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란? 마태복음 22:15-22
교회에서 부르는 호칭 중에서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호칭은 성인으로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 직분을 받지 못한 남자에게 붙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선생님, 교수님도 있지만, 무직자나 일반 회사원도 있습니다. 이분들이 교회에 와서 ‘선생님’하고 교회의 직분자들이나 연세가 많은 분들이 부르면 쑥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합니다. 대접을 잘 받는 느낌이나, 자신의 높여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사실은 누구든지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한문으로도 보면 선생(先生)이라는 뜻은 먼저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먼저 태어나서, 거의 모든 면에서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속 뜻도 들어 있기는 합니다. 먼저 태어나서 먼저 배운 사람이 나중에 태어난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서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식적인 면뿐만이 아닌 도덕적인 면에서도 앞선 사람이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선생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지식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고, 국민들 대다수가 연일 보도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지식을 접하면서 선생님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7,8)고 하셨습니다. 이는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또한 선생님은 지도자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지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은 우리 모든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전인격적인 존재로서가 아닌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특히 ‘전교조’는 선생님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노동자가 바로 ‘전교조’가 아니고 무었입니까? 물론 선생님들이 전교조를 만든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해도 갑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나 가치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고귀한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을 버리고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버린 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고 보지는 않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당시 유대나라에도 선생님이 참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선생님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로 삼게 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율법학자들이 생겨나게 되어 이들이 오히려 이스라엘에서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계급은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는 계명을 벗어나 ‘하지 말아야 할 것’ 613가지 조항을 만들어 이 조항을 지켜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잘못된 지식을 전달하는 거짓 선생님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지식이 우리들에게 주는 폐해는 참 많이 있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천국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주는 폐해 중에 무서운 것은 소망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선생님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소망을 함께 심어주어야 합니다. 바른 나무로 자라나도록 좋은 품성을 갖도록 지도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이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바로 스승의 날입니다. 스승의 날에는 떠오르는 것은 ‘촌지’ 혹은 ‘선물’입니다. 학생들 학부모들은 선생님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학교에서는 조교가 문자를 통하여 일인당 얼마씩 정해서 돈을 걷고 있다고 합니다. 대학원에서는 액수가 더 많이 올라가고 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은 더 커진다고 합니다.
선생님에게 선물을 해 주는 것이 나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믿고 따르고 존경할 만한 선생님에게 내 성의를 표시하는 것이 어떻게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선물이 받는 선생님이나 하는 제자에게 하나의 형식적인 요식행위가 되거나, 선생님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 된다면 이미 선물이 아니며, 진정한 선생님과 제자의 사이에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초등학교선생님 중에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공부를 좀 하는 아이, 집이 좀 잘사는 듯 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촌지를 받아내기 위해서 그 아이를 괴롭히는 일은 물론이며, 부모까지 호출을 수시로 한다고 합니다. 이유 없는 괴롭힘, 그 아이만 꼭 집어서 불이익을 주는 행위 등에 대하여 15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어머니들과 대화중에 알게 된 사실들입니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유행어 중 최고는 ‘사장님’입니다. 작업복을 입고 있어도, 사장님, 신사복에 넥타이를 매어도 사장님. 운동복을 입어도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환심을 사려고 사장님으로 높여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유행은 ‘존칭어’ 사용입니다. 존칭어 사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과도하게 존칭어를 사용하다보니까 존칭어가 ‘사물’에까지 사용이 됩니다.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핸드폰은 사물입니다.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사물에는 존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식인데, 이 상식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또 사회가 자기중심주위로 나가면서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학교교사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것은 존경심의 표현이었다면, 의사에게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존경심의 표시였습니다. 간호사의 경우에는 수간호사에게만 간호사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모든 간호사들이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간병인에게는 여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대통령 영부인에게도 ‘여사’라고 호칭하는데 이러한 표현방식은 극단적인 상업주의와 이기주의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결코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큰 걸림돌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으로 그들의 입지가 약해지게 되었고, 선생(랍비)이라고 불리던 호칭에 있어서도 불편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옭아매어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획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헤롯 당원까지 포섭하여 함께 예수님께로 보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세력입니다. 사상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집단입니다. 특히 세금 문제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헤롯 당원들은 헤롯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모인 친 로마 계열의 사람들이므로 서로 대립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동의 적인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음해하려는 데는 서로 연합 전선을 펼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면,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반민족주의로 매도함과 아울러 유일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로 정죄하고, 반대로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예수님이 반대하면, 이번에는 헤롯 당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에 대해 반역을 선동하는 자로 고발하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바리새파 쪽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을 하는데 처음에는 얼마나 예수님을 높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거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이렇게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띄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래 목적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렇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선생님 중의 선생님이십니다. 저들의 그런 흉악한 간계를 모를 리가 없으셨습니다.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셋돈은 세를 내는 돈으로 로마 화폐인데, 로마 정부는 세금을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로마 화폐로 바칠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서 이 로마 화폐는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로마 화폐를 구하기는 매우 쉬웠습니다. 데나리온은 은로 주조된 로마 화폐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습니다. 이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는 로뫄 황제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습니다. 동전의 앞면에는 “티카이사르디비 아복파복스트브스(TI CAESARDIVI AVGFAVGSTVS: 존엄한 신의 아들 디베디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폰티프 막심“(PONTIF MAXIM: 최고의 제사장)이라는 내용이 각각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로마의 화폐가 유대인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혐오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전에 새겨진 내용을 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것이냐?“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을 바리새인들이 하는데 어떤 특별한 분석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의 주인을 대답하면 그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바라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머뭇거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대답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자들이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이 대답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기응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대답은 탁월한 신적인 지혜와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님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겨서 그런 간교한 질문을 만들어 내고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롬 13:1-7).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거스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벧전 2:13-17). 즉 국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곧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하나를 이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골 3:23). 물론 국가에 대한 의무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국가가 하나님께서 국가를 제정하실 때의 본래 목적, 곧 세상의 질서를 세워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갈 때를 말하는 것이요, 국가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위배될 때는 의무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을 핑계로 군복무를 회피라는 자들의 행태는 결코 정당화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둘째, 국가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어떤 개인의 숭배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셋째 성도들은 국가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되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것을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않은 결과에 너무나 깜짝 놀란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 완벽하고 그들의 부패한 심령을 찌르는 것이어서 감히 어떠한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님을 살해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다 꾸민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 앞에서는 더 이상 일언반구도 할 대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구나 지켜보던 군중들 역시 대세의 흐름을 감지했기에 꼬리를 감추고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가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라고 자신들의 스승에게 보고했는지도 모르며,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스승들은 권위 논쟁에서의 패배(마 21:23-43) 이후 또 다시 쓰라린 참패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참된 선생님이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르게 깨닫도록 가르쳐줄 수 있는 바로 참된 선생님들이 이 땅에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기의 이익과 관련되거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는 거짓 선생들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학생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남고자 하는 선생님들이 계실 줄로 믿습니다.
선생님은 지도자 중의 지도자입니다. 어릴 적에 배운 진리의 학문이 그 아이의 평생을 주도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나서 국가의 장래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희망이 있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평화와 소망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오직 한 분이신 참된 선생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기독교 교육과 문화가 자리를 잡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책임은 성도인 바로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는 성도, 주님을 따라가는 사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나라와 민족이 될 수 있도록 더욱 함께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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