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유라굴로 사도행전 27:27-44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에 혹은 어떤 일이 닥쳤을 때에 혼자서 결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나 혹은 선배, 직장 상사, 은사 등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 상의를 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이든지 좋지 않은 일이든지 생겼을 때에 혼자서 처리하기에는 벅찬 느낌이 든다면 누구와 상의를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정말로 박사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박사도 얼마나 세분화가 되어 있는지 별별 박사가 다 많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한 적절한 박사를 만나면 쉽게 해결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세상적인 박사와 오직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알고 세상적인 것에는 문외한인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상의를 해야 하고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외면상으로는 유대주의자들과의 종교적인 충돌로 인하여 큰 소요를 일으키고 체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바울을 율법을 모독하였으며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를 처형해야 된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항하여 바울은 다섯 차례에 걸친 변론 끝에 이런 상황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을 하고 가이사(Gaesar) 즉 로마 황제에게 호소하자 청원이 받아들여져서 로마로 이송이 결정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의 책임 아래 다른 죄수 몇 사람과 함께 가이사랴에서 배를 탄 후 이튿날에는 시돈에 도착하였습니다. 시돈에서 이달리아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그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브로 섬 동쪽으로 항해하여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르렀습니다. 무라는 애굽과 로마 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이 정박하는 중요한 큰 항구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곡물선에 바울과 다른 죄수들을 태워 로마로 가고자 했습니다. 큰 배였기 때문에 반대로 불어오는 바람이라도 능히 헤치고 항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 큰 곡물선은 곧 무라를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항해하다 맞불어 오는 북서풍을 만나 천신만고 끝에 니도에 도착하였습니다. 꽤 오랫동안의 날이 지난 후에 불과 208km 떨어진 니도에 도착한 것은 얼마나 항해가 힘들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실제로 무라에서 니도까지는 순풍을 타고 항해하면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니도는 소아시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에게 해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가려는 배들의 마지막 기항지이자 북서풍을 막아 주는 육지의 역할이 끝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항구는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정박하는 배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점점 더 세어졌습니다. 도저히 항해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니도에 정박하여 순풍이 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곡물선이기 때문에 일정에 맞추어서 운항을 해야 되기 때문에 바람을 최대한으로 피할 수 있는 항로를 따라 어렵게 미항이라는 곳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 도착한 것은 유대인의 절기인 대속죄일(민 29:7-11)이 훨씬 지난 때로 겨울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항해 경험을 들어 지금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그냥 미항에서 겨울을 나자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당시의 선박으로는 겨울철에 지중해를 항해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겨울철에는 강한 북동풍이 불어 올 뿐만 아니라 태풍이 자주 발생하여 당시와 같은 선박은 조난을 당하거나 파선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항은 많은 사람이 겨울을 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과 선원들은 항해를 계속하여 그레데 섬의 뵈닉스라는 곳에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습니다.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원들의 말을 더 신뢰하였고 항해는 강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항해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배는 얼만 못가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선장을 비롯하여 배에 탄 모든 사람은 무려 14일이라는 오랜 시간을 광풍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음은 물론 배는 파선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유라굴로’는 동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유루스’와 북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킬로’의 합성어로 ‘동북풍’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런 폭풍은 그곳의 전형적인 지형으로 인해 형성되는 돌풍입니다. 그레데 섬의 한 가운데 솟아 있는 2,100m의 ‘이다(Ida)' 산맥에서 형성된 두 반대 기류가 맞부딪칠 때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순한 남풍이 이런 돌풍과 겹쳐 북풍으로 급격하게 변하기 때문에 ’유라굴로‘로 불리웁니다. 한 번 이 바람에 휩싸이고 나면 배가 방향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다 결국에는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배는 유라굴로에 밀려 가는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장과 선원의 그 좋은 기술이 모두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선주도 이제는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기 때문에 곡물을 염두에 둘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배가 흘러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을 지날 때에 간신히 거루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거루’는 보통 배고물에 매달아 끌고 다니는 작은 배(boat)로 기상 조건이 나빠지면 갑판 위로 끌어올리곤 했습니다. 이제 선원들은 가우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바람을 조금 피할 수 있게 되자 거루를 잃지 않으려고, 또 그것이 배 본체에 부딪쳐 파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갑판 위로 끌어 올렸습니다. 이로 보아 그 동안에는 갑자기 불어닥친 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거루를 끌어올릴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가 파선될 경우 정박 시설이 없는 곳에 비상 상륙을 하려면 이 작은 배 ‘거루’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저들은 끌어올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우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있는 동안 두 번째로 취한 비상조치는 선체를 밧줄로 동여매는 것입니다. 항해 도중 선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악재는 돛대와 선체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원들은 두 번째 비상조치로 밧줄로서 선체를 죄어매어 파괴적인 강풍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후의 가능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당시의 배들은 선체의 널빤지가 파괴되어 침몰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이에 대비할 수 있는 밧줄을 준비한다는 것은 필수적 요건이었습니다.
또 섬 근처에 있는 ‘스르디스’ 즉 모래톱에 배가 걸리면 꼼짝도 못하기 때문에 연장까지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배는 계속해서 그냥 쫓겨 갔다고 했습니다. 선원들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지만 광풍이 부는 대로 배는 흘러갔습니다.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광풍으로 인하여 모진 고통을 다 당했습니다. 결국 배를 가볍게 하려고 모든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화물을 버렸지만 폭풍은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배의 기구까지도 바다에 버려야만 했습니다.
폭풍은 계속 사납게 불어 댔습니다. 몇날 며칠 동안이나 해나 별들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항해자들이 배의 현재 위치조차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나침반이 발견되기 전인 당시의 항해는 해와 별과 달이 항해의 방향을 잡아주는 유일한 길잡이였습니다. 당시 폭풍 속에서는 구원의 희망이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때에야 비로소 바울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유라굴로가 주는 교훈은
1.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11절에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이 탄 배는 이제 미항에서 겨울을 날 것인지 아니면 미항을 떠나 약 65kmk 떨어진 그레데의 남쪽 해안에 있는 뵈닉스(Phoenix)항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곡물 운반선은 로마 정부의 통제하에 운항되었기 때문에 결정권은 결국 로마의 백부장인 율리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바울의 권면을 무시하고 선장과 선주들의 견해를 더 중시하였습니다. 물론 백부장이 판단하기에 바울보다는 항해술의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백번 타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과 지식,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의 배후에서 보호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른 결과가 어떠한 것일지는 불 보듯 뻔한 것입니다. 백부장은 항해를 시작하고 나서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13절을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항해를 결정한 것을 잘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일어난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그들의 결정에 후회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우선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매사에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나 계획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또한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에서도 교훈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에만 사람의 계획대로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좋은 계획을 박사들로부터 조언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은 아닐지 모르지만 크고 작은 바람이 항상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성도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고 깊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답은 반드시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자기의 계획대로 진행하다가 돌연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유라굴로의 광풍이 찾아오는 것은 우연이 결코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유연이라는 것은 결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유라굴로가 올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께 주시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삶에 불필요한 것을 주시거나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은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것은 곧 영적인 지혜에 대한 불순종이며, 이 불순종은 곧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죄수의 신분이기 때문에 백부장은 그의 말을 듣기 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과 경험을 더 믿고 출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지혜를 갖춘 자에 대한 존중심과, 기도하는 주의 종에 대한 복종심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 그 뜻을 불순종하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를 잡을 때에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힘을 거대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자연의 재해에는 첨단 기술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한 겨울의 이 추위와 눈보라를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습니까? 한 여름의 태풍을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강한 힘을 만나기 전에는 무사태평 안일함으로 살아갑니다.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았다고 안전하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에 닥쳐오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비웃듯이 모든 것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과 스스로 의로움을 부수기 위하여 유라굴로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라굴로에 맞부딪쳤을 때에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2:6-8을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환난 중에 소망을 주십니다.
유라굴로의 광풍 속에서도 바울은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말씀하신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붙들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믿음은 자신과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한 번 하실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망망대해에서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어떤 처신을 해야 할까요? 배를 타자고 한 사람, 배를 타게 한 사람, 일기예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기상청,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원들을 원망하기에 바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광풍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원망과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이 되어 로마로 이송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광풍 속에서 열나흘을 먹지 못하고 배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언제 파선이 되어 바다에 빠져 죽게 될 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역경을 만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나를 살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역경이 마지막 일수도 있고, 앞으로 더 큰 것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믿을 때에 우리는 광풍에서 벗어나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바울은 배와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하려는 선원들을 저지하였습니다. 또한 열흘 넘게 시달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보호하심을 확신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배를 조금이라도 해안까지 가까이 대기 위해 최대한으로 배를 가볍게 하려는 지혜도 내 놓았습니다. 절망 속에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을 믿고 배안의 사태를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자신뿐만 아니라 276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을 무사히 상륙시켜 생명을 건지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광풍을 주시고, 우리 교회에 어려움을 주시는 것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에 노력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힘을 다하여 이겨낼 수 있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라굴로를 믿음으로 극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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