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우상숭배자의 행태

chukang 2011. 5. 28. 20:24

 

우상숭배자의 행태 역대하 25:14-24

 

  먼저 아마샤의 부왕 이야기부터 잠깐 하겠습니다. 요아스왕은 40년 동안을 치리한 후 죽었습니다. 죽음의 이유는 아람 군대의 침입으로 전쟁을 하다 큰 상처를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모반을 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아람 군대가 침입을 하고 신하들이 모반을 하였을까요? 요아스 왕은 상당히 정직하고 믿음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까지 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잘 다스린 왕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서 자신에게 조언을 해 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나,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바알의 지도자들과 방백들의 충동에 따라 악정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런 모습을 변질이 되었을까요? 첫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여호야다가 죽자 바알선지자들과 방백들은 요아스에게 우상을 섬길 것을 권했습니다. 요아스는 그들의 말을 듣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다시 돌아오게 하려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셔서 왕과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도록 외쳤지만, 백성들은 함께 모의를 하고 왕의 허락을 받아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거나(레위 24:16), 몰렉에게 자녀를 바치거나(레위 20:2), 자식이 아비에게 패역할 때에(신 21:20,21) 돌로 쳐서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런 죄를 짓지 않고 단지 우상숭배를 하는 요아스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돌로 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집행해야 할 위치에 있는 요아스는 도리어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 하나님의 선지자까지 죽이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스가랴가 죽으면서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왕과 스가랴 사이의 공의를 판단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징계의 뜻이 명백하게 나타나기를 요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 년 뒤에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와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침탈하였습니다. 많은 군사가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람 군대는 유다 전체와 상대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이때에 요아스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람군대는 요아스의 부상을 보고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신하들은 요아스 왕을 모반하여 침상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인 아마샤를 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요아스 왕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런 경향이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훌륭한 종들이 많이 있지만, 그 종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성도들은 기도원에 가서 울부짖기도 하고, 능력 있는 종들을 찾아다니면서 기도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담임 목사님이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는 종인 줄로 알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립이 된 후에 신앙의 눈으로 교회를 섬기는 방법, 목회자를 섬기는 방법을 깨닫고 난 후에 그렇게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참 좋지만,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를 바라보는 신앙은 매우 맹목적인 신앙이요, 믿음보다 교회 자체를 의지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임을 요아스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는 아마샤의 신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성경은 아마샤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2절을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치 초기에는 율법을 준행하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윤리적으로 바르게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샤가 율법을 상당히 잘 지켰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되, 그 자식들이나 가족들은 그대로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4절). 고대에는 반역할 때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친척들까지도 함께 처단하는 연좌제가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 연좌제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신 24:16). 따라서 아마샤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실하게 준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하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형제 사랑)이 없었습니다. 아마샤가 온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아닌 형식에 치우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샤는 어떤 모습으로 정치를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없는 자의 판단

  아마샤는 즉위한 후에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위험을 제거하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부왕 때에 아람에게 패한 수치도 씻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속국이었다가 배반한 에돔을 징벌하고자 했습니다. 에돔은 수시로 유다를 괴롭히기도 했고, 에돔은 유다가 홍해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면 에돔을 정벌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을 하기 위하여 인구 조사를 했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사의 수는 30만 명이었습니다. 이 숫자는 과거 아사 왕 때의 ‘58만’(대하 14:8), 여호사밧 왕 때의 ‘116만’(대하 17:14-19)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군사였습니다. 그래서 아마샤는 은 일백 달란트를 주고 북이스라엘에서 용병 십만 명을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이스라엘 군대와 에돔 정벌에 나선다면 그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상 14:6하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시편 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또한 이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2. 믿음이 없어도 순종하면

  아마샤가 이스라엘 용병을 의지하여 전쟁을 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말라고 권고할 때에 아마샤는 그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있기에 2절에서 ‘정직히 행하기는’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아마샤에게 가서 ‘힘써 싸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힘써 싸우지 않게 되면 적 앞에 엎드러질 것이라는 충고입니다. 세상 사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힘써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겠지’ 이런 모습은 결코 믿음의 성도가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입니다. 이는 학생이 공부하지 않고 좋은 점수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고 승진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은을 십만이나 주고 데려온 용병입니다.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려고 하니 돈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이왕 돈을 주고 사온 용병이니 이들을 데리고 전쟁에 나갈 것인가? 돌려보낼 것인가? 이는 하나님과 세상적 유익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가르치셨을까요?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마 16:24-2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내 생각, 내 판단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당장 눈앞에 이익에 눈을 멀지 말고,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샤가 돈으로 이스라엘 군사 십만 명을 얻었지만 전쟁에서 패하면 그 목숨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에 고민을 하였지만 결단을 하고 이스라엘 군사를 돌려보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는 매우 분을 내며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이 매우 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아마샤가 에돔을 정벌할 동안 유다 변방을 침입하여 3천명이나 죽이고 많은 물건을 노략질 해 가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과 물질을 의지하여 용병을 고용한 죄에 대한 대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에돔과의 전쟁에서는 승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샤는 ‘담력을 내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의 말에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2만 명이나 에돔 사람을 죽이고 승리하였습니다. 할렐루야!

 

3. 우상숭배로의 유혹

  전쟁에서 승리한 후의 아마샤의 모습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않았다.’고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샤는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패전국인 에돔에 있는 우상을 가져 왔습니다. 당시의 전쟁에서는 전쟁을 ‘신들의 전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하면 군대가 패한 것이 아니라 패전국이 섬기는 신이 패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승전국은 상대국 신에 대한 자국의 신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 상대편 신의 완전한 패배를 공인한다는 점에서 신상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자기들이 섬기는 신정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그 후에 에돔과의 전쟁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전리품으로 가져 온 에돔 신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우상들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들에게 경배하고 제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온전한 믿음’이 없으면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가서 전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귀신이 들린 한 여종이 있었는데, 그 여종은 점을 잘 쳐서 주인을 이롭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에 들어있던 귀신이 여러 날 동안 바울 일행을 쫓아다니면서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괴롭히자, 견디다 못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은 이익이 끊어지게 되자 ‘성을 소란하게 하고, 이상한 풍습을 전한다.’는 엉뚱한 죄를 씌워 고소를 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혔어도 찬송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옥중에 있는 모든 죄수들이 다 들었고,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고, 죄인들을 묶어 놓은 것들이 다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소리 질러 자신들이 있음을 알리고 자결을 막았습니다. 간수가 두려워하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 가로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하여 간수와 그 가족 친척들이 구원을 받은 역사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연약하게 되면 빠져들게 됩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불교로 빠져나가고, 천주교로 빠져나가고, 온갖 이단에 빠져드는 이유는 본인의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 성도가 반드시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보다 못한 귀신인데, 그런 귀신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샤가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역사합니다. 우상숭배하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직접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체험한 아마샤였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귀신의 유혹에 빠져 우상숭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표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표적을 아무리 보여주어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을 것을 아시는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아마샤를 사랑하셨습니다. 선지자를 다시 보내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 신을 어찌 섬기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고 도리어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하들과 상의하여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대면하자’고 하였습니다. 이는 전쟁을 하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왕은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으니라.”고 선전포고에 대한 답변을 했습니다. 가시나무는 저주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유다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백향목은 복을 받은 자 혹은 영광을 상징합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가시나무가 백향목에게 사돈을 맺자하는 것이 자기 분수를 모르는 일인 것처럼 유다가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레바논 짐승이 가시나무를 짓밟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요아스 군대가 유다의 아마샤 군대에게 승리할 것을 묘사합니다.

  에돔에게 승리한 아마샤는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 영향으로 인하여 교만해 졌습니다. 그 교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되어 에돔에 비해 훨씬 막강한 이스라엘을 정벌하고자 한 것입니다. 에돔을 정벌할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나, 북이스라엘을 정벌하려고 할 때에는 자신의 교만과 에돔의 우상을 의지한 것입니다.

 

4. 우상숭배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마샤의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대로 두고 보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어 충고하였으나 우상숭배에서 떠나지 않는 아마샤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교만으로 전쟁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요아스의 군대에 참패를 당하여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벽 일부가 파괴되었고, 성전의 보물들은 강탈당하고 인질들도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에브라임 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있는 문이며, ‘성 모퉁이의 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문입니다. 이 두 문 사이의 성벽이 헐린 것입니다.

  아마샤는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수모를 다 겪었습니다. 성경에는 언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후에 15년 동안 더 생존을 했습니다. 성경은 장수를 하나님의 주시는 복으로 말하지만, 아마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더 수치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후 남유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왕권도 미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통치를 반대하던 무리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죄악의 길로 나가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조차 편안하고 복된 죽음을 맞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샤의 비참한 최후는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떠난 자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방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벧전 5:5). 아마샤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순종으로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상에 빠진 후에는 선지자의 충고에 오히려 책망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마음이 표출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능력 이 모든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은 교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복을 받습니다. 이런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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