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나?

chukang 2011. 9. 10. 20:31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나? 에스겔 1:1-3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허전한 것을 느끼게 되고, 음식물을 넣어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만 합니다. 맹수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부터 아주 작은 하루살이까지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어항에 있는 구피라는 열대어는 배가 고프면 자기가 낳은 새끼를 잡아먹습니다. 어린이들이 귀엽다고 집에서 키우는 햄스터 같은 것들도 배가 고프면 참지를 못하고 한 우리 속에서 살고 있는 제일 약한 것부터 잡아먹습니다.

  동물들은 소리를 내거나 행동으로 배고픔을 표현합니다. 식물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식물은 배가 고프면 잎이 시들어 지겠죠! 열매를 맺는 식물의 경우에는 수분이 모자라게 되면 열매로부터 수분을 다시 빼앗아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물 때에는 열매가 쭈그러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동물, 식물들 모두 자기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 몸에서 어떤 영양소가 부족하면 그 영양소가 들어있는 음식이 먹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동물들도 먹는 것들이 다 다른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의 몸을 최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식물도 종류에 따라서 땅으로부터 흡수하는 영양소가 다 다릅니다. 키우는 화초의 경우에는 그 화초의 특성에 따라 다른 비료를 주어야합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동물들과 같이 배가 고플 때에만 사냥을 해서 먹거나, 열매 등을 먹었지만, 농경사회로 발전한 후에는 점차 시간을 정해 놓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맹수들과의 싸움, 부족 간의 전쟁을 치르려면 더욱 많은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을 쥔 사람들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단지 생존의 위해서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재미 즉 맛있는 음식, 맛있는 과일 등 ‘식도락’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무엇을 먹을까?’의 문제인데 ‘육신의 정욕’으로 진행이 된 것입니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음식점에 가면 무엇이 맛있다고 찾아갑니다. 물론 이것을 꼭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육신의 정욕적인 요소가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먹는 것을 해결한 뒤에는 또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쉽게 말하면 소일거리를 찾게 됩니다. 먹는 것에서도 더 맛있는 것을 찾게 되고, 눈으로는 보고 즐길 것을 찾으며, 행동을 함으로써 즐길 것들이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것들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의식주가 해결이 되더라도 여전히 허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켜도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에 단지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로 이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이 흡족, 즉 영적으로 만족한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만족하지 못하게 되면 자꾸만 마음이 허전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창 1:26)는 것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이 삶의 다가 아니고, 영적인 부분을 채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분이 모자라게 되면 자꾸만 마음이 허전해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좋은 옷을 입어도, 좋은 집에 살아도 어딘가 부족한 것 같고, 마음은 자꾸만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요구는 몸이 음식물의 섭취를 죽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계속 채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을 위하여 무엇을 채우라고 하는 것일까요?

 

1. 두루마리를 먹으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두루마리입니다. 이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니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적인 만족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꿀을 먹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만족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며 기쁘게 만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지 않게 되면 영혼 혹은 마음이 허전하게 되어 채울 것들을 찾아 헤매며 방황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달기가 꿀 같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말씀 충만이요,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의 빈공간이 없어지게 됩니다. 즉 우리의 마음에 악한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것에 집중하게 되면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옆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를 못하게 됩니다. 또 어떤 생각을 골똘하게 하고 있으면 눈은 뜨고 있지만, 앞에서 누가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해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일들로 마음이 가득 차게 되면, 다른 세상적인 일들이 파고들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미 죄를 가진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온전히 그 마음을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태어난 죄의 속성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요한1서 2:16의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도 이런 것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불신자의 경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죄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가 원하는 욕망들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악한 정욕 등입니다. 인간 생존을 위하여 먹을 것을 정욕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추구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요, 이는 술, 담배, 마약, 정당하지 않은 성적 욕구와 같은 것들입니다.

  대한민국 신지식인 1호로 뽑인 사람이 ‘심형래’입니다. 그는 개그맨으로 영구라는 바보 캐릭터로 인기를 얻어 돈을 벌고, 그 돈을 ‘영구아트’라는 영화사를 설립하여, 영구와 공룡 쭈쭈, 티라노의 발톱, 파워킹, 드래곤투카,용가리, 디워, 라스트 갓 파더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도박에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영화도 흥행에 실패하여 무려 900억원이나 되는 부채로 그의 재산은 모두 압류가 당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개그맨 황기순, 가수 신정환은 도막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교도소에 수감까지 되어 있습니다. 탤런트 김성민, 개그맨 전창걸은 대마초, 필로폰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예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임산부까지 마약을 하여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은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의 정욕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이러한 심령들이 육신의 정욕적인 것으로 채우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요소들로 유혹을 합니다. 마귀는 결코 사람에게 이런 악한 것들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을 보게 하고, 가까이 가게 만들뿐입니다. 그가 스스로 악한 것을 채워 넣는 것입니다.

  주기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행위,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역시 심령이 악한 것에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빅토르 위고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과 같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다면 그것을 육신의 정욕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쇼핑 중독에 걸렸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이 또한 마음이 허전하게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악한 것이 틈탈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단단히 빗장을 걸고 있어도 마귀는 호시탐탐 노리다가 틈만 있으며 파고들려고 하는데, 마음이 허전하다는 것은 마음의 문을 확짝 열고 ‘마귀야 어서 들어오너라.’하고 환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말씀이 채워질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기쁘고 흡족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으로 만족하는 심령, 주님께 집중하는 심령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악한 것도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혹 한 길로 온다고 할지라도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신 28:7)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지켜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이런 일이 거꾸로 일어나서, “여호와께서 너로 네 대적 앞에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한 길로 그들을 치러 나가서는 그들의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신 28:25) 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받고 준행하는 자가 되어 성령의 돌보심으로 악한 원수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온갖 악한 정욕이 나를 삼키려고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나 하나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악한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다른 영혼들에게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진심으로 받는 자에게는 큰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라고 시인을 노래했으며, 솔로몬도 잠언에서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 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잠 24:13)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하라’ 이 말씀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한 말에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았지만, 받아들인 뒤에 그 계시의 내용으로 인하여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내용의 말씀을 들은 에스겔에게도 이러한 근심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에스겔과 요한의 근심은 곧 우리에게 주어지는 전도에 대한 부담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저들이 처한 환경은 자칫하면 죽음으로 이르게 되는 것은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착한 행실’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착한 행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 앞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작은 꼬투리라도 찾아내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작은 흠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어떤 면에서는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요구만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또한 용기까지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힘과 용기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러면 왜 악한 것들을 물리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잠시 기쁨을 누리는 돌짝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심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0-22)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부름을 받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구로 선택하셨다는 그 자체로써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이 된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철저한 통제와 인도를 받아야 하며, 그 다스림에 나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 가운데 비참한 상황 속에 빠진 영혼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은 요즘은 얼마나 많이 배부르게 먹을 것인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좀 더 질적으로 나은 식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는 어떤 음식이든지 즐겁게 하는 식사가 가장 훌륭한 양질의 식사이며 반대로 억지로 먹는 음식은 인체에 큰 해를 끼치는 나쁜 식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억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 우리의 영혼 속에 제대로 받아들여져서 만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하나님께서 주실 두루마리를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기다렸듯이, 신령한 영의 양식을 사모하며 기다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까지도 강건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에스겔과 같이 두루마리를 먹을 때에 달기가 꿀과 같이 되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 속에서 충분히 소화가 되어 힘을 얻게 되고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내게 끊임없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귀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모두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도 다를 것입니다.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에스겔처럼 우리의 영혼을 강건케 하는 이 말씀을 사모하고 적극적으로 섭취하며 충분하게 소화를 시켜서 주님 주신 사명을 완수해 나갈 수 있는 힘을 받는 우리들이 다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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