되었고, 유대사회에서 세리들은 창기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을 무시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천민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또 세리들과 그 가족들은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직무를 담당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심지어는 유대인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도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한 것을 ‘죄인의 집’에서 어찌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비방을 한 것입니다. 삭개오도 이러한 세리 중에서 ‘장(長)’이니 얼마나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았겠습니까? 세금을 착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삭개오가 부자라는 사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이 ‘보편적 복지’라고 하는 문제를 가지고 들끓고 있습니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동일하게 복지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으로, 그 대표적인 예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된 서울교육청장 곽노현이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하여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서울 시장 선거도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오세훈 시장이 사표를 냈기 때문에 보궐 선거가 치러졌고, 선거 공약의 핵심도 역시 무상급식을 전면에 내세운 보편적 복지였습니다. 이번에 당선된 박원순 서울 시장이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하자, 경기도 의회의 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김문수 도지사에게 무상급식을 하라고 요구하자 ‘돈이 있으면 하겠다.’라고 대답을 하여 거부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보편적 복지와 차별적 복지 중 어떤 것일 옳을까요? 대학생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투표에 참가한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경제 사정의 악화 때문입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입니다. 우리나라만 불황인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시민들은 보편적 복지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박원순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이 되면 그 다음에는 위락을 찾게 됩니다. 그렇지만 현 상황은 위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상위층 일부이고, 이를 즐기다가 즐기지 못하게 된 중산층과 서민층은 의식주 문제까지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가 옳은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표를 찍어 준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정부에서 잘못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크게 세 가지로 보면, 첫째는 공공사업 즉 사대 강 사업을 시행하면서 천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출했지만, 서민들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즉 실물 경제 활성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물가 상승입니다. 불경기에는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따라오게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특히 심했습니다. 물가 상승뿐만 아니라 대학등록금을 매년 인상하였는데, 그 인상 요인을 대학 측에서 허위로 작성했고, 등록금으로 대학 자체 몸집 부풀리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가계 형편이 더욱 악화가 되어, 등록금을 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대학을 졸업하여 취직이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차용한 등록금을 갚을 수 있겠는데, 불경기로 취직까지 안 되는 상황에서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 요인입니다. 셋째는 지도자들의 타락입니다. 정경유착으로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구속되는 일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뇌물을 주는 기업은 그 뇌물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결국 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있는 자들은 나쁜 짓을 해서 서민들이 생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뇌물로 쓰고, 유흥비로 펑펑 씁니다. 서민들의 마음에는 우리도 한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복권사업이 너무 잘되어 오히려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탕하고 싶다고 해서 그게 됩니까? 안 되니까 짜증이 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 복지를 들고 나오니까 그것이라도 좀 혜택을 받고 싶은 마음이 어찌 안 들겠습니까?
보편적 복지는 민주국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좋아서 보편적 복지라고 하는 것이지 이는 공산주의의 또 다른 용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한 복지 혜택을 누리게 된다면,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도 보편적 복지에 표를 던지는 것은 현재의 경제 불황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것입니다.
미국의 첫째가는 부호 워렌 버핏은 스스로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근로자들이 내는 평균 세금은 33%에 달하지만, 자신은 금융 소득이 많기 때문에 금융 소득이 99.6%이고 회사에서 받는 연봉은 0.4%의 비중인데, 금융에 붙은 세금은 15%라 전체적으로 보면 17.4%의 세금을 내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세금보다 적게 내기 때문에 더 내야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도 부자들이 정부의 재정적자를 덜어주기 위하여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나섰습니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또 우리나라도 역시 나라 살림을 꾸리는 데에는 세금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10개를 가지고 있는데, 한 개를 세금으로 내라고 하면 얼마든지 낼 수 있지만, 한 개나 두 개나 혹은 한 개도 없는 사람에게 한 개를 내라고 한다면 어떻게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부자가 가난 사람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부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하면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세금은 자꾸만 오르고, 빚은 늘어가는 상황은 당연히 현 정부를 불신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 단 한 명 어린아이만이 자신의 식사 거리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일 정도였으니(요 6:9), 얼마나 당시 사정이 어려웠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세리들은 자신들이 천대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에 대하여 분풀이라도 하듯이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고 그 일부를 착복하였으니, 유대인들은 더욱 세리들을 미워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여리고는 가이사랴 및 가버나움과 더불어 3대 상업 중심지로 세무 업무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향료의 집산지로 알려졌던 여리고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모여든 많은 이방인들의 상거래로 항상 붐볐다고 합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번성한 도시였던 여리고에서 세리장이란 직책을 갖고 있던 삭개오가 많은 재산을 모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고 했을까요? 삭개오는 자신이 세리장으로 세금을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심한 갈등 속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자 하되’ 이 말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 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하는 삭개오에게 비켜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뒤에서 보려고 하니 키가 작아서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뽕나무(뽕나무과에 속한 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뽕나무 아래 멈추시더니 삭개오에게 오늘 네 집에서 지내려고 하니 속히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삭개오가 얼마나 기쁜지 급히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역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또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선 채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잘 생각했다고 칭찬하시는 대신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보고 너무나 기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한 부자 관원은 자신이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내세워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었으나, 그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결국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눅 18:22,23). 자신이 율법을 준수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볼 때에 바리새인일 수 있습니다. 관원이었으므로 상당히 지체가 높은 사람이며 학식도 훌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걸려 영생을 포기하였지만, 모든 사람들로부터 천대받는 세리인 삭개오는 자진해서 자신의 재산 중에서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까?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고 존경을 받는 부자 청년(부자 관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토색한 것도 네 배로 쳐서 갚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범했던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랜 동안 부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갈취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은 그의 회개가 매우 철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는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 액수에다 1/5을 더하여 보상하였지만(민 5:7), 2배 내지 4배로 갚는다는 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도둑으로 인정되었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습니다(출 22:1,4). 따라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4배로 갚는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죄인 삭개오와 동일한 죄를 짓고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부자 관원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단지 물질적인 것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부분들에도 우리는 수많은 죄와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나 불신자들이나 한결같이 “내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은 얼마나 잘 찾아내는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보다 항상 자신의 죄와 허물을 먼저 회개하는 것에 대하여 교훈하셨습니다. 삭개오는 그 말씀을 실천한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로 인하여 그 집 온 가족이 구원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미리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먼저 찾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일어버린 자로서 죄 가운데 거하며 고통을 받고 있던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신체적으로 작은 키와, 죄인이라는 사회적 장애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는 시도는 잠시 동안 좌절 되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구원의 은혜를 입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어떤 요구를 하셨나요? 네가 돈이 많으니 진수성찬으로 나를 대접하라고 하셨나요? 네가 가진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하셨나요? 도적질한 것을 돌려주라고 하셨나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지만,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바로 잡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회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압적으로 못 이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삭개오와 사람들 앞에서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회개하는 삭개오 앞에서 즉시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자에게는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시 34:10; 잠 8:17) 우리의 문제를 내 능력과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주님께 내어 놓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은 삭개오와 같이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행위의 결단이 필요함을 말합니다. 그런 성도가 진정한 의의 열매를 맺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회, 많은 성도가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과연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지금도 주님께서는 내 앞에 와 계시지만 내 눈이 어두워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와 같이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성도가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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