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chukang 2011. 7. 16. 19:49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21-31

 

  오늘은 제헌절입니다.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조선왕조 건국일에 맞춰서 공포 되었다고 합니다. 헌법은 모든 법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법을 기본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각종 하위법인 민법, 형법 등을 만들었습니다. 요즘 자주 일어나고 있는 ‘헌법소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한 개인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시행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니 밝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간혹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법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 착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법 없어도 살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정말로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법이 없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성경에서는 법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법을 주셨을까요? 법은 태초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만들어진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지켜야 할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에 주어진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최초이며, 인류 최초의 법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을 먹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자세하게 대답을 하려고 하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간단하게 요약을 하게 되면, ‘자발성과 절제’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낙원으로 꾸며놓으신 동산에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눈치도 볼 것이 없이 무엇이든지 다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무한정의 자유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해도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언제든지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음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에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이 일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에게는 공통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서로 대화와 교제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차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피조물 중에 인간만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자유’라고 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들은 단 한 가지 동산의 선악과만은 따 먹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부여받은 자유를 마음껏 활용하며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따 먹지 못하도록 하셨을까요? 그리고 왜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이 둘은 서로 상충되는 요소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금령을 주지 않았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되면 완벽한 자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실은 자유라는 말이 없어지는 것과 동일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아무리 자유롭게 살아도 그것은 자유가 아닌 짐승이나 새들이나 물고기에게 주어진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지, 정, 의’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지, 정, 의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속성)과 공통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 지어진 자연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모든 지식 들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에는 희노애락(喜怒哀樂) 기쁨과 분냄과 슬픔과 즐기는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의지라고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데, 이 의지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처럼 의지라는 것을 주셨는데, 그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어떤 행동을 할 때에 이것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할 의지가 없는 의지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완전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짜 놓으신 프로그램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여지는 로봇과 같은 자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한 금령을 자발적인 의지로 지키도록 한 것입니다. 선악과 금지령이 없었다면 완전한 자유의지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의지 속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요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자유의지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절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절제는 바로 자유의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중에서 절제가 제일 마지막에 있는 것은 바로 9가지 열매의 완성이라고 하는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어진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은 매우 슬픈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자신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즉 가인을 죽이지 말라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법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벌을 7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게 된 것에는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자유의지를 절제하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전피조계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들을 흐리게 만들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어지게 만들며, 지식적인 면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져서 하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바로 분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적인 면에서는 분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어 살인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이 되어 세상이 점점 더 죄악으로 물들어 가고 인간은 자기 판단에 옳다고 생각되는 대로 행하게 되어 이런 것을 막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1. 십계명과 율법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를 지은 인간이지만,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한 백성을 택하셨는데, 그 백성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만은 다른 족속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만 경배하며, 다른 족속들이 하는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상실한 인간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생명의 법입니다. 즉 이 십계명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유로 인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하나님의 속성들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 십계명의 핵심은 “택한 백성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어진 헌법이 바로 십계명이므로, 십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비롯하여 사회법, 제사법, 도덕법과 같은 것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며, 모세 5경의 율법들입니다. 더 확장해서 율법은 구약을 가리키거나 혹은 성경 전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2. 양심의 법

  법과는 달리 사도 바울은 또 한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양심(良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 옳은 마음, 뛰어난 마음,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양심은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은 매우 제한된 자유 속에서 인간 본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기 다른 두 집단이 있습니다. 한 집단은 범죄 집단이며, 또 다른 집단은 법과 질서를 준중하며 나름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힘쓰는 집단입니다. 이 두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판단하는 것까지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 집단에서는 남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여, 잡히지 않기 위해서 서로 비밀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다 같이 나쁜 짓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어떤 계기가 있어서 그 집단에서 나오고자 합니다. 이럴 때에 범죄 집단에서는 그 사람을 가리켜 ‘배신자’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반대 집단 즉 사회 질서와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개과천선한 것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즉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가,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서 사람의 판단은 달라지고 그 추구하는 것이 다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집단이 사회와 동 떨어진 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아마도 그 집단에서는 일반적인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이 거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단의 질서나 유익을 위해서 그들만의 규칙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간에, 어떤 사회든지 간에 반드시 법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든지 아니면 산 속이나 섬에서 혼자 살지라도 그 자신이 판단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서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는 관계가 없이 스스로 판단하는 그 양심의 판단도 일종의 법, 개인법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12에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라고 하는 말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은 없지만, 그 대신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인간의 본성이 율법으로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율법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인간의 도덕 생활을 지배하는 양심 혹은 자연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자연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라도 자연의 본질 혹은 이치에 따라 생활하게 될 때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를 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성으로 율법의 행위를 행한다 해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지키는 것도 아니며, 본성의 법에도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롬 2:15) 양심 속에 무형의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아 창조된 모든 인간들에게 들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심판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다르지만, 심판의 결과는 동일한 것입니다.

 

3. 구원과 율법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인데,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로 ‘인간적인 의나 신적인 의에서 떠난 모든 행위 그 자체와 이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살전 2:16“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요일 5: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를 말합니다. 즉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전체적인 의미는 죄는 죄였지만, 전에는 규정이 없어 죄로 여기지 않던 것을, 율법을 통하여 죄로 알게 되고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기준에서 벗어난 여러 죄 가운데 아주 미세한 죄까지도 죄로 드러내어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 버립니다(19절). 즉 자신을 의롭다고 항변하는 뛰어난 말 재주를 틀어막아 더 이상 말하는 것을 멎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위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키려고 합니다. 자신은 죄인이 결코 아니며, 의인이라고 자기가 한 착한 일을 내세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 앞에서는 석가모니나 공자나 성현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나 그 누구라도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는 좀 더 나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죄인인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합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이렇게 사람들을 심판 아래로 사로잡아 오는 일입니다(23절).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절망 속에 빠지게 되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갈 3:24)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실 때에는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셨다고 하는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고 지칭할 때에는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사망의 법으로서의 율법’은 ‘행위의 관한 율법’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게 되는 유대인의 율법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치고 강요하던 613가지의 조항으로 된 행위만을 강조하는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신 주님께서는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행위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의 율법은 행위만을 강조한 사망의 법입니다. 율법의 조항을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사망의 멸망을 규정한 법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구원하시기 위하신 주신 법이 틀림이 없습니다.

 

  잠깐 생각을 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려고 애굽에서 건져내셨을까요? 이스라엘을 율법의 올무를 씌워 모두 죽이려고 택하시고 율법을 주셨을까요? 그 반대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도, 율법을 주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삶을 살게 하는 동시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법’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드려지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제사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씻어 지키지 못한 율법을 지킨 것으로 만들어 주는 법이 바로 제사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망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속죄 제물로 자신을 단번에 드림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를 없이 하셨으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 6:10; 히 7:27; 10:2; 10:10; 유 1:3) 할렐루야!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가정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게 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위하여 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성경 말씀을 을 더 잘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성도가 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죄를 씻을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단번에 속죄 제물이 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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