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두 아들의 비유

chukang 2010. 12. 2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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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 마태복음 21:28-32

 

 

  한 농부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살았습니다. 포도원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늙고 힘이 없습니다. 그래도 농사는 지어야 하겠기에, 큰 아들을 불러서 포도원에서 할 일을 가르쳐 주고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들은 “네, 아버지”하고 대답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포도원에는 가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에게 시킨 것과 똑 같이 말을 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귀찮아했습니다. 일을 하기가 싫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아들은 조금 있다가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아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했습니까?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자녀가 둘 이상이 되면 두 자녀의 모습이 서로 다릅니다. 집집마다 다르지만 큰 아이가 말을 잘 들으면 둘째 아이는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도 있고, 그와 반대로 큰 아이는 말을 잘 들지 않지만 작은 아들은 말을 잘 듣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두 아이 다 말을 잘 듣지 않는 경우고, 최선의 경우는 두 아이 다 말을 잘 듣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농부의 가정의 자녀들 이야기는 영적으로 풀지 않아도 우리의 실생활에 너무나 잘 맞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집집마다 자녀들이 말을 잘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도 잘 하고, 또 놀 때는 열심히 놀고. 요즘은 공부만 하라고 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자녀의 품성이나 지능을 보고 “이 아이는 학자로 키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판단을 했을 때에는 공부만 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 저런 아이 많이 겪어보니까, 학자가 될 만한 아이는 부모가 공부를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가 좋아서 합니다. 정말로 운동이 좋고 체력도 뒷받침이 되는 아이는 굳이 공부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아이는 스스로도 운동을 좋아해서 훌륭한 운동선수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그런 자녀들만 있지는 않기에 많은 문제와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에,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를 부모가 억지로 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아이의 경우에는 공부나 운동이나 아니면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에는 자녀가 하기 싫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시키니까 억지로라도 하면 성장하여 반듯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네! 하고 대답만 하고 공부하는 척 하고 다른 짓을 하는 경우에는 그 당시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편하고 즐거울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가까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에서 나타나게 되고, 고입, 대입, 또 입사시험과 같은 것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는 다 동일한 학생으로 배움의 시기입니다.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잘 못하고, 누구는 운동을 잘 하고, 누구는 예능에 재질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만 아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끼리도 서로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배움의 시기에는 끝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잘해도, 조금 못해도 괜찮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면 그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배움의 기간이 길다고 하면 긴 시간입니다. 이 기간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성장한 후에 사회에 나가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 것인가가 결정이 되고, 학생 시절에는 동일한 위치였지만, 그 때에는 서로 다른 위치가 될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부모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사회에 나가보니,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정말 별 볼일이 없는 친구였는데, 자기보다 높은 자리, 자기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 시절의 잘못된 습관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지만, 절치부심하고 이제라도 돌이켜서 내가 한 단계 더 발전하고 나아가기 위해서 결단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순종을 잘 한 것만큼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 수많은 시간들, 노력들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사람은 희망적입니다. 자신에 대해 깨닫고 변화시킬 수 있는 자세는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에게 왜 이런 두 형제의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두 형제는 누구를 상징할까요? 결론부터 보면 32절에서 첫째 아들은 “너희”라고 말하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라고 말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33-46절의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의 비유와 경고 역시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은 ‘너희’입니다. 이들을 통틀어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현혹되어 있는 일반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포도원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도 죽이는 심히 악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였겠느냐고 주님께서는 반문을 하셨습니다.

  농부로 나오는 ‘한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맏아들은 유대인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입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결국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을 맏아들과 같이 온갖 종교적 특권과 정치적인 특권과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듯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들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악한 농부가 주인이 보낸 심부름꾼들을 죽인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선구자 세례 요한과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배척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반항적이고 반 율법주의적인 세리와 창기들은 세례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들이 유대 교권주의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주시는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입술로만 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말로만 ‘네’라고 대답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맏아들처럼 간다고 대답하고 가지 않는 것을 순종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사람들은 앞에서라도 ‘네’ ‘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뒤에서는 다른 소리하고, 거짓말을 할지언정 앞에서라도 ‘네, 네’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역시 진실한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나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 대하여 결코 좋은 평가를 내리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정죄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맏아들로 상징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가장 잘 순종하는 것처럼 떠들면서, 정작 아무 것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마 25:41-45).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드러내야 할 핵심적인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척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았음은 물론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앞에서 ‘네, 네’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불순종의 극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좋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모습으로 사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굽실거리면 자신이 매우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줄로 착각하면서 삽니다. 자기의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 줄로 압니다. 결국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처세술이 좋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결국은 사망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하십니다. 실제로 그들의 끝은 멸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할 때에 분명히 그들은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A. D.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파괴를 당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은 내 생각이 옳은 것 같고, 지금은 조금 불편하고, 지금은 즐길 것을 즐기지 못하니까 욕구 불만이 생길지 모르지만, 잠시 잠깐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서 사는 인생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하루에 기도를 얼마나 하는 줄은 잘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하지 않고, 말씀 읽는 것이 뭐가 그렇게 힘 드는지 전혀 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 겨우 한 시간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그 시간보다 잠자는 게 더 좋고, 놀러 가는 게 더 좋고, 하는 일이 없어도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의 힘으로 순종하면 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주님께서는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둘째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앞에서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기 싫어서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에 안 간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직장에서도 욕을 참 많이 먹습니다. 미움을 얼마나 많이 받는 줄 모릅니다. 앞에서 ‘네’라고 대답하고 하지 않은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까?

  그러나 윗사람이 시키는 일이 정당했는데, 아랫사람이 불순종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반성하면서 시킨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이 사람이 ‘네’ 하고 안한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물론 처음부터 순종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돌이킬 수 있는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무례하기도 했고, 경솔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포도원으로 가서 일을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처음에는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같이 아버지의 뜻을 신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고 했으나 행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순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둘 다 온전하게 합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했기 때문에, 굳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아버지의 뜻에 가깝게 행했는지를 따진다면 당연히 둘째 아들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나 세상 사람들 중에서는 ‘나는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돌이킬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요일 1:9). 둘째 아들처럼 우리의 회개를 방해하는 마귀의 술책을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모든 일은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자신이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의 세상에서는 다 자기가 왕입니다. 그러니까 대기업에서는 이런 것을 이용해서 ‘고객은 왕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과잉 친절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는 자신이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생산자의 상술에 빠진 것입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책략을 사용합니다. 언제나 마귀는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네가 제일이야. 네 마음대로 하면 되. 네 생각이 옳은 거야. 똑똑한 사람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똑똑한 사람도 있습니다. 덜 똑똑한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에게 이용을 당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더 똑똑한 사람이 덜 똑똑한 사람에게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계략에 말려들어가지 않는 우직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귀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지은 존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그런 마귀와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마귀의 꾀에 빠져서 내가 가장 훌륭하고 뛰어나고 잘난 존재로 착각하면서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불순종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또 성도들에게도 역사하여 불순종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귀의 계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하지 말라면 하지 않으면 되고, 하라면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바보가 되면 순종이 되고,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고 잘 되는 역사를 일으켜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보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그 길만을 걸어가는데, 거기에는 마귀가 틈탈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정말 세상적으로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잘못 생각하거나 착각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즉시 돌이키는 자세를 보였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마귀에게 순종하면서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바보처럼 순종하여 복 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돈으로 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영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존귀한 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스스로 높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접하려고 하는 자들까지도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낮고 천한 세리들과 창기들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이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높이고, 나의 지혜를 자랑하고, 나의 지위를 앞세우는 자들은 주님을 영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접하였더라도 말씀에 순종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만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롭고 쓸쓸한 자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만이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찾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안에서 행복을 찾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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