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시편 11:1-7)
다윗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과 후대의 성도들을 위해서 쓴 지혜시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진 자로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영원히 실현될 다윗언약(Davidic Covenant; 삼하 7:8-16)을 받은 장본인인 다윗이 정치적 통치자의 차원을 넘어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의 입장에서 백성들을 계도하기 위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생을 두고 거듭된 위기 곧 인본주의적 탐욕에서 신본주의적 정통성을 가진 자신의 왕권과 영광을 탈취하려고 하는 자들로 인해 야기된 숱한 위기에 처해서도 자신은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분이 절대 초원자로서 전 우주와 역사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이신 사실에 근거하여 오직 여호와께 의뢰하며, 그 심령의 평안을 잃지 않고 있음을 간증하여 모든 성도들에게도 오직 여호와만을 의뢰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불과 7절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내용 속에는 두 가지의 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친구들과 세상 사람들이 제시하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적인 소신을 따라 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법과 정의가 통하지 않고 다만 권력을 쥔 자와 그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이 판을 치는 ‘터가 무너진’ 혼란한 세상 속에서 과연 나는 어쩐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른 삶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눈앞에 당장 날아올 것과 같이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사냥꾼의 활과 화살의 위협 앞에 있는 연약한 새와 같은 절망적인 순간에 성도는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본 후에 그에 따른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피하다’(하사:חסה)는 단어는 ‘도피하다’는 의미이지만 ‘신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16:1; 36:7). 시인은 위기 중에 오직 여호와만을 의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위기 중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를 사냥꾼에게 쫓기는 연약한 새에 비유하여 강한 대적에 비하여 무력한 자신의 처지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친구들은 네 힘만으로는 중과부적의 대적과 맞서 싸울 수 없으니 그들을 피하여 숨으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나약한 충고를 하지만, 시인은 가장 확실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 같은 나약한 충고를 할 수 있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여호와만 믿고 물매와 작은 돌멩이 몇 알만 가지고 나아갔지만 승리하였음을 (삼상 17:45) 기억하며, 그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함께 하실 줄을 믿고 있습니다.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활, 살은 악인들의 음모와 공격 행위를 비유한 것입니다. 악인이 활을 당겨 곧바로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하여 겨냥하고 있듯이, 자신이 처한 절대적 위기의 급박한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바른 자는 밝은 곳에 거하지만, 악인은 항상 어두운 그늘에 숨어 있습니다. 의인은 떳떳하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 놓지만, 악인은 스스로도 자신의 죄악을 알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처럼 은밀하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몰래 악한 꾀를 써서 의인을 괴롭히는 악인의 모습입니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터’(솨트: שת)는 ‘규율, 기강’이란 뜻으로 국가의 존재 및 번영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국가의 기초적인 질서와 법률을 뜻합니다. 여기에서는 친구들이 다윗의 피신을 권유하면서 그 이유로 내세운 말입니다. 그들은 기강이 없고 법과 질서가 없는, 악인이 횡행하는 사회 속에서 의인은 다만 피하여 숨어 살 수밖에 없다는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적인 생각으로 다윗에게 피신을 권유한 것입니다.
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다윗은 친구들의 잘못된 권유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를 표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하늘의 보좌’는 동일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속하여 있는 인생들과는 구별되는 절대 초월자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생들과 구별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인간사의 상황이라도 주의 깊게 집중하여 꿰뚫어 보고 계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외면적 행동은 물론 그 내면의 속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판단이라면 의인이 죄인으로 또는 죄인이 의인으로 그릇 판단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오류가 없습니다. 이는 결국 사악한 자들과 약한 자를 무고히 괴롭히며 즐거워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멸망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믿고 기대하였으니 역경 중에서도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내려친다’(마타르: םתר)는 말은 '비를 내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진노의 그물을 내리실 때 비를 퍼붓듯이 속히 행사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는 하나님의 심판의 격렬함과 준엄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불과 유황의 심판(계 14:10;19:20; 20:10; 21:8)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상기시켜 줍니다(창 19:23-28).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잔‘은 모든 인간이 다 마실 수밖에 없는 잔, 즉 인간의 운명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악인은 종국에 하나님 앞에서 쌓은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나,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기를 힘쓰는 자들은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보상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악인에게 임할 심판과 대조되는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자, 즉 불의를 멀리하는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인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을 받게 되며 죽어서도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거하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응을 믿었기에 위기 중에 산으로 피하라고 하는 친구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죽든지 살든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본 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요, 바른 신앙일까요? 눈앞에 당장 날아올 것 같은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사냥꾼의 활과 화살의 위협 앞에 선 연약한 새와 같은 절망적인 순간에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현실에서 도피하고 절망으로 탄식하는 현실도피주의자와 허무주의자들이 있지만, 다윗처럼 적극적으로, 여호와 절대 신앙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난관을 헤어나가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흉악한 악인들보다 몇 천배 몇 만배,... 숫자로는 표시할 수 없는 능력의 하나님, 반드시 공의로 악인들을 심판하실 하나님, 그분에 대한 절대 신앙만이 능히 현실의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고통과 위협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 온 성도들에게도 “여러분 가운데 일생동안 한 번의 시련도 겪지 않고 살아 온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무도 “네”라고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시련이 나에게, 내 옆 사람에, 또 내가 아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시련을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시련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련을 잘 이겨내었기 때문에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13,14을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의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한 길은 넓고 큰 길입니다. 또 다른 한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고 큰 길은 우선 가기에는 편해 보이지만, 그 끝은 낭떠러지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큰 길만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며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의 등 뒤에 그들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을 한 가득씩 지고 힘들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눈앞에 낭떠러지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오기 때문에 그대로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이 매우 힘들게 보입니다. 왜 저렇게 힘든 길을 가는 것일까? 하고 의문을 가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들의 길이 오히려 편한 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마태복음 11:28-30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겉보기에는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참 힘들게 보이지만 사실은 나는 짐을 주님께 맡기고 맨 몸으로 편하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내가 힘들어 지칠 것 같으면 주님께서 손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68:19을 보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날마다 내가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대신 지고 가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좀 더 편하게 좀 더 쉽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참을 수 없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왜 내게만 이런 고통이 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 마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편한 길을 택하라고 속삭입니다. 사람들은 이 같은 마귀의 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제일 먼저 내가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가? 이 돈으로 해결 할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해 보게 됩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찾아보게 됩니다. 재산과 권력과 인맥(지연, 학연)이 내 어려움을 해결해 줄 것으로 여기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산으로 피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의 역사 철학자 쟐스 비오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사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할 무렵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역사를 연구하면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네 가지를 배웠소! 첫째,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멸망시키고자 할 때에는 그로 하여금 권력에 미치도록 내버려 주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아가지만 마침내 모두를 곱게 빻는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꿀벌이 꽃에서 꿀을 딸 때에는 그 꽃을 수정시켜 주었습니다. 넷째, 캄캄한 밤중에야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탐하게 합니다. 이런 길을 택하게 될 때에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마치 연자 맷돌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길은 비록 느린 것 같습니다. 매우 힘든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모든 곡식을 곱게 빻을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벌과 나비 심지어 날벌레들이 꽃에 와서 그냥 꿀만 빨아먹고 가는 것 같지만 그 대가로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에게 오는 고난과 역경은 거저 오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어떤 우리나라 시인은 “꽃의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만드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밤이 와야 별을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이 와야만 밝고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길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되는대로 막 살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자포자기 하는 삶이야말로 패배주의입니다. 마귀는 속삭입니다. “너는 어차피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거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팔자는 고칠 수가 없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수고와 겪어야 할 고통을 버리게 하여 허랑방탕한 생활 속에 망가진 인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에 넘어가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지고, 패배주의에 빠지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신의 신세만을 한탄하게 되지만, 소망을 붙잡는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그래 나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힘도 없을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하고 말거야!”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 개발과 도전정신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좁은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런 자세로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로 꼽은 것은 "날마다 반성하는 삶"이었습니다.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자신의 시간들을 후회 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듭니다. 둘째는 "용기 있는 삶 "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인지 깨닫게 된 것이지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이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셋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입니다. 자신들의 삶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없어지지 않을 것들, 참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것들의 대답에서 인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외치고 있는, 여호와께로 피하라, 여호와만을 끝까지 믿고 따르라, 여호와의 하신 모든 일에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든지 아니면 긴 인생을 살든지 공통된 점은 반드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며, 이럴 때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바른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비록 더딜지라도 온전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원하고 영광의 아름다운 열매를 반드시 맺게 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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