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성령의 법 로마서 8:1-17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은 우리가 매우 흔하게 사용합니다. 돌 하나를 던져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번 들어서 두 개를 얻는다는 뜻입니다. 좀 더 세상적인 표현으로는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이런 말도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들어보면 유사한 표현으로 ‘금상첨화(錦上添花)’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고 값비싼 비단 위에 꽃을 더하여 더욱 아름답다는 표현입니다. 두 가지가 겹치는 나쁜 표현도 있습니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이 말은 점점 아름다운 경치로 들어간다는 뜻이지만, 대체로 자꾸만 좋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또 ‘설상가상(雪上加霜)’ 눈 위에 서리가 더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뜻과 같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겹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일석이조, 일거양득, 금상첨화의 좋은 일이 겹쳐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일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지만 항상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두 마리 토끼를 쫓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토끼를 동시에 좇아가서 잡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한 토끼를 선택해야 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의 일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이루지 못할 확률이 훨씬 높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는 한 가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히 좋은 일과 나쁜 일, 권장하는 것과 금지하는 것을 동시에 하는 것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부에 전심전력해야 할 때에 게임에 빠지거나 노는 일에 빠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겠죠.
본문에서는 성령의 법인 생명의 법과 육신의 법인 사망의 법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일에 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동시에 나쁜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 결코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육적인 유익함을 위하여 좋지 않은 것들은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좇아가는 사람은 오직 그 목표만을 생각하고 다른 길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가려는 길 보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이 더 좋아 보이게 되면 내 목표는 사라지거나 혹은 훨씬 더디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지금 내가 정한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결코 나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에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가는 생명의 좁은 길을 갈 때에 죽음의 넓은 길이 좋아보이게 된다면 그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는 신앙의 길에 대한 명확한 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은 사람의 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롬 7;15-23). 그러나 성도는 불신자와 달리 이 타락한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대로 좇아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육신을 제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 성령을 좇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육신이 연약하여 일상의 삶 가운데 여러 가지의 죄를 범하기도 하고, 또 죄를 지을 때마다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하지만 날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의 뜻대로는 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좌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향하고 있는 내 육신이 성령께서 원하시고 인도하시고자 하는 반대 방향인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에도 돌이키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이럴 때에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측량될 것입니다.
내 육신이 죄악과 향락의 길을 가는 것을 깨닫고도 멈추고 돌이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 영혼이 사단의 깊은 영향에 빠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요? 마귀의 세력과 싸워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분은 자신의 믿음으로 마귀의 힘과 싸워서 이겨낼 수 있습니까?
내 믿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성령님의 이끄심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육신의 싸움입니다.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때에 믿음이 승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믿음이 장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해서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지지 않습니다. 100%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살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릴 때에 먹던 음식은 커서도 찾게 됩니다. 어릴 때에 라면을 많이 먹게 되면 커서도 라면이 자꾸 먹고 싶어집니다. 군고구마나 감자를 구워 먹는 기억이 있다면 커서도 그런 토속적인 맛을 찾게 되지만 햄버거와 피자 같은 것을 먹고 자라게 되면 그런 종류의 맛을 다시 찾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카페인은 커피나 콜라와 같은 음료수에 많이 들어 있고, 커피와 콜라를 마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카레인 중독에 이미 걸려 있는 상태입니다. 자꾸만 커피와 콜라가 마시고 싶어지는 이유도 카페인에 이미 중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악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중독이 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행하는 여러 가지의 좋지 않은 습관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습관들은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분명히 나쁜 것이지만, 우리 몸에, 또 우리 뇌리 속에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한 유혹이 찾아올 때에 다시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벧전 4:3)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을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영을 좇는 자 즉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말씀을 사모하는 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의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와 믿음이 없는 성도의 차이점이 무엇으로 나타날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적용을 시키면서 살아갈까 하는 것도 진실한 성도의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써 있지만 내가 돈을 벌고 출세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방법도 무관하게 따른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성도는 말씀과 세상 방법의 차이점이 나타날 때에 하나님 중심, 은혜 중심, 교회 중심적인 생각과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내 육신의 유익을 위한 방법으로 해석과 적용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으로 제사를 지내던 풍습이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였으며, 이 죽은 조상의 귀신을 잘 섬겨야 내가 잘 되고 후손이 잘 된다는 유교의 교리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으로 내려가지만 영혼은 위(하늘나라, 천국)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전 3:21). 그리고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에서는 물론이요, 감리교에서도 재작년 총회에서 제사를 허용했습니다.
바로 이런 차이가 믿음의 차이입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성경에서 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하거나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지만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성경 말씀보다 세상적인 유익이나 풍습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이것의 결과는 바로 죽음과 생명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을 대충 지키고 세상 따라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생명과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을 지키는 차이가 바로 천국으로 갈라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바로 천국에 가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는 확고한 믿음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이 지향하는 죄의 성향이며 이를 달리 표현해서 ‘육신의 정욕’(요일 2:16)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죄악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일까요? 그 답은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사탄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권세에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적 부패(whole depravity)와 전적무능력(whole impossibility)"입니다.
사탄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명하시고 요구하시는 의롭고 거룩하며 선한 뜻을 주시고 실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신령한 것인지 알면서도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그에 순복하기보다는 도리어 그에 반동하며 범법하는 성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인간의 부패한 심령을 주장하여 인간을 죄의 종노릇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 결과 죄로 오염되고, 죄성을 물려받은 인간은 우선 선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시편 14:1-3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 육신에 있는 자는 육신을 좇는 자입니다. 부패한 인간 본성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저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로 여기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 3:18).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성령께서 그 심령 가운데 빛을 비추시기 때문에 죄의 결국은 어떠하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예전의 모습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운 사람을 입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엡 4:22-2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며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반대로 우리의 심령 속에는 성령이 거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신 것입니다.(2)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일시적으로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거듭난 성도의 마음에는 성령께서 항상 계셔서 천국에 갈 때까지 인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부패한 본성에게 져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생각으로 절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적용시키시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으나 내 안에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에 이를 수 있고, 또한 변화된 삶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였습니다(10).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격적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참으로 신비로운 연합니다. 이 신비스러운 연합으로 인하여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으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죽었다는 표현은 실제로 죽을 몸만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 이후 죄악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부패한 심성까지도 포함이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롬 6:16). 그러나 영은 살았습니다. 몸과 대조되는 영은 인간의 영혼을 말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지정의의 인격의 실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되고 인간은 본래 영광이 회복되는 것인데,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은 물론 만유가 회복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던 그 모습으로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다 빚진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도는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모든 과정에 걸쳐서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으로나마나 그 은혜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고 하였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나 기타 다른 짐승들도 주인의 사랑을 알고 주인을 따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도 감사할 줄 모르며 그에 보답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과 행위들을 죽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육신적인 것, 즉 마귀의 이끌림을 받아 육신적인 죄의 성향을 따라 계속해서 종노릇하며 살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하여 배은망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육신의 욕심에 따라 살면 우리가 충성을 바치며 집착하고 있는 우리의 심령 속의 바로 그 죄악 된 세력이 우리를 옭아매고 그 자체의 운명인 사망으로 이끌고 갈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는 것은 죄를 낳고 죄의 결국은 사망이기 때문에 성도는 육신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죄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하는 신호를 자꾸 보내는 것입니다. 비록 거듭났지만 육신은 마귀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육신의 정욕들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여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가 아닌 것은 비록 내 자신이라도 경멸하며 내버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로 살려고 할 때에 마귀가 비웃고 조롱합니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거룩하게 의롭게 살았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달려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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