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1등 할 수 있어요? 디모데후서 3:14-17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첫 번째 질문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나요?”입니다. 그러나 사실 학부모가 첫 번째로 질문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나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건강한 몸으로 자라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성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공부를 잘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특별한 배경이 우리나라에는 있습니다. 고도의 급속한 경제성장입니다. 차곡차곡 쌓여 올라가면서 함께 정신문화적인 면도 함께 성장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고도의 경제성장은 물질만능주의와 함께 결과 제일주의라고 하는 괴물을 탄생시켰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과정이 잘못되었어도 괜찮다고 하는 주의입니다. 이러한 결과제일주의는 정치권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거에 편법이 등장하고 불법이 횡행하여도 당선만 되면 된다는 것이나, 돈을 버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일단 벌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들이 모두 결과제일주의입니다.
학교에서도 1등만 하고 100점만 맞으면 최고가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식만은 선생님 눈에 잘 들게 할까? 어떻게 하면 반장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식 작품이 뽑히게 할 수 있을까? 온갖 악기, 미술, 선행학습 시켜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대회에 나가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상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대신 해주고 어머니가 대신해 주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녀들은 편법에 익숙해지고 편협한 성격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서 교육에 관한 것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그토록 강조하셨을까요? 이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신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며, 세상의 신들을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고 세상적인 방법들을 멀리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율법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잠언은 교육과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 1:2-6) 잠언의 기록 목적은 바로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행함과, 슬기로움과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최고가 되기 위해서 배우고 가르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만의 생활이 아닌 나, 너,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세상살이에 대하여 교훈을 하는 것이 바로 잠언인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말고, 세상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14) 이 말에는 스승에 가르쳐 준 것이 확실한 진리라고 하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 자신의 신앙관, 세계관, 생활관 등을 정립하였을 때에, 자신을 영향을 준 스승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훌륭한 재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스승은 학생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쳐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스승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배운 모든 학생이 올바르게 성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책임은 본인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성장한 후에 사리분별을 올바로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 옛날 나를 가르치신 그 선생님 말씀이 옳았구나!” 깨닫게 될 것입니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뉘게서”는 복수형입니다. 즉 디모데의 선생님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율법에 대한 거의 모든 내용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다.(딤전 1:2) 그러나 그 이전에 외조모와 어머니에게서 성경 말씀을 배웠습니다(딤후 1:5). 그분들이 휼륭한 스승이었음을 바울도 인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한 번 배운 성경의 내용이 정통임을 확인시켜줍니다. 그 이유는 디모데로 하여금 정통신앙을 수호해야만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17)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내용입니다. 누구도 온전할 수 없지만 온전해지도록 성장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온전하게 닮기를 갈망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힘써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어져 가고’, ‘닮아가고’, ‘온전케 되어가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온전하지 못할 텐데 그렇게 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은 패배주의입니다. 또 타협주의입니다.
성경이 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였을까요? 세상에는 많은 학문이 있습니다. 같은 학문이라도 관점에 따라서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세상에는 같이 가야 할 것이 있고, 멀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디모데에게도 가지 말아야 할 길로 유혹하는 무리들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하여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찾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지 못하게 되면 저들에게 유혹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우상에게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넓으며, 편하고, 즐겁고,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벼랑이며 죽음의 종착역입니다. 그 죽음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세상은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고 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에 독불장군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수마귀는 ‘초교파’를 앞세우고 믿음의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렇게 써 있지 않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다른 종교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없어도 됩니다. 그러면 불신자에게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타협주의, 혼합주의, 편리주의는 마귀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과 불신자들에게 가장 편리하게 써먹을 수 있는 수단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편한대로,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마귀의 첫째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리쳐야 합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유혹을 당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새로운 해석이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직업을 가질 때에 많은 고려와 선택이 필요하겠지만, 현대인들은 3D라는 것을 회피합니다. 요즘은 3D라고 말하면 “3차원 입체 영상을 떠올리게 되는데(Three Dimensions, Three Dimensional)” 1980년대 경제성장 이후 사람들은 “더럽고 dirty, 힘들고 difficult, 위험한 dangerous”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상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3D입니다. 그리고 편한 신앙생활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 성도들의 첫 번째 특징이요, 두 번째 특징은 결과만 보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결과로 하나님의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응답만 필요한 신앙생활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상적인 경향이 신앙에 침투하였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정통신앙에서 보면 분명한 이단사술인 안수하면 뒤로 넘어지는 집회, 점쟁이처럼 예언해 주고, 눈에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는 거짓 기적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내가 배운 것만이 옳다는 주장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서울대 임지순 (60·물리천문학부)이라고 하는 석좌교수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고체물리학자라고 합니다. 이달 초 학술단체 중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과학학술원(NAS)의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국내 물리학자로는 처음이요, 한국 과학자 중 세 번째라고 합니다. ‘경기고 수석 졸업’ ‘예비고사 전국 수석’ ‘서울대 수석 입학’(물리학과 70학번) 등 수석이 아니면 하지 않은 수재입니다.
한 기자가 과학적 사고의 습관과, 소통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교육제도에서 문과·이과 구분을 철폐하고, 단기적으로는 교양교육을 강조해야 해요. 고등학교에서 문과·이과를 나누다 보니 ‘상대 쪽 공부는 골치 아프고 도움도 안 되고 재미도 없다’ 이런 선입견을 갖게 만들어요. 우리 대학에서도 보면 이과 학생들은 문과계열의 수업을 ‘억지로 듣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기한테 도움은 안 되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 교양수업을 어쩔 수 없이 듣는다는 식이죠.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당장 눈앞의 문제 하나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로 판단들을 해요.”
대학교 다닐 때에 공부를 좀 안하긴 했지만, 교양 과목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문과건 이과건 상대 쪽 공부도 해보면 분명히 재미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안 해서 그렇지. 그런 공부는 은연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생 동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안철수 박사 같은 분을 보세요. 이과 전공을 했지만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하죠.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저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굉장히 훌륭하다, 폭이 넓은 사람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선 영역 간의 경계를 너무 나누려 해서 안 될 것 같아요.”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에 편협하지 않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교양서적을 많이 읽어서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끼리도 일과시간 외에 많은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그 대화 속에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던 것도 깨닫게 되고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박사지만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과학이 한 단계, 한 단계 발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온전한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 많은 교양과 다른 사람의 지식과 경험을 내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결코 1등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내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의 입장에서 다른 학문에 대한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각 성도 스스로가 결정해도 됩니다. 성도의 신앙이 편협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골고루 읽어야 합니다. 나는 재미있는 창세기가 좋다, 나는 시적인 시편이 좋다, 나는 교훈적인 잠언이 좋다. 나는 예수님 말씀이 많이 나오는 복음서가 좋다, 나는 바울의 신학적인 면이 좋다. 나는 기적이 나타나는 사도행전이 좋다. 성도마다 취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은 편식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불균형을 가져오게 됩니다. 성경 66권은 각기 다른 책이지만,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연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이며, 이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편협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오직 율법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줄로 잘못 배웠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은혜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돌에 맞아 죽어갈 때에도 그는 그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뒤에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도만이 구원을 준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디모데에게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3번이나 전도여행을 했고, 끝내는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를 하면서 1등 목회를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큰 교회를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오직 복음, 주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된 성경은 성도들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을 하는 정말 귀중하고 복된 책입니다. 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성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경 말씀만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세상 풍조에 이끌려 세상을 바라보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에만 관심을 두고 미래에 대해서는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안주하고 이 땅에서의 가치만을 추구합니다. 이 땅의 모든 부귀영화는 죽음과 함께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아름다운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소망을 잃지 않는 방법이 바로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삶입니다. 말씀의 방주에 타고 있는 성도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악한 풍조와 이단 사설이라도 침범하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마귀의 속삭임으로부터 옛적부터 지켜오던 정통신앙을 수호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1등을 뛰어넘어 온전함을 향하여 달려가는 십자가의 군사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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