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사랑 호세아 1:1-11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부르신 시기는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B. C. 793-753) 때이며, 남유다의 왕은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심각하게 부패되어 있는 시대였습니다. 영적으로 부패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우상 숭배의 결과는 전 백성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부르셨습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호세아를 부르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가장 번성한 시기로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풍요로운 시대는 살기가 좋은 때인 것은 틀림이 없으나,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풍요로운 시대, 평화로운 시대는 반드시 영적인 타락을 가져 온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 동안이나 그토록 고생을 하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에서와의 갈등을 해소한 후에는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평화로움 속에서 숙곳과 세겜이라는 좋은 땅에서 목축을 하고 편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세겜 추장으로 인한 디나의 추행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이 벧엘로 돌아와 제단을 쌓겠다는 약속을 세상적인 평안함 속에서 잊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한 개인이나 국가에 평안이 있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부요와 평안이 있을 때에 사람의 마음은 해이해져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비단 이스라엘 시대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가히 태평성대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국력도 강하고, 물질도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입니다. 요아스는 북이스라엘의 제12대 왕으로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B. C. 798-782), 아람 완 벤하닷 3세와 전쟁을 하여, 부왕인 여호아하스가 빼앗겼던 북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되찾았고(왕하 13:25), 그 아들 여로보암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창시자인 여로보암 1세(왕상 12:25-33)와 구별해서 여로보암 2세라 불리는데, 그는 가장 긴 41년 동안을 다스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왕위에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다윗 왕 못지않은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남유다를 제외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의 모든 영토를 회복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왕하 14:25).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번영 속에 살도록 은총을 내리셨지만, 여로보암 1세의 죄악을 따라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금송아지와 바알을 숭배하는 죄악을 계속 범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영적 타락이 바로 여로보암 2세 때에 가장 극심하였기 때문에, 비록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의 국력을 신장시킸다고 해도 백성들의 죄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또한 스스로 죄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죄악을 그대로 묵과하시지 않겠다는 것을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에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상숭배의 결과는 멸망이요 죽음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단지 북이스라엘의 멸망뿐이셨을까요? 북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멸망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즉 ‘영적 이스라엘의 자손’은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호세아와 음란한 고멜의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택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1. 호세아의 결혼
자녀들이 결혼을 할 때에 부모는 매우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개인과 개인의 결합인 동시에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기도 합니다. 내면적으로는 인격과 인격의 결합이며, 사회적 지위와 사상과 관습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결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지위와 부에 조금이라도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이 되면 결혼을 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호세아의 경우는 어떤 것일까요? 호세아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런 결혼을 어떤 사람인들 하고 싶겠습니까? 어떤 부모가 이런 결혼에 찬성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결혼입니다. 도무지 어떤 말로도 설득하기가 어려운 결혼 명령입니다. 결혼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음란한 자식’까지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음란하고 악한 여인과 결혼을 하는 것 만해도 괴로워 죽을 지경인데, 게다가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들까지도 음란한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식을 낳고 싶겠습니까? 이런 결혼은 정말로 비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인 호세아는 신앙적으로 올바른 가문의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아름다운 가정을 꾸미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결혼이 필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웬일인지 보통 가정의 처녀도 아닌 너무나 악하고 추한 여인을 아내로 맞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 답은 하나님께서는 지금 말도 안 되는 사랑을 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그리스도의 예표이며,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의 예표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지금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도 엄청나게 타락한 존재인 북이스라엘과 그리스도께서 결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타락한 북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이 음란한 고멜과 같이 너무나도 더럽고 추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로서 고멜과의 결혼을 통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간절히 호소하며 눈물로 회개할 것을 촉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세아가 짊어진 십자가는 고멜과의 결혼이었습니다. 고멜과의 결혼은 자신이 죽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실제로 죽이시면서까지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즉 택한 백성들을 신부로 삼으시려고 말도 안 되는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는 죄를 범한 모든 인간들을 죽이는 심판을 하셔야만 하지만, 아무런 흠과 허물과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심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호세아의 자녀들
‘이스르엘’: 말씀에 순종하여 고멜과 결혼한 호세아가 첫 아들을 낳자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는 단 한 글자만 다르지만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승리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애정과 복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르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시다.’는 것으로 멸망을 상징합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상징되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보기를 싫어하고 우상 숭배하는 죄악에 대한 징계로서, 이제 이 백성들을 북이스라엘 땅에서 그 이름이 의미하는 그대로 사방으로 흩으시고 분산시켜 이방인의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게 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이스라엘’로서가 아닌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의미를 가진 ‘이스르엘’ 즉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요 저주의 백성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르엘의 피’는 북이스라엘의 열 번째 왕이 된 예후가 엘리사의 생도로부터 소명을 받고(왕하 9:1-10)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아합 왕의 집과 바알 숭배자들을 몰살시킨 대숙정(왕하 10) 때 흘린 피를 가리킵니다. 이 피 흘림은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피 흘림 것에 대하여 예후 왕조에게 책임을 묻고 보수(報讎: 원수를 갚다.)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한 보수가 아닙니다. 이 보수는 예후가 행한 ‘대숙정’에 대한 보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후는 대숙정을 행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왕하 10:30). 따라서 보수를 받는 원인은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예후는 왕이 된 후에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후는 비록 바알과 우상숭배자들을 척결하기는 했지만 북이스라엘의 창시자인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 우상을 제거하지 않고 섬김으로써 여로보암 1세의 길을 따라갔습니다.(왕하 10:29) 하나님께서는 예후 왕조도 역시 아합과 같은 방법으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후 왕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후 4대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왕하 15:10).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어서는 안 되고 전체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을 원하십니다. 성도의 신앙이 온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온전케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우상 숭배한 예후 왕조에 대한 심판의 선언에 이어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엘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심히 부패하였으나 예후가 도구가 되어 심판하여, 다시 여호와 신앙으로 복귀하는 듯하였지만, 예후는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예후 왕조는 물론 북이스라엘 백성들까지도 우상 숭배의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16:1-4). 이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후 왕조의 멸망을 선언하시고, 이제는 죄악이 관영한 북이스라엘마저 멸망시킬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이 B. 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그대로 성취가 되고 말았습니다(왕하 17:1-28).
‘로루하마’: 호세아가 고멜에게서 딸을 낳자 이번에는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짓게 하셨습니다. 이는 ‘긍휼을 받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을 말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악 된 자기의 길을 갈지라도 언제나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용서와 긍휼을 북이스라엘에게서 거두신다고 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심판의 경고를 듣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긍휼과 자비의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회개의 때를 놓치면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아직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감사하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 회개할 것이 있으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에게는 여전히 긍휼을 베푸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절에서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의 남유다 왕을 언급한 것은, 장차 온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 중에서 탄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유다의 백성들에게는 북이스라엘과 같이 죄악을 범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경고로도 주어졌습니다. 비록 남북으로 나라가 갈라졌지만 남유다가 다윗의 가계를 계승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남유다의 왕을 신본주의적 정통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을 하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에도 남유다는 보호해 주셨습니다. 비록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으나(B. C. 586년) 70년이라고 하는 한정적인 기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만드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구원을 이방의 우상들이 주는 것처럼 열심히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남유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역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낼 것이며 참된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암미’: 고멜의 세 번째 출산은 아들이었습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같이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데, 앞의 두 이름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심판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이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언약의 관계를 청산하신다는 가장 처참한 저주의 선포입니다. 이스르엘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단순한 징계의 선포라면, 로루하마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신다는 선포이며, 로암미는 북이스라엘은 이방과 같이 취급한다는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르엘과 로루하마라는 이름을 의미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멸망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부모가 출산한 아이에게는 약 3년 동안 젖을 먹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호세아의 두 번째 자녀인 로루하마와 세 번째 자녀인 로암미 사이에는 약 4-5년 터울이 질 것입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을 참고 인내하신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죄악 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백성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고멜과 신실한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랑과,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온갖 죄악을 범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을 대조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세 자녀의 출산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범죄 한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북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북이스라엘 왕국 자체는 멸망할 것이나, 하나님께서 태한 백성은 회복시킬 것을 소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과 인격으로 성장케 하여,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여 죄악을 자행함으로 그들을 징계하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며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여 포로 끌려갈 것이며, 남유다도 멸망하여 바벨론에 끌려갈 것이지만, 남유다 백성들이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포로 된 곳으로부터 귀환하여 국가를 재건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도 함께 한 지도자를 따라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한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힘입어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무엇 때문일까?” “이 일이 언제쯤 끝이 날까?”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계획이 잘못 되었다. 혹은 진행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등의 논리적으로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파악하려고 합니다. 이런 논리적, 과학적인 분석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절을 찾아가거나, 무당을 찾아가서라도 잘못된 것을 찾아서 속히 고난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세상적인 방법이나 우상과 미신적인 방법을 통하여서는 원인을 알 수도 없고 고난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의 고난을 벗겨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의 보이는 것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사람의 힘과 지혜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풍요로움이 구원을 받은 징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결국 멸망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완전히 구원의 보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원을 베푸십니다.
세상에서는 혈연이나 법적인 조건을 중심으로 누구의 자녀가 되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또한 누구의 자녀인가 하는 문제는 한 개인을 인격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도 함께 묶여 대우를 받게 됩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들은 세상적으로 또 육적으로는 누구의 자녀인가를 크게 생각하면서도, 영적으로는 내가 누구의 자녀인가를 잊고 지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마귀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구원을 받아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지만, 사단의 자녀들에게는 오직 영원한 멸망과 수치와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나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북이스라엘과 같이, 현대인들이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하듯 하는 것과 같은 헛된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직 믿음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 된 우리들을 늘 변함없는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며 말씀 가운데서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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