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현대 신앙의 흐름

chukang 2011. 9. 4. 07:56

현대 신앙의 흐름  골로새서 1:13-23

 

  정보화 시대라는 말은 이미 한참 지나간 용어와 같이 들립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정보화라는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미래에도 모든 분야에 걸쳐서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SW시대 즉 software 시대라는 것입니다. 세계 굴지의 IT(intelligent technology)회사인 HP사가 컴퓨터 부분 사업을 매각하기로 했다는 뉴스에 나왔습니다. 단순히 부품을 사거나 만들어서 조립 생산하는 HW(hardware) 사업을 더 이상 해서는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결정을 하게 된 데는 Apple사의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성공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을 드렸듯이 애플이 성공하게 된 것은 다른 경쟁사들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고급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소비자들이 조금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편의성과 소비자들이 사용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요소들 즉 Application(적용, 응용, 실용)을 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SW입니다.

지금 애플사는 삼성을 상대로 전 세계 법원에서 특허침해 소송을 걸었고, 일부 나라에서는 삼성제품의 판매 금지를 내렸습니다. 디자인과 SW 특허를 침해 했다는 것입니다. 한 제품의 전체를 통째로 베낀 것이 아닌 극히 일부분이라도 도용을 하였다는 법원의 판단으로 판매 금지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삼성에서는 만 명이나 되는 요원을 선발하여 SW를 개발 중이라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pad가 등장하여 컴퓨터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섣부른 예측을 하고 있지만, pad 역시 컴퓨터의 일종입니다. 즉 HW의 기반이 없는 SW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HW는 기기의 틀을 포함하여 SW가 활용될 수 있는 회로, SW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는 CPU는 모두 HW에 속합니다. 물론 그 안에도 특허는 들어 있습니다.

  또 요즘은 크라우드 컴퓨터가 선을 보이고 대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컴퓨터에는 cpu나 hard disk가 없어서 가볍고 가격이 싼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에는 모든 정보와 자료가 들어 있는 hard disk가 있어서 보안에 매우 취약하였지만, 이제는 한 곳에 대형저장소를 만들어 놓고 접속만 하면 모든 자료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형저장소가 파괴가 된다든지 해커가 침입을 하여 유출이 된다든지 하는 위험성은 내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대형저장소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크라우드 컴퓨터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크라우드 컴퓨터와 비슷한 개념의 가전제품이 바로 스마트 tv입니다. 일반 tv기능에 인터넷 기반을 통한 application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도 역시 인터넷이 안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다만 tv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hw는 항상 기초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도 HW가 필요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회장에서 물러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갑자기 머리가 나빠졌습니까? 특별히 더 훌륭한 직원이 등장하였습니까? 건강이 문제였습니다. 즉 건강은 HW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HW를 보고 찾아가고 등록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설교가 좋아도 소용이 없고, 성도간의 사랑이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즉 SW가 아무리 좋아도 먼저 사람 눈에 들어오는 HW 즉 건물이나 실내 장식과 같은 것들이 없이는 성도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건물보다 말씀이 위주가 되어야 하고, 이 말씀의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실 교회의 건물이 HW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HW입니다. 왜일까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을 갖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배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주(主)가 되고 예배당은 부(副)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당이 어디 놀이터나 공원입니까? 동물원이나 식물원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음식점일까요? 그 옛날 바리새인들이 맹세할 때에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성전 안에 있는 성물을 걸고 맹세를 하면 인정을 하는 그 어리석음과 매우 유사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연예인이나 일반인이나 성형 수술쯤은 쉽게 생각하고 쉽게 합니다. 특히 양악 수술이라고 하는 것이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Hard Wear는 무엇일까요? 신체 사이즈입니까? 예쁘고 멋진 외모입니까? 예쁘지 않으면 취직이 안 된다고 성형 수술을 합니다. 인간 내면에 들어 있는 지식과 지혜보다 겉모습만 보고 직원을 뽑았다고 합시다. 그 직원을 어느 부서에 배치하여 회사를 위한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기할 수 있겠습니까?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TV에 나와서 취직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외모나 학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할 수 있다는 열정과 성실함과 보이지 않는 내면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교회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보다는 강단에서 선포가 되는 말씀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 중에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가 없는 말씀은 모두 헛것입니다. 듣기에 사람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고,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말씀이 은혜를 줄 것 같습니까?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라는 말이 있듯이, 듣기에 재미있고 즐거울지 모르지만 돌아서서 나가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행함’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입으로 교회 이름인 ‘행함’을 거론하는 것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 이름인 ‘행함’은 믿음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요, 이것은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말하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보다, 십자가보다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단어가 행함이라고 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외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좋은 성도의 모습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등이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행위에 있어서 매우 도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성직자로서 재물을 탐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에게는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죽어가는 환자에게 ‘당신이 믿는 종교의 신이 당신을 도와줄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다신론주의자입니다. 천주교에서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마는 그것은 말뿐입니다.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을 받은 자녀들이라고 하면 의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계에서도 한경직 목사는 매우 존경을 받습니다. 저도 영락교회를 다닐 때에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목사들과 달리 명예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를 존경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처럼 세상은 도덕적인 면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그러한 청렴한 사람들이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행위구원론과 함께 어우러져서 성도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받는 은혜, 기도를 통하여 받는 은혜와 능력과 감동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는 성도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세밀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흠잡을 것이 있으면 즉각 공격을 합니다. 세상 속에 있는 더 큰 죄악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더러운 죄와 욕망들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성도에게 있는 작은 흠과 실수를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흐름은 행위구원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것, 바르게 사는 것,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 욕망을 절제하며 사는 것 모두 다 필요한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런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로서는 구원을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그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 착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일 먼저입니다.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말씀 안에, 믿음 안에 다 동일한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결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20)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관계가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죄악들, 온갖 악한 생각과 행위도 주님의 거룩한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또 내가 현재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을지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과거에 죄를 지었고, 현재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을 죄를 미리 예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까지도 용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고, 믿음으로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동받고 나의 악한 행실들을 줄여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가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행위는 지옥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행위만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행위구원론과 함께 또 하나의 현대 종교의 흐름은 ‘종교다원주의‘입니다. 2013년 부산에서 WCC 제10차 총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세계기독교연합회에 우리나라의 KNCC가 가입하고 있고, KNCC에 우리나라의 대표교단이 거의 다 가입하고 있습니다. 현재 가입하지 않은 교단은 합동, 합신, 고신 정도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정죄를 당하여 장로교총회에서 목사 면직을 받은 김재준과 그 일파들은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만들었습니다. 소위 기장측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이기 때문에 WCC 가입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WCC 가입을 찬성하는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하여 1959년에 합동과 통합으로 장로교가 분열하였습니다.

  WCC가 주창하는 것은 “삶과 봉사”입니다. 즉 이들의 주장은 ‘행위구원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봉사라는 것은 종교에 상관없이 서로 돕고 봉사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뒤에는 마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착한 삶을 강조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믿음’을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봉사를 통하여 종교가 서로 하나가 되자고 주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이들은 ‘착한 삶’이라는 것으로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삶은 행위의 구원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착한 삶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후안무치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저희들끼리는 교리를 정해 놓고,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해서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교회 일치 운동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없는 일치는 마귀가 내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에 편승하여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운 것이 바로 “초교파주의”입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교파와, 오직 예수님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파가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검은 색이 하얀 색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4-16)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죽음 뒤에는 천국과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게 되면 사람의 영혼이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한 곳에 반드시 가게 될 것인데, 그 두 곳 다 영원히 죽지 않는 곳입니다. 어느 곳으로 가고 싶습니까? 이 땅에서 사람에게 인정을 받다가 지옥에 가서 그 꺼지지 않는 풀무 불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주님께 인정을 받고 천국에 가서 그 아름다운 곳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찬송하면서 영원힌 살고 싶습니까?

 

   우리에게 HW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빛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인데 그것을 SW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이 없는 삶 속에서 인간적인 그 어떤 착한 행실도 구원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통하여 구원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속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의 표지는 십자가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소망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성도의 삶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행복한 삶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알기 쉬운 성경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벌이 되는 우상   (0) 2011.09.17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우나?   (0) 2011.09.10
내 편한 대로의 생활   (0) 2011.08.28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0) 2011.08.21
진정한 해방   (0) 201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