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찬양 하박국 3:1-19
하박국이란 이름은 ‘하박쿡’(הבקוק)에서 유래가 된 것으로 ‘껴안는 자’, ‘매어달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레미야 선지자(B. C. 627-580년 경)와 동시대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앗수르가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흥 제국 바벨론이 급부상하여 일대 격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는 애굽이 가장 강대한 나라였는데, 바벨론과의 갈그미스(Carchemish) 전쟁에서 패하여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대국까리 세력 다툼을 하고 있는 틈바구니에 있는 남유다에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정국이 계속 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앗수르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던 남유다의 제16대 요시야 왕이 앗수르를 돕기 위해 갈그미스로 향하고 있던 애굽 왕 바로느고의 진군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남유다는 애굽으로부터 큰 곤경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또 바벨론 제국은 남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발판으로서 팔레스틴 지역을 먼저 장악해야 하기 때문에 남유다를 필히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남유다를 공격하여 요시야가 죽은 뒤 꼭두각시로 세워졌던 제17대 왕 여호아하스를 폐하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 군대를 대파한 바벨론 제국은 귀족들을 대거 포로로 잡아갔는데(대하 36:5-8; 단 1:1) 이것이 제1차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런 때에 남유다에는 나라의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왕들은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압제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으며(왕하 23:35-37; 24:4; 렘 22:13-19),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들을 잡아 죽이는 일까지 행했습니다(렘 36:20-32). 이렇게 힘 있고 가진 자들의 횡포로 인하여 선량한 백성들은 실로 고달프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이런 열악한 현실 속에서 하박국과 같은 의로운 남은 자(남은 자 사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을 때에,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의 절개를 지닌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자들을 말합니다.)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러한 남은 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비록 불의한 세상이지만 더욱 믿음으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하여 본 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박국도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 궁금한 것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변 국가들은 모두 남유다보다 강대국이라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남유다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불의한 자들이 권세를 잡고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왜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놔 두시는 지를 하나님께 항변조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는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하는 첫 번째 질문과 하나님의 응답과 두 번째 질문이 기록되어 있고, 2장에는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신을 가진 하박국이 하나님을 위엄과 능력을 찬양하는 가운데,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앗수르, 바벨론의 강국에 둘러싸여 압제를 당하듯이, 우리나라도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에 싸여 있는 상황은 동일합니다. 남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오늘날 현실은 오직 귀신문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김영상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모두 장로입니다. 다른 종교계에서는 이것을 빌미로 기독교에 무슨 큰 혜택을 주는 것처럼 공격을 하여 불신자 대통령 때보다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고 받아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국립공원에 들어가려고 하면 그 곳에 있는 절에 돈을 내야만 합니다. 절을 문화재라고 하여 의무적으로 관람료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템플스테이라고 하여 절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도 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에는 이러한 지원이 없고, 오직 그들에게 지원되는 것이 잘못했다고 진정서나 내는 것 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내에서도 권세 다툼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할 것 없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 갈라져서 각기 총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각 교단의 연합체인 한기총, 기독교교회협의회, 장로교연합회, 기독교연합회 등에서 서로 총회장이 되려고 돈을 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데 어떻게 다른 종교를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이슬람교까지 침투하여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실은 하박국 선지자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은 한층 더 그 권력을 움켜쥐려 합니다. 정당과 정당, 청와대가 대립하고, 정부 부처끼리 대립하고, 국회와 사법부가 대립하고, 이제는 검찰과 경찰이 대립합니다. 이 모두 조금이라도 더 권력을 가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자들은 더욱 돈의 노예가 되어 한 푼이라도 더 긁어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의사와 약사가 싸우고 있습니다. 이런 싸움의 와중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선량한 국민들 그 중에서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국민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해가 가든지, 속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잇속을 챙기면 그만인 세상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박국과 같이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고 의인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상황 속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속히 공의의 심판을 행치 않으시고 침묵하고 계신가 하는 신앙적인 물음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이길 힘을 받을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신약 시대의 도마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을 해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예수님께서 8일 뒤에 제자들이 모였고 도마도 있는데 문은 닫혀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 그제야 비로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께 불만에 가득 찬 질문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고로 또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고 하박국의 신앙적 의혹을 풀어주셨습니다. 그 응답 중에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말씀하셨습니다. 후일 사도 바울이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롬 1:17).
이 말씀에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들을 보고 원망을 하고 투쟁을 한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성도들도 사람이기에 돈이 필요하고 권세도 필요하지 왜 필요가 없겠습니까? 그리고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한탄도 하고, 자책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마귀의 세상이기 때문에 결코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말씀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박국과 도마와 같이 하나님께 질문을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나님께서는 나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실까? 이런 개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여 가정의 문제, 학교의 문제,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찬양하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그렇습니다. 바로 말씀을 통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이 되느냐 하면, 성경 말씀이 내가 어렵거나 슬플 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을 때입니다. 또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성경 말씀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속 시원히 받을 수 있습니까? 만일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면 궁금증 의문점이 모두 사라질 수 있을까요?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귀에게 이미 붙들려 있는 상태에서 출생한 후에 주님을 영접했고, 또한 마귀의 그 강한 능력과 유혹을 이기기 어렵기 때문에, 10번을 응답을 받고 확신을 가졌다고 해도, 그 다음에 단 한 번 응답을 받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또 다른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 즉시 믿음은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한계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의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 이것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에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내 미래에 결코 해롭게 하지 않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바탕과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돈을 벌게 해 주셔도,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게 해 주셔도, 자식이 잘 되어 출세를 해도, 또 다른 시험이 오면 또 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주님을 영접하게 해 주신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감사하고 또 기뻐해야만 할 일입니다. 하박국이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셨고, 하박국은 그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하신다는 약속보다 더 귀한 응답은 없습니다.
즉 하박국은 물질적인 문제의 해결보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더욱 갈급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찬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런 기쁨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런 구원의 확신 속에서 물질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하박국이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에는 원망에 쌓인 마음으로 불만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그 크신 뜻을 깨닫고 하나님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장차 얻을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당하는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변치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이러한 자세는 오늘날 불의와 불법이 난무하고 착하고 바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며,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쇠락하는 모습이 비일비재한 현실의 모습, 나는 잘 되는 일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신앙도 별로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좋은 일이 생기고 잘 되는지 하나님께 원망을 갖기 쉬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점이 바로 쉬운 신앙입니다. 편한 신앙입니다. 물질적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교만한 신앙입니다.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 편한 대로 하고, 내가 많이 가져야 하고, 내가 높아져야 하고, 내 이름을 높여야 하는 신앙이 바로 현대 성도의 신앙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결과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는 신앙이 될 때에, 구원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죽는 날까지 아무런 소망이 없고 고통만을 당하며 불행하게 지내야 한다면 성도는 복 있는 자가 아니라 가장 불행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는 성도를 결코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능력의 손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돕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뻐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성도는 기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얼굴에 기쁨과 감사가 나타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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