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줍는 여인들 신명기 24:19-22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라는 화가가 1857년에 그린 유화로 ‘이삭 줍는 여인들’(글라네르)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밀레의 대표적인 그림으로 세 명의 여인이 이삭을 줍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세계적인 명화로 유명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보는 사람의 눈을 편안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두 여인은 이삭을 줍고 있고, 다른 한 여인은 허리를 펴고 손으로 허리에 대고 있습니다. 힘이 들어 잠시 쉬면서 허리를 두드리면서 피로를 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여인의 앞 쪽으로는 작게 말과 말을 탄 사람들이 보이고, 곡식 더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세 여인은 밝고 환한 색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말을 탄 사람들 쪽은 어둡고 희미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소작 농가에서 태어난 밀레가 당시 기득권층인 지주계급 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는 즉 하나님의 은총이 내리고 있다는 다소 정치적인 면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이 그림이 발표될 때에 노동자와 농민에게 암묵적인 선동을 하는 불온한 평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밀레는 결코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며, 자신이 체험한 농민의 고된 생활을 현실 그대로 묘사를 한 것이며, 여인들의 모습에서 어떤 참담한 심정이나 울분 대신, 온화한 서정과 종교적인 경건함을 담아서 묘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적인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에서는 현대판 이삭 줍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이나 노인들까지도 있습니다. 이들을 현대판 ‘글라네르’라고 부릅니다. 상점이나 대형 마켓에서 버리는 채소나 과일들을 주워 요리를 해서 가계비를 줄인다고 합니다. 어떤 상점 주인은 미리 이런 사람들에게 주기 위하여 따로 비닐봉지에 넣어 두기도 하고, 식육점 주인도 먹을 수 있는 찌꺼기나 뼈 등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리 시장이 이렇게 ‘글라네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38유로의 벌금을 물린다고 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1유로가 1,500원 정도 되니까 거의 6만원의 벌금입니다. 돈이 없어서 신선한 채소를 사먹을 수도 없고, 고기도 사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그냥 버리면 쓰레기가 될 것을 주워 먹는 것조차도 벌금을 부과하게 되면 안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항의를 하여 결국 벌금은 취소가 되었고, 다만 다시 되파는 것에만 벌금을 물렸다고 합니다. 벌금을 물리는 이유에 대하여 파리 시장은,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음식물 찌꺼기들이 흩어져 주위가 더럽게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마태복음 12:1-5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가다가 시장하여 이삭을 훑어 먹은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주님께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옛날 다윗도 도망할 때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 즉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과, 또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없는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바리새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셨던 내용이 생각나게 만듭니다.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은 생각지 않고, 자신의 체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쓰레기통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는 것이 중요할까요? 청결한 도시를 만드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기 때문에, 자신의 정책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파리 시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동일한 일은 아니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유의 일들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유교 문화권에서 체면 문화를 키워왔기 때문에 수많은 이렇게 잘못된 생각들을 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발의한 정책을 억지로 시행하려고 한다면 결국 피해는 선량한 국민들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부 권력을 쥔 사람들 중에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벗어나려고 하는 만용을 부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말을 하여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고 하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일이 진행되도록 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음 선거에서는 반드시 낙선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큰 권력을 쥐고 있거나, 큰 부자들만이 행하는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좀 더 많이 가진 자는 좀 적게 가진 자들을 멸시합니다. 좀 적게 가진 자는 더 적게 가진 자를 멸시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마태복음 18:23-35을 보게 되면, 임금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에게 그 몸과 저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을 내립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엎드려서 빌면서 자신이 다 갚을 것이니 참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주고 풀어 주었습니다. 풀려난 자는, 길에서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자, 그의 목을 붙잡고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100데나리온 빚진 자는 갚을 테니 참아달라고 간청하였지만, 감옥에 가두어 빚을 갚도록 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처럼 악한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그의 못된 행실을 알렸습니다. 주인은 그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던 자를 다시 잡아 가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어째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은 수많은 죄를 지으면서도, 남이 작은 죄를 짓는 것을 보고 정죄합니다. 자신은 용서받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정죄하고 싶어 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거나, 또한 유리한 쪽에 서 있으면, 낮은 사람이나 불리한 사람에게 위협을 하고, 많이 가진 자는 적게 가진 자에게 큰 소리를 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는 인간사의 추악한 모습들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이런 양육강식의 법칙이 적용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가르치셨습니까? 연약한 자를 관심 있게 보며, 그들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연약한 자는 누구입니까? 첫째 물질이 가난한 자입니다. 둘째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입니다. 셋째 영적으로 부족한 자를 말합니다.
1. 물질이 가난한 자
세상은 힘이 있는 자, 많이 가진 자를 주축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결국은 가난한 자는 소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원수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주님을 따르는 성도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모두 마귀에게 복종했습니다. 마귀가 이끌어 가는 세상 풍속을 좇았습니다. 마귀가 영향을 미치는 모든 권세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면서 살았습니다.
성도가 된 후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주님을 영접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닮아가며 새롭게 변화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대할 때에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대접을 했을까요?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약 2:6) 이 말씀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고 빚을 갚으라고 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여 천국 백성이 된 후에도 세상적인 모습 그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을까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은 높이고, 남을 깔보는 못된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아부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군림하려고 하는 악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재물을 관리하지 않게 되면 그 재물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 중에 아주 작은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면, 얼마나 생색을 내는지 모릅니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어서 버리는 것을 주면서도 생색을 내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먹다 남은 찌꺼기를 주면서도 큰 인심을 베푸는 것처럼 하는 존재가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내게 있는 99마리의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자가 집에서 가족처럼 키우는 양 한 마리를 빼앗아 남을 대접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삼하 1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오죽하면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겠습니까? 성도가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의 추한 욕망은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외면하는 자는 어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9:19-29에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 교훈하셨습니다. 자신만 아는 부자들은 이 땅에서 큰소리치면서 살았지만 결국은 지옥의 불 못에 떨어졌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너무 목이 마른 부자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신의 혓바닥을 시원해 해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2:16-21에서도 소출이 심히 많은 부자는 곡간을 크게 짓고 여러 해 먹을 곡식을 저장한 후에 자기 영혼에게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부자의 영혼을 취하시면, 그 곡식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복을 받고 싶다면 나보다 연약한 자를 도와야 합니다. 돕되 허례허식 즉 외식으로 하지 말고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진정한 마음으로 돕는 자는 범사에 복을 받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물질로 도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형편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6:3)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실 것입니다.
2.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시려고 질병을 내리실 때도 있습니다. 이사야 58:7,8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병이 들었을 때에 가장 빨리 낳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린 자, 유리하는 빈민, 벗은 자, 친족을 돌보는 자는 그 치료를 급속하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할렐루야! 이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물댄 동산, 끊어지지 않는 샘’과 같이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가시는 곳마다 우리의 병든 몸을 고쳐주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환자들이 곧 우리들입니다.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반드시 고쳐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병 고침을 받은 후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눅 17:12-19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실 때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감이 주님 앞까지 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병을 고쳐주시기를 멀리서 간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미 병을 고쳐주었으니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고 인정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열 명은 주님께서 고쳐주심을 깨닫고 자신의 몸을 보니 정말로 깨끗하게 나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홉 명은 기쁨에 들떠서 달려갔는데, 그 중에 단 한 명 사마리아인만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감사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까지 구원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것처럼 병든 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육신적인 질병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치료받고 구원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영적으로 가난한 자
가진 자일수록 교만하기 쉽습니다. 교만한 자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입니다. 현대 성도는 갈수록 교만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흐를수록 하나님의 말씀은 멀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은 환난 중에 있고, 늘 궁핍하고 곤란을 당하기도 하고, 잡혀서 매를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후 6:1-10).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전도하여 세운 모든 교회의 성도들에게 동일한 그들의 영적 건강을 위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권면할 때에는 가난한 상태였는데, 부요하게 되어 다른 교회를 권면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핍박 받으며 곤란을 격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는 부요한 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들을 위하여 권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하여 도울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병들어 있는 자, 영혼이 갈급한 자, 영혼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약한 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곧 병든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마 9:12) 우리들이 바로 의원이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서 그들을 치료하라고 하십니다. 치료하는 그 능력은 주님께서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깊은 관심과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들을 보기에 세상 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은 부요한 자인 줄로 믿습니다. 그들이 이삭을 주을 때에 그 밭주인을 위하여 기도했을 줄로 믿습니다. 과수원 주인을 위하여 기도해 했을 줄로 믿습니다. 룻도 감사한 마음으로 이삭을 주웠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위해서 한 알 한 알 이삭을 주웠습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연약한 자를 위하여 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이 있으며, 강건한 면이 있고 연약한 면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도 역시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욕심의 끝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성도는 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부여받았습니다. 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됩니다. 말로도 어려운데 행동은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입술과 행동을 주관해 주시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나는 다만 도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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