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소탐대실

chukang 2011. 3. 20. 00:28

소탐대실(小貪大失) 마가복음 9:43-50

 

  손과 발과 눈은 사람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물론 인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손은 모든 작업을 하는데 필수적이며, 발은 이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눈은 사물을 보고 판단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체의 주요한 기관인 손과 발과 눈을 통하여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손과 발을 잘라내고 눈을 빼어 버린다는 것은 그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과정은 간단하게 살펴보면, 눈으로 보고 발로 가서 손으로 죄를 짓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눈으로 선악과를 바라보았고, 바라보았더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자신의 발로 선악과나무로 걸어갔고,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서 먹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요9:41)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실 만큼 모든 죄는 눈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발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한다면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발로 가기는 했지만 손이 없으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눈과 발과 손은 죄를 지게 하는 3대 요소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모든 선한 일을 하는데 이 세 가지는 필수적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귀한 지체들을 가지고 선을 행할 것인가 아니면 죄를 지을 것인가를 잘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눈과 손과 발이 없이 천국에 가겠습니까? 아니면 다 가지고 지옥에 가겠습니까? 참고로 말씀드리면 천국은 육신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는 않지만 천국에 가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이 보고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실 그 날에 우리의 육체가 부활하게 되는데, 그 때는 사람이 그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았든지 모두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에 가는 것도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지옥의 불 못에서 육체가 있는 모든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어차피 가지고 가지 못할 눈과 발과 손 때문에 지옥에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천국과 지옥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치 우리가 꿈을 꾸면,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는 하지만, 좋은 꿈이나 나쁜 꿈을 꾸면 온 몸까지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고 대비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그 아름답고 영원한 천국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은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진(秦)나라 혜왕이 촉(蜀)나라를 멸망시킨 계략에서 유래합니다. 혜왕은 촉나라 제후가 욕심이 많은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촉나라를 멸망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먼저 돌로 소 다섯 마리를 만든 후 꽁무니 쪽에 금을 뿌려 놓고는 ‘금 똥을 누는 소’라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 소문은 이내 촉나라에까지 퍼졌고 이를 들은 촉나라 제후는 그 소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촉나라의 상황을 파악한 혜왕은 화친의 예물로 그 소들을 보내겠다고 촉나라에 기별을 하였습니다.

  진나라 사신으로부터 올라온 공물가운데 금 똥을 누는 소가 있음을 확인한 촉나라 제후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성 입구까지 나와 사신을 맞았습니다. 진나라의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신하들의 간언은 무시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 명의 역사를 보내 금 똥을 누는 소를 수도인 성도로 운반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나라의 혜왕은 촉나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을 알게 되었고, 장의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촉나라의 수도를 치라 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촉나라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작은 재물 때문에 나라까지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일본 해역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와 원전의 파괴로 한 주간 내내 전 세계가 뉴스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은 1950년대에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 사에서 개발한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그 형태의 원전에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쿠시마 원전에서 이상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즉시 기술자를 파견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의 기술자들이 오게 되면 원전 가동을 완전히 중단시켜야 한다는 결론을 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자로 건설에 막대한 금액이 들어갔고, 원전을 중단시키면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면 팔수가 없기 때문에 수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하여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일본은 원전 파괴로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고 폭발까지 될 위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고 수십만 명이 대피하는 긴급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소탐대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소탐대실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에만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작은 쾌락과 즐거움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은 놀고 즐기는 것이 좋지만, 항상 그 다음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게 됩니다. 내일의 생활과 학업을 위하여 오늘의 즐거움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신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죄를 깨닫기를 바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갈 텐데, 유한한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 이 땅에 영원토록 살줄로 착각을 하고, 헛된 거짓 종교에 속아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면 그것을 자랑하며 교만하게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당랑규선’이라고 하는 고사성어가 딱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당랑규선(螳螂窺蟬)이란 춘추시대 말기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여러 인재를 중용하고 법을 바로세우며 오나라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강성한 국력을 발판삼아 월(越)나라 공략에 성공하는 등 강국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성공의 달콤함은 곧 그를 자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날카롭던 판단력은 갈수록 흐려져 갔고 겸손하던 오만함만 남았습니다. 결국 부차는 간신 백비(白砒)의 중상모략에 넘어가 충신이었던 재상 오자서(伍子胥)를 죽이고, 월나라에서 보내 온 미인 서시(西施)와의 향락생활에 빠져 나랏일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 재기를 노린다는 것을 전해들은 많은 신하들이 왕에게 국정을 돌볼 것을 간청했지만 그 누구도 쾌락에 빠진 왕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태자 우(友)가 흥건히 젖은 옷을 입고 활을 든 채 급하게 부차를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왕이 “너는 아침부터 무엇을 그리 허둥대느냐?”고 묻자 태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침에 정원에 나갔더니 높은 나뭇가지위에서 매미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보니 사마귀 한 마리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더군요. 그 때 홀연 참새가 날아와서 그 사마귀를 먹으려고 노리는데, 사마귀는 통 기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만 활 쏘는 데 정신이 팔려 앞에 있던 웅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옷을 이렇게 적신 것입니다. 천하에는 이런 예가 부지기수로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나라는 까닭 없이 노나라를 쳐서 그 땅을 손에 넣고 기뻐했지만, 우리 오나라로부터 배후를 공격받고 대패했듯이 말입니다.”

부차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는 오자서가 못 다한 잔소리를 할 셈이냐? 이제 그런 소리는 신물이 난다.” 눈앞의 쾌락에 눈이 멀어 충신의 말을 무시한 부차는 결국 월나라의 침입을 받아 패한 후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한(前漢)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設苑)』정간(正諫)에 나오는 일화로 ‘당랑규선(螳螂窺蟬)’이라는 사자성어는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본다.’는 말로,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뒤따를 걱정거리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도 모른 채 교회를 상대로, 혹은 성도를 상대로 핍박하거나 이단 사설을 전파하거나 또는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천국에 갈수도 없습니다.

  이들이 갈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구더기는 내적 고통을 상징하고, 꺼지지 않는 불은 외적인 고통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모든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끊임없는 형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불은 연료를 태우고 꺼집니다. 구더기는 죽은 시체를 먹다가 죽습니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것은 지옥이라는 곳이 “끊임없는 고통이요, 아울러서 지옥이 죽지 않는 곳”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성도가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뜻합니다. 불이나 소금은 성경의 여러 경우에서처럼 다 같이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함으로 정결하게 하고(왕하 2:19-22), 불은 이미 부패한 것을 태움으로 정결하게 합니다. 불은 심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부패한 것을 태우고 은과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은 (말 3:2,3) 역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인과 악인, 성도와 불신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연단과 격렬한 시험과 환난으로 이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시험과 환난은 악인에게서 선인을, 불신자들에게서 성도들을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성도들의 마음속과 삶 속에서 악한 요소들을 정결하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곧 있게 될 예수님의 죽음과 또한 초대 교회가 당하게 될 고난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 이는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주님의 충고인 것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결론 부분입니다. 소금의 기본적인 기능은 맛을 내는 것과 더불어 부패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좋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13에서 쓸모없어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팔레스탄인 지역에서 소금은 사해 근방의 암석이나 늪지대, 개펄 등지에서 나오는 석고 등의 이물질과 섞여 맛을 잃거나 알카리성의 맛을 가지고 있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겔 47:11 참고). 이로 볼 때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으면 버려져 밟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 가운데서 훈련을 받았으나 후에 성경의 교훈을 반대하여 그 안에서 굳어진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의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역할, 곧 생명력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책무를 다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에게는 “너희들이 예전처럼 서로 자리 다툼이나 하고 높아지려고 하여 헛된 것에 대해 논쟁을 하기보다는 지혜와 순결과 겸손과 세상에 대한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훗날 큰 장애가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변화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전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종교를 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 십자가의 길을 세상에서 실천하기를 원하셨던 줄로 믿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소탐대실이었습니다. 가장 사랑을 받는다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서로 높아지려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청탁까지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 자신들만이 소외될까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소탐대실의 대명사로 눈앞의 은 30에 마음을 빼앗기고 예수님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니 11 제자들은 당장 눈앞에 닥치는 환난이 두려워서 다 도망하고, 베드로는 몰래 따라가서 살피다가 계집종이 하는 말까지 두려워하고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로서 소금치듯”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의 혀같이 갈라지며 임하시는 성령은 그 곳에 모인 모든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신앙, 시기심, 권세욕 등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태워 버리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반쪽 믿음이라도 훌륭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타락에 빠져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이로운 말, 자신을 기쁘게 하는 말, 자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달콤한 말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의 길은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빌 1:29). 그러나 오늘날의 성도와 교회는 고난을 피해가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게 주신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 않고 오직 복 받기를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일만 있어야 그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지 않기 때문에 누가 와서 속삭이면 그 꾀임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단사설에 쉽게 속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가지만, 교회와 성도가 세상과 같이 유행을 따라가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상 중심이 아니며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생활이 바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때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때로는 한적한 곳에서 가르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재물에 분주한 사람은 재물에 대한 낙망을 경험하게 하고, 명예에 눈 먼 사람에게는 세상 멍예의 초라함을 경험하게 함고, 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힘으로 망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고, 자신이나 세상 사람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자신의 무능함과 세상 사람의 무능함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소금이되 짠 맛을 잃지 않는 그런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소금과 같은 존재로서의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제자로서의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욥과 같이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라고 하는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줄 알고 은혜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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