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10:24-33
사람은 제각기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무서워하는 것이 있는 반면에 남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기를 할 때에 혹시 지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염려 때문에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실력은 좀 모자라지면 ‘지면 어때’ 하고 열심히 경기를 해서 승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시나 틀리면 어떻게 하나. 혹시나 지면 어떻게 하나. 소심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필요한 말은 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고, 반드시 해야 할 일도 남의 눈치 보느라고 하지 못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내 자신의 정의, 진실과 같은 것보다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내 모습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체면 문화’라는 것 때문에 더욱 소심해 지고 기회를 잃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에서는 8월 24일 무상급식에 관한 투표를 하게 되는데, 단계적 무상 급식과, 전면 무상 급식을 놓고 서로 양측의 토론을 하는데, 전면 무상 급식을 찬성한다는 대표자들이 투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투표용지에, 단계적 무상 급식과 전면 무상 급식에 대하여 표를 찍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면 무상급식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투표할 때에 시민들에게 전면 무상급식에 표를 찍으라고 설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투표를 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것은 불법이 됩니다. 자신들이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고 바른 것이라면 정당하게 투표를 해서 시민들의 의견대로 수렴하고 시행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전 세계 선진국들이 무상복지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국가 재정이 막대한 적자 상태가 되어 국가 부도까지 몰리게 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뒤늦은 복지 포퓰리즘에 빠져서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이는 정말로 국민의 복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권을 잡기 위해 간교한 수단을 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잡아 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인들은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반면에, 혹시나 반대하면 나쁜 사람으로 몰릴까봐 바른 말도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까?
요즘의 한국 교회나 성도들은 하나님 눈치 보는 것보다, 불신자 눈치 보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불신자에게서 인정을 받아 무엇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잘 보이면 전도가 될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바른 말하는 성도는 말을 못하게 하는 풍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귀신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점보는 얘기, 무당 얘기, 절간 얘기 등등 온갖 악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떳떳해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말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사단과 그 추종 세력인 귀신들은 사람들의 심령을 파고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의 마음을 점령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성도들을 핍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성도가 가지고 있는 영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 영력이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 영접한다고 해서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힘을 주셔야 되는데, 성령의 힘을 받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 스스로 믿음의 확신이 없을 때, 말씀에 근거한 생활을 하지 못할 때, 기도를 하지 못할 때 등 이런 모습들은 오히려 영력을 감소시키게 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악한 세력에 눌려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초교파주의라는 허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시대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진실한 성도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 불신자들은 진실을 말하면 불편해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진실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교파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간교한 계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도로 하여금 말씀을 떠나게 만들어, 성도로 하여금 말씀에 무지하게 만든 후에는, 거짓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성도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사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은사가 아닌 은사로 가장한 마귀의 힘을 보여주고 성도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은사주의요, 오늘날 대부분의 이단들이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의 시대는 어땠을까요? 지금이 마지막 때라면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시대는 말 그대로 시작의 시대라고 하겠습니다. 사단 마귀의 세력이 지금이 더 강했을까요? 아니면 그 때가 더 강했을까요? 정확한 잣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되는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는 사단의 역사는 엄청나게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6-23절까지는 일반적으로 받게 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일반적인 고난과 박해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그 시대가 얼마나 사단 마귀가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이 이리의 무리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찢겨 먹이가 될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한 무리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칠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뱀의 지혜는 신중한 분별력을 말하는 것으로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지혜롭게 행동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비둘기의 순결은 솔직함, 순진함입니다. 즉 선한 지혜로움을 가져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순박하지 못하게 되면 교활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순결하지만 지혜롭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뱀 같이 지혜로우면서도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그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전도대로 파견되는 제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박해 일 것입니다. 지역 곳곳에 회당이 있고,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조직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제자들은 이들의 박해를 받아 체포될 수 있고, 채찍질까지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국지적인 일들이 보고가 되면 결국 총독과 헤롯왕이 나서게 될 것이며, 산헤드린 공회까지 나서서 제자들을 체포하고 박해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시면서도 제자들을 전도대로 파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체포가 되면 어떤 연유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전파가 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협박과 폭력 속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또 조리 있는 말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제자들의 입술을 주장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제자들이 하지만 그 말은 성령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에 관하여 불신자와 대화를 할 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무슨 눈치 볼 것도 없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주님을 증거할 때에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서로 적대시하게 됩니다. 불화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는 실제적인 육적인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발을 당하여 재판에 붙여질 수도 있습니다. 죽게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성도들의 신분은 하늘나라의 백성의 신분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할 것은 핍박이 올 때에 다른 곳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도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도의 효율성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합리적으로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와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박해를 피할 수 있으면서도 무조건적 순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주신 기회를 자기 마음대로 저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도 바울도 박해를 피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의 진리보다 자기 생명이나 유익을 구하는 것은 비굴한 태도요, 복음에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4절부터 28절까지는 주님께서 받으실 박해의 내용인데, 제자들도 그에 못지않은 박해를 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이 말은 이다음에 어떠한 핍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고난보다 결코 적은 고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역시도 그에 못지않은 고통을 당하며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엘세불이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바리새인들은 악의에 찬 비난으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마 12:24). 주인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말을 인용해서 자신을 집 주인으로, 제자들을 그 집 사람으로 비유하시면서, 집 주인을 ‘바알세불’로 비난한 저들이 제자들에게야 오죽하겠느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귀신의 왕인 사단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알세불은 신들이 거주했던 사당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귀신 집안의 우두머리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단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하물며 제자들이 당할 욕이 얼마나 클 것인지는 자명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8절을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이 비록 육신은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마 6:13; 24:24). 그래서 인간의 육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영육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성도들에게 아무리 큰 고통을 준다고 해도 그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수명은 80-90살입니다. 육신의 사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육신은 땅에 묻히겠지만, 영혼은 하나님 앞으로 가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 때에 사단의 박해로 인해 하나님을 배신한 자는 영영한 지옥 불에 떨어져서 영원히 죽지 않는 고통 속에 거하게 됩니다. 그 지옥의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무섭고 뜨거운 불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 불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핍박을 이기고 승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은 햇빛이 필요 없는 광명한 곳이요, 수정과 황금으로 지어진 곳입니다.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곳에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29) 참새는 일반적으로 작은 새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매매되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값싼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은 새가 붙잡히고, 땅에 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치 없는 작은 생명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새 한 마리까지 친히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렇게 쉽게 사단 마귀의 손에 넘겨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고 계십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빠져나가는 머리털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처럼 가장 작고 사소한 일까지 섭리하시는데 당신의 아들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제자들을 어찌 보호해 주시지 않으시겠느냐고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32)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 앞에서, 더 나아가서는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를 시인하면’ 이 말씀은 ‘내 안에서 시인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과 연합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생명적 연합을 이룬 존재(갈 2:20)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심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며 증거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저를 시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최후의 결정,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이는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비난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기득권과 재물의 유지와 취득을 위해 주님을 부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신앙 상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중생하지 못한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현재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람의 구원의 여유를 의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큰 환난과 핍박을 받을 경우에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이 판가름 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중심, 세상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은 그런 환난 때에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혹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질 수는 있겠지만 결단코 의도적으로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환난 속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천국에서 위를 받을 것이며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배교하여 구원과 상관없게 될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는 제자들과 같이 끝까지 핍박을 견뎌야 한다는 조건이 주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의 행위에 의해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을 허락하신 성도라면 그 행위까지도 붙잡아 주셔서 끝까지 견디게 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므로(롬 8:18) 주님과 함께 그 큰 영광에 동참하기 위하여 잠시의 고난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때로 연약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어려움으로 좌절하기 보다는 핍박 후에 올 큰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의뢰함으로 끝까지 이기는 자는 저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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