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5
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파랑새는 몸길이는 28㎝ 정도이며, 몸은 선명한 청록색을 띠고 머리와 부리는 검정색을 띱니다. 날개도 검정색을 띠는데, 첫째 날개깃의 중앙에는 창백한 코발트색의 얼룩무늬(비행중에는 흰색으로 보임)가 있습니다. 부리와 다리는 선명한 산호색입니다. 울 때에는 '케엣, 케엣' 또는 '케케켓, 케에케켓'하는 울음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개활지·농지·정원·임지·산림 등 대부분의 장소에서 서식하며, 번식은 침엽수림이나 낙엽 활엽수림에서 하며, 크고 오래된 교목의 줄기에 있는 썩은 구멍이나 딱따구리의 낡은 둥지를 이용해서 보금자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주로 인도에서 일본에 걸쳐 분포하며, 남쪽으로 보르네오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에 서식합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도 번식하며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철새라고 합니다. 상당히 예쁜 새라고 하겠습니다.
이 파랑새를 찾아서 숲에도 가보고 들판에도 가 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어서 낙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붕 위에 파랑새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이나,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들판으로 산 위로 달려갔지만 무지개는 잡을 수 없었다고 하는 말들은 곧 행복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모두가 허사였으며 결국 행복은 자기 집에서 찾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용모나 가진 재산이나 학문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만족하고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물론 항상 부족한 것을 깨닫고 발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있을 때에 보다 나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하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모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과 경쟁하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나는 저 사람보다는 더 잘 살아야 하고, 저 사람이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마음이 든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목표를 상실한 것이며, 그런 사람은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되는 모습으로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없는 것을 불평하면서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불행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은 다섯 가지라고 합니다. (1)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 한 재산. (2)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3)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4)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5)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물질주의, 외모주의, 출세지향주의, 완벽주의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은 어떤 것일까요? 천국을 소유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3-12)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찾을 수 있는 천국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의 가장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마음이 늘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맑은 영혼, 청결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남을 긍휼이 여길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화평케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행복이란 있을 수가 없으며,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진 다음에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잘 이루어져야 하고, 세상에서 살 때에 빛과 소금의 모습이 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의 개념입니다.
천국에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천국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천국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하여 1-19절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새사람이 된 성도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가져야 할 박애정신(1,2절)과 용서(3,4절), 그리고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가져야 될 믿음의 확신(5,6절)과 절대적 헌신(7-10)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제자로서 가져야 할 것들의 일부를 실례를 들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의 근본,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에 따라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 안에 서 과거의 죄를 씻음 받고 천국의 시민권을 얻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사는 존재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전혀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 문둥병자의 치유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열 문둥병자 모두가 일단 함께 육체적인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아홉 명의 유대인은 너무나 좋아서 그대로 떠나갔고 오직 이방인처럼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 출신의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해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마리아인은 주님으로부터 육체적인 치유에 이어 영혼까지 치유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선포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복음의 은혜에 접하게 될 것인데, 대다수는 육적인 차원에서만 이를 받아들여 복음을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천국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여 진정으로 주님께 감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극히 일부의 택한 자만이 주님의 복음의 참 가치를 깨닫게 되고 감사하며, 천국의 구원까지 얻을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구원을 어떤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선포되고 있는 주님의 복음을 그저 육신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그 개념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천국은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에는 3가지의 저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희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모습이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활하고 있는 모습도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며,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마치 천국에 대하여 계속하여 거짓말을 해 왔다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천국이 올 것이냐고 빈정거리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 질문에 관연 대답할 수 있는 메시아인가를 시험하기 위한 까닭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신 날 밤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질문을 하였습니다.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눅 22:67) 이처럼 바리새인들이 천국이 언제 임하느냐고 묻는 것은 ‘그리스도, 메시아’가 아니라고 단정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당시 종교적 관심 사항이 천국에 대하여 고조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질문을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교만하였습니다.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 자들입니까?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 천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심사가 비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왔다고 하는데, 도대체 아무 것도 변함이 없지 않느냐? 정말 천국이 온 것이냐?하고 비꼬는 것입니다.
이는 천국에 대한 개념 파악이 안 된 것입니다.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는 물질적인 의미로서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곳으로서의 영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을 이방의 정치적, 경제적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임하는 민족적, 정치적 왕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천국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천국이라고 하는 곳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이 천국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지만, 사탄의 간계로 인하여 사람들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들의 질문하는 의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만, 제자들과 군중들을 위하여 다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볼 수 있게’라는 말은 철저한 관찰, 주의를 요하는 조사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고대 헬라에서는 천체의 관찰이나 질병의 증세를 관할 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즉 아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천국은 절대로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유대인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외적인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곳인가? 아니면 저곳인가? 메시아가 통치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화로움과 물질이 풍부한 곳 마치 유토피아가 실현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된 개념에 대하여 분명하게 교정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너희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영접한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계시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고 어디입니까?
그렇다면 실제적인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볼 수 있는 천국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천국은 언제에 이루어집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영적으로만 이루어진 천국입니다. 그러나 영들만이 있다고 해서 볼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마치 꿈을 꾸게 되면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뇌의 작용으로 인하여 생생하게 볼 수도 있고, 흐릿하게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지극한 복이 있는 곳입니다. 행복이 넘치는 곳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행복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계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곳이 천국이 아니면 어디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늘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모자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힘들고 어렵고 불편한 일들이 생겨납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국민일보에 “어느 부인의 9일간 천국 만들기”라고 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어느 날 한 부인이 가정생활을 비관하며 간절히 빌었습니다. “하나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 때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힘들지? 네 마음을 이해한다. 이제 너의 소원을 들어줄 텐데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보겠니?" 그 부인이 “예!”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집안이 지저분한 것 같은데 네가 죽은 후 정리를 잘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청소 좀 할래?” 그 후 그녀는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3일 후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애들이 맘에 걸리지? 네가 죽은 후 애들이 '엄마는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낄 수 있도록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 볼래?” 그 후 3일 동안 그녀는 애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스럽게 요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갈 때가 됐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하자! 너 남편 때문에 상처 많이 받고 미웠지? 그래도 장례식 때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3일 동안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줘 봐라.”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그녀는 3일 동안 최대한 남편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다시 3일 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천국으로 가자! 그런데 그 전에 네 집을 한 번 돌아 보려무나!” 그래서 집을 돌아보니까 깨끗한 집에서 오랜만에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천국으로 떠나고 싶지 않았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9일 동안 네가 만든 거야!” 그때 부인이 말했습니다. “정말이요? 그러면 이제부터 여기서 천국을 만들어가며 살아 볼래요!”
9일 동안 천국 만들기의 기적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희생의 길은 행복으로 가는 밝은 길입니다. 희생의 짐을 지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집니다. 나 너를 위해 모든 것을 걸 때, 너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희생은 부담스럽지만 그 부담을 각오할 때 행복의 신비가 찾아옵니다. 자기 몰입의 신비주의자는 되지 말아야 하지만 희생의 신비를 아는 자는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글입니다.
행복하지 않는 이유는 나에게 있습니다. 내 마음이 천국이 되지 못하는 것도 바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도 모든 문제가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바로 너’ 때문이라고 합니다. 행복도 내 안 에 있습니다. 불행도 내 안에 있습니다. 문제 해결하는 방법도 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 말씀과 산상보훈의 8복을 잘 생각해 보면 모든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행복해 질 때에 생활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 질 때에 가족이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 질 것입니다. 이미 천국과 행복은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 천국과 행복을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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