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3가지 책망 마태복음 23:1-12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계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발하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다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종종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에 얽매어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율법주의, 형식주의, 외식, 교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의 첫 번째는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자리는 본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칠 때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서기관이라는 직분은 구약 에스라 선지자(에스라 7:1) 이후에 생겨난 직분으로 교육과 재판의 직무를 겸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의 최고 권위로 인식되었던 모세의 권위를 대행한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지도자서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했지만, 말만 앞세우고 오히려 율법을 백성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여러 정파(政派)가 있었습니다. 헤롯당,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세네파 등입니다. 헤롯당과 사두개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대체로 친 로마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 일반 민중들의 정서에 맞지 못했으며 비난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엣세네파는 이스라엘 민중의 종교적 정서를 잘 반영했지만, 백성들과 구별되어 광야 등 외진 곳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백성들에 대한 영향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엣세네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 요한’(마 3:1)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의 장, 단점을 취사선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정서와 지지를 폭넓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바리새파는 공인된 율법 선생으로서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순종보다는 선생으로서의 명예와 권력과 같은 기득권 향상과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그들에게는 거침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무조건 비난하시기 보다는 율법 선생인 저들의 가르치는 것은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전심을 다해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은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위선적인 행위를 지적하심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위는 단호하게 배격할 것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서생으로서 백성들에게 율법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요구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하는 율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10계명과 제사법, 생활 관련 규례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내용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율법 자체에 자신들이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한 각종 까다로운 규범과 예의법의 조항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조항들이 바로 613가지 율법이며, 백성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규제하고 구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지나갈 때 다른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라는 조항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런 규례와 전통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삼켜버린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율법의 원래적인 정신과 내용보다는 율법의 자구 해석에만 집착한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부칙 613조항은 백성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이 조항들을 지키는 것도 힘들지만, 지켜도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만행이 얼마나 지독한지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위선을 지나쳐 잔인한 행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나귀나 약대에게, 또는 종들에게 아주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심지어는 심을 가득 맨 짐승 위에 올라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상들과 자신들도 능히 메지 못할 멍에들을 백성에게 지웠으며(행 15:10; 갈 5:1) 자신들은 백성들을 도와주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백성들이 잘못하면 정죄하고 판단하기에 바빴던 파렴치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책망은 외식(外飾)이었습니다.
외식이라는 말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 이마나 왼쪽 팔에 붙였던 경문을 더 크게 만들었고, 또 겉옷의 네 귀에 장식으로 달았던 옷 술을 크게 하여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거짓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경문은 출13:16(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할지니라.)과 신 6: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에 근거하여 만든 것으로 왼팔 안쪽이나 이마에 부착하고 다녔는데, 이들은 더 경건하게 보이려는 의도에서 이 경문을 크게 만들어서 부착하였습니다.
‘옷 술’은 민15:38-41(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 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에 근거한 것으로 옷 단에 부착한 흰색과 청색실로 짠 장식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과 구별된 백성임을 확인시키고, 스스로 이 사실을 명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옷 술을 화려하고 크게 하여 자신들이 특별한 경건을 지닌 존재인 것처럼 과시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있어야 할 경건의 능력은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책망은 욕심과 교만입니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며 높임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에 앉아서 높임을 받기를 원하고 랍비라 불리기를 했습니다. 잔치의 상석에 앉는 것은 세속적인 영광을 얻는 것이며, 회당의 상좌에 앉는 것은 종교적인 명예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눅 14:1,7). 소위 엘리트 의식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섬김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섬김을 받으려하기 보다는 섬기려고 세상에 오셨고,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셨습니다(마 20:28).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공공장소인데, 이런 곳에서조차도 인사 받기를 즐겨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인정받기를 원했다는 뜻입니다.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 랍비는 ‘나의 큰 자’ 혹은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율법 선생을 지칭하는 랍비는 존경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명예를 높이기 위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랍비라고 연호하며 부르게 하는가 하면, 자신들에게 인사하면서 랍비라고 부르지 않는 자는 신적 위엄을 이스라엘로부터 떠나게 하는 자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백성들을 향하여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한 자세를 지니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지도자가 되는 것을 금한다거나 교회의 질서 상 마땅히 주어진 권위나 존경의 마음 자체를 금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개인적 명예욕과 공명심으로 인해 교회 내에 종교적 계급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 이 말씀은 교만한 자는 결국 패망할 것을(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가르쳐 주시는 교훈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 57:15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또한 겸손한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겸손한 자는 존귀하게 될 것이며,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잠 22:4).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교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던 앗수르의 왕 산헤립(대하 32:14,21)은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침공을 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으며,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망언을 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하나님을 모욕함으로 인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의 큰 용사와 대장과 장관들을 멸하셨습니다. 산헤립은 얼굴이 뜨뜻하여(창피하여) 철수를 하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가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며, 그의 신 “니스록”에게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느부갓네살(단 4:30,33)은 애굽 군대를 파하고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 유명한 왕입니다. 그가 한 날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렇게 교만한 말을 할 때에 그 즉시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이 말씀이 있음과 동시에 느부갓네살은 쫓겨나서 무려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고 몸이 하늘 이슬에 적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게 되었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헤롯 왕(헤롯 아그립바 1세)은 사도행전 12:21-23에서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 중에 최고는 사단입니다. 사단은 자신을 높이려다가 하늘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사 14:2-1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시나 자신을 지극히 낮추어 종의 형체를 취하사 섬김의 본을 보이심으로 지극히 높아지셨다고 하였습니다(빌 2:5-11).
예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남을 섬기는 삶을 살기보다는 섬기는 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낮아지는 사람이 높아진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이런 낮추는 삶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낮아져서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 기독교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우리들은 잘못이 없을까요? 물질을 탐하는 교회와 목사와 성도들, 큰 예배당을 건축하여 권세를 드높이려고 하는 모습들. 총회나 연합회에서 돈으로 회장이 되려고 하는 모습들. 이는 모두 육신의 정욕이요, 안목의 정욕이요, 이생의 자랑입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 부정하고 부패한 모습은 세상 사람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회를 정화시키는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목회자가 평신도나 할 것 없이 모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더 못합니다.
구원의 은혜가 식어지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있는 사람은 교만의 정점에 오르려고 기를 쓰고, 없는 자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보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몰려오는 정욕과 물욕과 명예와 권세의 파도를 바라보는 눈길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 비추어 내 자신을 다시 돌아보며 회개하는 가운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기뻐지고,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에 소망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합니다. 풍요로움 속에 즐기며 사는 것과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착각 속에서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괴로움과 슬픔 속에 방황해도 위로해 주며 인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주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바라던 것들을 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나의 생명이신 주님, 나의 구원이신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성도로서의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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