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내 편한 대로의 생활

chukang 2011. 8. 28. 08:40

 

내 편한 대로의 생활 (요한복음 8:31-36)

 

  21세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들어 있지만, 쉽고 단순하게 정리를 하면 내 편한 대로의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경제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봉건제도 아래에서 일반 서민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습니다. 지주에게 땅을 빌어 농사를 짓고, 농사지은 것의 반 이상을 심한 경우에는 8/10, 9/10 까지도 빼앗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농사꾼들은 말만 자유인이지 사실은 지주에게 종살이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자유를 외치는 것이 사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봉건제도는 산업 혁명이나 시민 혁명과 같은 것을 통하여 붕괴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로 작은 성주나 혹은 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소유주들이나 대지주의 일을 맡은 집사 계급으로부터 불만은 시작이 되었고,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함께 모이게 되면서 정보 교환과 다수의 힘으로 자본가와의 협상 등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불만의 내용은 일하는 시간에 비하여 돈을 너무 적게 준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너무나 작은 돈을 받기 때문에 늘 가난 속에서 허덕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기계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즉 작업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자신에게 주어진 할당량은 반드시 채워야 하기 때문에 몸이 아파도 쉴 수가 없고, 가정 형편은 전혀 고려가 되지 않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쟁이후에 산업화가 되는 과정에서도 자본가의 착취 속에서 고통을 받는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고, 현재까지도 열악한 근로 조건 속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적인 경쟁력을 위하여 정부에서도 묵인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까지도 조금이라도 덜 주려고 하는 회사 측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하는 노동자 측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인 불황으로 인하여 실업자가 늘어나고 있고, 물가는 오르고 있기 때문에 받는 월급에 비해서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일하던 시절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은 환경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물질적인 여유가 생기니까, 생계 문제에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초기에는 저축을 하여 집을 사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를 사고, 문화생활, 여가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좀 더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여가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5일제가 도입이 되었습니다. 일은 조금하고 돈은 더 많이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전반에 파고들고, 이제는 남의 간섭을 받기가 싫어졌습니다. 즉 육체적인 구속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구속까지도 거부하게 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국가의 개입이나 사회적 정의와 질서까지도 부인하는 상태까지 오게 된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기독교학교에서 채플을 거부하는 것, 종교적 신념이라고 하는 핑계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 소원을 하게 되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 파고든 편하고 즐거운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복지주의’입니다. 국민의 복지를 국가에서 어느 정도 보장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편함에 빠져있는 생활을 계속적으로 해 나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게 됩니다. 국민에게 더 많은 복지를 주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세금입니다. 세금은 많이 버는 사람이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국가에서 재정을 부담하는 복지 혜택을 다 받고 싶어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지만, 있는 사람도 무상으로 혜택을 받으려고 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불황입니다. 물가가 치솟고 마음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그런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재력가들과 협잡하여 기본이 수천만원이요, 수억원씩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부패를 보는 서민들의 마음에는 나도 한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어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국가가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 눈 앞의 이익이라도 챙기려고 하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복지포퓰리즘이라고 하는 것으로 현시대의 불안한 사람의 마음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는 결코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국가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들은 국가가 과도한 부채를 안고 위기에 빠지도록 만드는 나쁜 정책을 복지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 현 시대의 자유주의와 편리주의에 편승하여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개인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또 한국 전쟁을 통하여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더 이상 비교가 불가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주장합니다. 국가라고 하는 단체는 국민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대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와 같은 것들입니다.

1968년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이승복군과 온 가족을 총살했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반공정신을 기리고 분단의 민족사를 기리기 위하여 기념관을 강원도 평창에 1992년에 완공했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때에 이승복군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적이 없다고 증언을 하라고 동네 주민들을 회유하였고 기념관까지 철거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중동에서 근로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폭파하여 잡힌 ‘김현희’ 북한 공작원을 협박하여, 비행기를 폭파한 것은 남한 중앙정보부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기자회견을 하라고 협박을 하였지만,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주님을 영접하고, 북한 정권의 허구를 알리며, 당시 희생 가족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살고 있는 김현희는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에서는 보호해 주던 형사들을 철수시키고, 김현희와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하고 숨어 지내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복지 포퓰리즘을 외치고 있는 민주당은 바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추종자들인 김대중과 노무현의 추종세력들입니다. 전교조는 김대중이 합법화시켰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은 자신들을 노동자라고 하며 스스로 선생이 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는 논리로 지지를 받았지만, 사실은 그 자유는 방종이며, 학생들의 앞날을 쾌락과 편의주의 속으로 빠뜨리고 경쟁력을 떨어뜨려 미래를 망쳐버린 장본인들입니다.

  국사교과서를 집필한 사람들은, 근대 한국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 부분은 전혀 기술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은 북한과 남한이 공동책임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국방부에서는 시정 요구를 하였지만 집필자의 권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들도 자유가 좋을 것입니다. 아무런 제약이 없는 자유가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작게는 나를 망치게 되고 가정을 망치고 사회를 망치고 결국에는 국가를 망쳐서 가지고 있는 자유마저 빼앗겨 버리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내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오늘 밤새도록 즐기지 않을 것입니다. 즐기다가도 시간을 봐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일을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 뒤에는, 한 달 뒤에는, 또 내년에는, 5년 후에는, 10년 후에는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내가 추구하고 바라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바로 오늘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제를 가리켜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절제하라는 말을 한다고 하여 왜 자유를 뺏느냐고 왜 간섭하느냐고 반발을 해서는 안 되겠죠. 다른 사람의 제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니라고 칸트는 말했습니다. 목적 자체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자유라고 합니다. 물론 목적 자체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자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세상에서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가르쳐 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자유의 개념은 사람에 따라서 국가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에 자유의 정의를 고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지음을 받았고, 어떤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을까요? 이것을 찾을 수 있고 깨닫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유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 그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영화롭게 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1:1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며 사는 삶을 보장 받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양하며 경배하며 사는 삶을 가리켜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으로 인하여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인간들의 죄는 점점 더 쌓여만 갑니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들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탑을 쌓는 것은 중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처로 뻗어나간 인간들은 흩어진 곳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 만든 우상 앞에 절하며 신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사랑하시어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를 택하시어 그와 약조를 맺으시고, 가나안 지경을 영토로 주시고,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가깝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심으로써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율법 속에는 인간의 활동을 제약하는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율법을 지킬 때에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지위가 보장이 되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밖에서는 최소한의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없는 무지한 생활과 온갖 우상에 매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생활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은 편리한 것 같습니다. 자유로운 것 같습니다. 그 편리함과 자유는 마귀에게 마음과 정신이 미혹되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불이나 물가에 가는 것, 비탈길에 가는 것을 그 부모가 제지하고 보호하는 것과 같이 택한 백성들을 위험한 곳, 더러운 곳, 악한 곳에 가지 못하게 하시고, 미혹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기 위하여 율법 안에 거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자유의 제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확증이 되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당연히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구원을 다른 말로하면 ‘자유’입니다. 마귀에게 매어 속박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알게 하고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자유를 주시기 위한 단 한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내 말에 거하면” 주님의 말씀 속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는 또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수도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듣고 깨닫지 못하고서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고, 믿음이 없이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의 발에는 굵은 쇠사슬이 매어 있습니다. 그 쇠사슬에는 무거운 쇠 덩어리까지 달려 있습니다. 어깨 위에는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다만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내려주시려고 하십니다. 쇠사슬을 풀어주시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유를 제한하려고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지옥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편안하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행복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삶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면이나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방황하고 있고, 어딘가 불안하고 허전한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자유의 필요성이나 존재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영적인 문제였지만, 그들은 육체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쉽게 따르지는 못합니다. 세상적인 진리는 불완전하고 거짓투성이지만 언제나 현실과 타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인 참 진리는 거짓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진리를 따르든지 아니면 거짓에 속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거짓에 속한 자들이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진리를 외치면서도 참 진리이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현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까요? 요 3:20을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이 빛이 비추면 온갖 더러운 행위가 다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범한 죄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고, 결코 감출 수도 없으며, 죄악의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속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진리로, 빛을 빛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둠이 가져다주는 온갖 쾌락과 편리함을 포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또 다른 죄인의 특징은 교만한 것입니다. 진리를 믿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 앞에서 모든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여 이전의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이며, 계속해서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며 빛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의 요소들을 진리의 빛 앞에서 드러내어 제거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자의 삶인데, 교만한 자들은 인간적이고 죄악 된 뜻과 판단을 꺾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유대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그들과 동일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는 교만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교만은 멸망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악과 마귀의 올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마귀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영적인 죄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 근심과 염려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5).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고 있는 모든 세상 짐을 대신 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11:28). 모든 근심과 걱정, 모든 염려 다 주님께 맡기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도 역시 온전한 믿음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자가 되게 하시고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말씀으로 생명 양식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길과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성도들입니다. 그 자유로 인해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세상 근심과 염려로부터 벗어나, 주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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