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성도의 도리

chukang 2011. 7. 31. 09:04

성도의 도리 에베소서 4:17-32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사람끼리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짐승의 세계나 곤충의 세계에도 질서라는 것이 있는데, 이 질서를 확대하면 도리에 포함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켜야 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의 도리 가운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 부부 간의 도리, 형제 간의 도리, 친구 간의 도리 등이 있겠죠. 옛날이 아니니까 임금과 신하 간의 도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국가 원수인 대통령에게 지켜야 할 국민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대통령도 국민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도 있겠죠?

이러한 것이 바로 삼강오륜(三綱五倫)입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데, 각각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을 말하는데 삼강과 더불어 기본적인 실천윤리입니다. 삼강오륜은 유교로 사상을 통일하고 전제군주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러한 사상은 조선의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기틀이 되었습니다. 이 사상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보다 훨씬 전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도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부모에게 효를 다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전쟁에 임하면 후퇴하지 않는다. 살생유택(殺生有擇):생명을 존중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있다. 신라 진평왕 때에 원광이라고 하는 중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삼강오륜이나 화랑5계와 같은 것들은 유교와 불교가 기본이 되어 국가의 기틀을 잡고 봉건제도를 확립하는데 사용이 되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정신력 강화가 그 주요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무서운 점은 이 내용을 계속하여 주입을 시키고 생활에 배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교는 불교의 색채를 약화시키는 효과는 가져왔지만, 또 다른 종교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불효자라고 하는 낙인이 찍힐 정도까지 온 백성들이 세뇌가 되어 버렸습니다.

  정조 때에 정약용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이 일어났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도 역시 계속적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교와 불교가 결합하여 그 경계가 일부 무너졌고, 세상 사람들은 유교와 불교의 구분이 없이 섬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즉 오랜 세월동안 강압적으로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가 되어버려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조차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화가 되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세속 종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일부 성도들 중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종교를 높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 있는 무서운 존재인 마귀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성도가 세상 종교나 이단적 요소를 접하게 될 때에 은연중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도록 만듭니다. 즉 세상 종교나 요소들을 용납하지 않게 되면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다른 종교도 존중하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꼭 티를 낸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나 미신과 같은 요소들을 받아들이면서 적당하게 타협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을 하여 인정을 받는 느낌을 가지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믿음도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 절하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이 성도를 평가하는 기준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교회와 성도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받을 때에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평가를 어느 정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비유를 맞추고 그들의 논리를 수궁하라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인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인식이 들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는 기독교가 급속도로 전파되어 가는 시기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 모습은 한 지역의 전도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고, 교회의 구성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먼저 1-16절까지에서 가르쳐주면서 교회 내의 생활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의 기본적인 덕목

  교회 내에서의 성도의 모습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2,3)고 하였습니다. ‘겸손’은 자신을 자기의 가치 이하로 낮게 생각하며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시대에 헬라인들은 이러한 겸손을 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신을 비어 종의 형태로 성육신하시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범을 통하여(빌 2:3-8) 기독교 신앙의 미덕 가운데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온유’는 온화, 정중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연약함과는 다른 뜻입니다. 오히려 강한 자가 자신을 억제하고 조절함으로써 남을 부드럽게 대하고 섬기는 자세를 말합니다. 가진 자, 힘센 자, 능력 있는 자가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오래 참음’은 상대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 혹은 잘못에 대하여 응징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하여 심판을 오래 참으시고 구속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롬 2:4; 딤전 1:16).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오래 참음이 확대된 미덕으로 ‘용납하고’는 상대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형제들의 잘못에 대해 오래 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할 때에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가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내에서도 가족 안에서도 용납하기보다는 상대방의 흠집을 들춰내기 급급하고 없는 잘못도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내가 상대방보다 더 위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으로써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은 평화, 화평, 일치, 조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 3:14에서는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을 ‘평안을 이룩한 줄’로 이해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해석을 합니다. 사실 사랑이 없이는 어떤 평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평화와 조화를 이룩하며 궁극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가 되었던 관계를 회복시켜 화목하게 하셨으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고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엡 2:14-18). 성령께서 성도들을 하나로 하나님과 성도를 하나로 사랑의 띠고 매어 주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이방인들의 생활 모습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를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기 전에는 모두 이방인으로서 허망한 마음과 어두워진 생각과 무지로 인하여 무감각해지고 방탕하며 욕심으로 가득 찬 더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17-19).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그 마음의 허망한 것’ 마음은 정신, 이성, 생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행동에 관련된 도덕적 판단에 관계되어 사용됩니다. 허망은 헛되이, 아무 목적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삶 전체의 특성입니다. 불신자의 세계는 인간 삶의 진정한 목적과 완성에 대한 개념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모든 것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총명은 사고, 이해, 목적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전인격적인 지식입니다. 이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인간은 보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살도록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무지’라고 말합니다. 이 무지가 굳어져서 돌같이 되었습니다. 무감각한 상태, 완고한 모습, 우둔한 생각을 말합니다. 이러한 무지와 무감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감각 없는 자’라는 말은 ‘고통스러워하다’는 말과 ‘~로부터 떨어진’이라는 말이 합쳐서 고통스러움이 그치다, 굳어지다, 무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고통이나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로서 죄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양심에 찔림을 받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가 되게 되면 자신을 방탕 속에 밀어 넣게 됩니다. 즉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게 되었다는 19절의 말씀은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 사회적인 도덕적 기준을 무시해 버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적인 방종을 비롯하고 돈에 대한 열망과 원래 자신의 몫이 아닌 것에 대한 탐욕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영혼이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그 삶의 만족을 모르고 결국 탐욕, 정욕의 노예가 되어 방탕한 생활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도의 모습을 갖추려면

  성도가 성도로서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이 있는데, 22절의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이 말씀이 제일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습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썩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부패가 시작되고 악취가 나고 더러운 물이 생기며 주위를 오염시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살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썩어져 가는 것들 이었습니다. 오직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불신자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불신자의 모습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죄와 결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썩어져 가도록 만드는 죄와 결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게 되면 금단 현상이 나타나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같이 죽어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우리의 마음의 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는 주님 안에서 심령이 변화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실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 우리의 행동까지도 새로워지는 생활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야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창조시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켰지만, 이제 이 죄의 장벽을 주님께서 허물어뜨려주시고 하나가 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이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새롭게 된 성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4. 세상에 대한 성도의 자세

  새사람이 된 성도의 생활에 대하여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이웃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이웃에 대하여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권면으로 바울 사도는 4가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성도는 거짓말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도 죄인 줄도 모르지만 성도는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양심의 찔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거짓은 마귀의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곧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사람과 사람 관계를 파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성도와 교회, 성도와 성도, 성도와 이웃 이 모든 관계의 파탄은 거짓말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속고 속이는 가운데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만, 성도가 그런 모습 그대로 살게 된다면 불신자와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분을 내게 되면 죄를 짓게 된다는 뜻입니다. 분을 어떤 일에 자극을 받아 흥분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연약하기 때문에 분을 내게 되면 죄에 빠질 우려가 많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은 분노가 계속되어 개인의 원한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분을 오래도록 품고 있으면 그만큼 죄에 빠질 위험성은 증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분노한 마음에는 마귀가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는 미움과 오해, 악의와 보복감 등을 조장하여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셋째,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십계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단순한 절도의 의미만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넓은 의미로는 자신의 노력이 아닌 타인의 노동의 대가로 사는 나태함을 포함한다고도 합니다. 도적질하지 않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나안 자들을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일에도 힘써 일하여야 하고, 세상적인 일에도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은 썩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은 쓸데가 없고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치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은혜를 끼치는 말이나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선한 말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의 생활 원칙을 종합적으로 압축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 됩니다. 즉 우리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므로 성도의 거룩하지 못한 일은 성령을 근심하게 만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어서도 아직 버리지 못한 모든 악한 것들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들을 다 버리고, 해야 할 일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는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시고 피로 사신 바 된 우리 성도들이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4:11) 요한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고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 안에 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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