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벌레요 시편 22편 1-11
예전에는 실업자를 가리켜 ‘식충이’라고 불렀습니다. 밥만 먹는 벌레라는 뜻입니다. 돈이 없어서 남에게 빌붙어서 음식을 얻어먹는 사람을 가리켜 ‘빈대’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박사가 되어도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벌레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장 하찮은 것을 가리킬 때에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벌레는 작으면서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좋지 못한 것입니다. 벌레는 ‘좋지 않은 것’을 가리킬 때에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벌레’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심각한 상황에만 등장을 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벌레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런 벌레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려고 할 때에,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벌레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벌레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부류의 대표적인 벌레 같은 지도자 계급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이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제사장 계급으로 종교에 관한 전권을 행사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모든 종교 정책을 결정하고 재판까지 하는 사두개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계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율법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다루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계급이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자부심과, 70인 공회라고 하는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의장직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지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마음이 된 때가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때였습니다. 이들은 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핍박했습니다. 한 무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로 소리치며 고소하고, 또 예수님을 때리며 재판을 하였습니다. 이 때 만큼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서로 힘을 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 온갖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요? 이들이 예수님을 가장 두려워했던 이유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빼앗기게 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자신들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정치꾼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정치인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정계에 입문해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해 보겠다!’ ‘오직 국민들의 충실한 종이 되어 헌신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정치가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치가가 가지는 꿈은 오직 권력의 충심부에 앉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권력의 최고 자리에 오르겠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손에 쥐고, 권력을 사용하여 세도를 부리기 위하여 겉으로는 국민의 종을 자처하고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정치는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꾼들은 상생을 부르짖습니다. 이 상생은 저희들끼리만의 상생입니다. 국민을 살리고, 잘살게 하는 정치인을 정치꾼들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청와대나, 국회나, 기타 행정 기관에 들어가게 되면 국민과 관계되는 많은 현안들 속에서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기본에는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거할 때에는 국민들 앞에 절까지 하면서 한 표를 부탁하지만, 당선이 된 후에는 국민을 벌레같이 보는 자들이 바로 정치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권력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정치꾼들은 서로를 향해 벌레와 같은 자들이라고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벌레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권력의 쟁취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 자식들을 낳으면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즉 권력의 시작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 누구도 이 권력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도 접근하여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권세를 주겠다는 미끼로 유혹을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사단을 물리쳤습니다.
1. 벌레처럼 되신 주님
이제 2주 뒤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택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구원하기 위해서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만 했고,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는 정말 기쁘고 즐거운 날이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과 고통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육신이 못 박히는 것이니 말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요, 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한 것이 영적인 고통인데, 이 영적인 고통은 하나님께로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첫 절부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이렇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본 시에는 ‘메시아’라는 말이 없지만 대적들에게 수난을 받으시는 메시아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았는데, 그 시절에 쓴 시로서 당시 그 고통의 크기가 얼마나 컸으면 이런 시를 썼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그의 여호와 신앙은 정말로 감탄할만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에는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느낄 정도로 극심한 환난과 고통 속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당하고 있는 그 모진 고통과 모욕과 멸시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하나님’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다윗은 인간으로부터의 모든 구원의 손길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역설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다윗은 이런 탄식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일까요? 몸이 아플 때인가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프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 아플 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일까요?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대한민국입니다. 얼마나 아프면 자살을 했을까? 이렇게 감싸는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자살이유는 그토록 아픈 것이 아니었지만,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적이 떨어졌다고 자살하고, 부부싸움하고 자살하고, 애인하고 헤어져서 자살하고, 승진 못해서 자살하고, 비리로 조사를 받게 되니까 자살합니다.
주님께 있어서 가장 극심한 고통은 멸시와 천대가 아니었습니다. 병정들로부터 채찍질 당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 고통의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영혼이 단절되는, 영혼이 버림을 받는 그것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이는 영혼의 절규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많은 고통들이 있습니다. 정말 아픈 고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고통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아직 내 영혼은 버림을 받지 않았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꼭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꼭 같은 피조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아무리 인간이 잘나고 똑똑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더라도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2:27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식물에서 피어나는 꽃보다도 못한 솔로몬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식물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동일한 피조물이지만 우리의 몸에는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영혼’이 있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바로 이 영혼이 하나님과 단절이 될 때가 가장 무섭고 두려운 시간이요, 가장 아픈 고통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윗처럼 또는 욥처럼 ‘나는 벌레요’ 이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만 그런 시간들이 오직 나에게만 오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우리 성도는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나님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 우리의 영혼은 붙들고 있기 때문에, 고후 4:7-9에서 바울은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꼭 붙들고 계십니다. 단 한 번도 내 영혼을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지옥의 벌레
막9: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의 모습입니다. 구더기와 같은 벌레도 죽지 않는 곳입니다. 지옥에 들어간 영혼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 지옥에 갑니까? 가난한 자입니까? 살인죄를 범한 자들입니까? 사기를 친 사람들입니까? 간음한 자입니까? 병이 들어서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면 부자라서 지옥에 갑니까? 남을 도와주지 않아서 지옥에 갈까요? 그 누구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서 끊어진 영혼’을 가진 자가 가는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혼의 단절이 제일 무섭고 두렵고 떨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14:11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 온갖 부요함과 영화를 자랑하던 이스라엘이지만, 이제는 스올 즉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향락 속에 연주하던 비파 소리까지도 지옥으로 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 밑에 구더기가 깔려 있습니다. 지렁이가 덮어옵니다. 지옥이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가장 더럽다고 생각하던 구더기와 지렁이와 같은 벌레들도 죽지 않고 내 몸을 마음대로 유린하는 곳입니다.
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헤롯은 살았을 때에는 벌레에게 먹혀 죽었고, 죽어서 지옥에 가서도 벌레에게 덮여 영원한 고통 속에 죽지도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지옥이 바로 하나님과 영혼이 단절된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더욱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하기에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맑아져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3. 깨달음을 주는 벌레
욘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니느웨에 가서 멸망을 선포한 후에 언덕에 올라가서 성을 바라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멸망을 시키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을 땅에서 저절로 자라난 박 넝쿨이 가려 요나는 다소 시원한 그늘에서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보내셔서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박 넝쿨은 당연히 시들어 말라져서 더 이상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나는 그 박 넝쿨이 벌레 먹어 시듦을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네가 심지도, 키우지도 않은 박 넝쿨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저 큰 성 니느웨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짐승들은 얼마나 더 소중하겠느냐?”
요나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곳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을 당하는 소돔이었지만, 그 중에 단 한 사람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가족만은 구원해 내지 않으셨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박 넝쿨과 벌레를 통하여 요나가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출16:20을 보면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당일에 다 먹고 다음 날까지 절대로 남기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비록 하늘에서 내린 만나라도 썩어지고 벌레가 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기를 바라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만나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 만나는 너무나 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바로 만나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말씀 또 주일에 주시는 말씀이 만나입니다. 그러나 그 만나는 순종할 때에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몰라서 벌레가 먹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듣지 않아서 벌레가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영혼에 벌레가 먹고 썩어서 냄새가 나게 되는 것임을 깨달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넘쳐나지만, 내 마음에 합당하지 않으면 버리고, 내 기분에 들지 않으면 외면하고, 내 생각과 다르면 부인하고, 내 멋대로 해석하고, 내 유익을 포기해야 하면 말씀을 버리는 존재들이 현대 종교인들입니다. 이런 종교인은 무늬만 기독교인일 따름입니다. 결코 성도는 아닌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불쌍한 영혼들이 바로 이단 사이비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성도에게만 기쁜 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성탄절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과 같이 육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결코 성탄절이 아닐 것입니다. 영혼에 벌레 먹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오신 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영혼이 병이 들었으나 주님께서 치료해 주심을 느끼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오신 날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님 오신 날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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