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을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 6:1-18
겨울은 모든 것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식물들은 낙엽을 다 떨어뜨리고, 꽁꽁 언 땅에서 마치 죽은 것 같습니다. 동물들도 추워서 웅크리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동면을 하는 동물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따뜻한 봄을 대비하는 것입니다. 다시 올 날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야외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겨울철이야말로 다음 시즌에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때가 되면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그 중에서도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들이 더 많이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에 일어나는 일 중에서도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는데, 일주일, 한 달, 일 년이라고 하는 기간은 하루에 견주어 매우 긴 시간임이 틀림이 없고, 오늘 하루에 일어나는 일보다 훨씬 많은 일들 가운데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서 괴롭히는 잘못된 일들은 얼마나 많겠으며, 반대로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좋은 일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을 잘못하여 남을 아프게 한 일도 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며, ‘아 그때 내가 판단을 잘했지’ 하는 좋은 기억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올해가 꼭 보름이 남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한 해를 어떻게 보냈습니까? 이 한 해 동안에 나에게 일어난 많은 일들에 대하여 결산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 결산을 통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세심한 관심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산은 지난 일들을 통하여 새로 오는 날들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1. 실패한 것을 잊어라.
과학자들에게 본받을 수 있는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자. 또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 보자.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전등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디슨만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이 계속되는 연구와 실험을 하면서, 실패를 다시 분석하여 무엇이 잘못이 되었는가를 찾아내고 수정을 거듭하여 새로운 체계와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카메라로 사람의 모습을 찍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사진기가 발전해서 움직이는 모습까지 찍어서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이라고 하는 것이 참 놀라운 발명체가 아닙니까? 브라운관이라고 하는 것을 통하여 영상을 볼 수 있는 것에서 이제는 판판한 얇은 판을 통하여 영상을 볼 수 있게 발전을 했습니다. 삼성전자에서는 마음대로 구부릴 수 있는 판을 만드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화기를 통하여 먼 곳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과학입니까? 이제는 선이 없어도 전파를 통하여 소리가 들리고 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전기선을 연결하지 않아도 무선 전기를 통하여 움직이는 전기자동차가 카이스트에서 만들어져서 수출까지 되었습니다. 이 모든 발명품들은 수많은 실패 속에서 꽃피운 결정체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새로운 획기적인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연구와 실험 속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한 준비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만일 지난 일 년 동안에 어떤 실패를 했다고 해서 결코 비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패한 일 때문에 비관하고 괴로워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고 자존감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정말로 실패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세상 사람이나 성도나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실패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앞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준비가 덜 되었다면 더 많은 준비를 하면 될 것입니다. 방식이 달라서 실패했다면 방식을 다르게 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하는데, 성도가 실패로 인해 낙심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도우리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이사야 41:13)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실패가 전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 권능의 오른손으로 나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의인들, 선지자, 왕들, 제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100% 모두 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그 누구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이든지, 남의 모함이든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든지, 연유가 어떻게 되었는지 고통 속에 처하게 될 때도 있고, 죽음 직전에 갈 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일을 겪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좋은 땅 요단 들을 뺏기고 척박한 산지에서 목축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분명한 실패로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더 큰 부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야곱도 형을 피해 맨손으로 도망할 때에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나요?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애굽에 팔려갈 때 피지도 못한 그의 인생은 완전한 실패인 줄로 알았지만, 그로 인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아비와 형제들의 모든 가족을 먹여 살릴 뿐만 아니라, 애굽도 살리고, 이웃 나라들도 살리는 위대한 일을 해 내지 않았습니까? 다윗은 어떻습니까?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에 그의 삶은 실패자였습니다. 간음죄를 지을 때도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지 않았습니까?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에도 완전히 실패한 인생으로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매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결국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며 예수님의 가계를 잇는 성공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을 생각해 보세요.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 모든 사람이 그를 실패자라고 말하였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다시 살아나오지 않았습니까?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모진 고난과 고통과 실패를 맛보았습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를 통하여 오히려 정금과 같이 연단이 되게 만드시고 발전이 되게 만드시고 성공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셨으며, 친히 그 권능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도우심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도가 할 일은 내 자신을 잘 살펴 방법을 찾아내고, 용기를 내어 다시 도전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가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살아나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실 줄로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미움을 버리라.
사도 바울은 그토록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가르치고 기도하였는데, 돌아오는 것은 사도직을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컷 남을 위하여 시간을 버리고 돈을 버리고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해 주었더니 하는 말이 ‘너 잘난 척 하느라고 그랬냐?’ ‘너 진심에서 우러나서 그런 것이냐?’ 이런 말이 돌아왔다면 기분이 좋을까요? 주님의 사랑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양육한 결과 ‘당신이 사도가 맞습니까?’ 이런 의심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이런 말은 듣고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분뿐입니까? 미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랬어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속고 속이는 일이 허다하고, 오해하는 일도 참 많이 일어납니다.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오해 속에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 간에도 오해가 일어납니다. 미워하는 일로 발전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상처받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이 반드시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인 가족 간에도 있고, 교회 내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이라도 100% 상대방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도 못하고 상대방도 못합니다. 그럴 때마다 분을 내고 미워하게 되면 금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마음에 미움을 쌓고 있으면, 그 어떤 재미있는 일을 해도 그때뿐입니다. 사는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 놀러가도, 좋은 음식을 먹어도, 재미있는 영화를 봐도 그 마음 한 켠에는 어딘가 모르는 허전함이 있는 것입니다. 미움이 사랑을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허전함은 미움이 있는 한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미움에는 고통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인하여 더욱 미워하는 잘못까지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틈타기 가장 좋은 마음이 미움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불화하게 만들고, 금이 가게 만들어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넓히는 것은 곧 용납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인 줄로 믿습니다. 내 마음이 편하려고 하면, 내가 잘되려고 하면 사랑해야 합니다. 미워해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한데 어떤 일을 해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성공하기 위해서도 미움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화평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화평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주님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용서하는 자가 되어 새해에는 화평함을 이루며 성공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세상과의 구별을 확실히 하라.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생활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관용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불신자를 불쌍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주님을 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같은 방식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 비위를 맞추려고 그들의 방식을 따르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왜 성도는 불신자와 삶의 방식을 달리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6) 그렇지만 불신자와 극단적인 단절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믿음을 해칠 정도의 불신자와의 교제를 삼가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 바로 나입니다. 남이 한다고 따라하면 안 됩니다. 불신자와 매우 친밀한 사이가 되면, 성도가 가지 말아야 할 곳도 따라가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도 같이 하게 됩니다. 불신자와 똑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이 있습니까? 구별된 삶을 살아야 주님께서 나를 영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정말로 나를 세상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4. 빚진 것을 갚아라.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항상 불안하게 됩니다. 초조하게 됩니다. 언제 빚쟁이가 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언제 찾아와서 요구할지 모릅니다. 계산을 확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 중에 하나님께 빚진 것이 있다면 빨리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빚을 진 심령은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성물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물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십일조, 첫 열매, 맡은 직분(겔 44:8)도 성물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성물을 나중에 바치더라도 1/5을 더하여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 있어도 바쳐야 합니다. 서원한 것이 있거나 마음속으로 작정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 반드시 바쳐야 합니다. 이는 내 부담감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화평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니 복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떼어 먹는 성도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루가 구멍이 새는데 거기에 넣으면 빠져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항상 부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서 병원가고, 사기 당하고, 유혹에 빠져 유흥비로 탕진하게 되고, 결코 돈은 모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셨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복을 주셨나요? 이 모양 이 꼴로 살면서 하나님은 헌금하라고 하시나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안 주셔서 헌금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은 결코 회비가 아닙니다. 회비를 내는 사람은 그 회비를 어디에 썼느냐고 따질 수가 있지만, 헌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성물입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린 것입니다. 내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십일조도 하고, 감사헌금도 한다구요. 결단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떼어 먹는 성도에게는 결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액수도 바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큰돈을 바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성도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서 바치지 않는다고 그 돈이 내 것이 될 것 같습니까? 그 돈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 빠져나가고 맙니다. 하나님께 바치지 않으면 다른 곳에 반드시 쓰게 됩니다. 그 돈으로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귀가 좋아하는 곳에 돈을 쓰라고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동안 하나님 것 떼어 먹은 액수가 쌓여 너무 많다면 회개하는 마음으로라도 최선을 다하여 ‘회개의 헌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되어야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해가 다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과의 계산을 반드시 마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부터는 정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구별된 생활을 할 때에 거룩하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도 받고 복도 듬뿍 받는 그런 자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랑하고 싶은 마음 (0) | 2012.01.14 |
---|---|
올해는 복을 받을 수 있으려나? (0) | 2012.01.08 |
나는 벌레요 (0) | 2011.12.11 |
말도 안 되는 사랑 (0) | 2011.12.03 |
이삭 줍는 여인들 (0) | 2011.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