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디모데후서 3:1-5
테네시 윌리엄스의 소설로 1951년에 영화로 제작이 되어 남주인공은 말론 블란도로 스탠리 역을 맡았고, 여주인공으로는 비비안리가 블래취역을 맡아 연기를 했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남북전쟁의 패배로 남부에는 북부의 공업 자본이 물밀 듯이 들어옴으로써 무위도식하던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계급들은 여지없이 몰락해 갔습니다. 블랭취도 그러한 사양족의 마지막 후예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숙녀로 성장했을 때에는 가산은 대대로 줄어들어 선조 때부터 이어 내려온 저택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어 박봉인 고교 교사에 투신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블랭취는 16세때 첫사랑의 상대인 앨런과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누려오던 중, 남편이 성도착증에 걸려 동성애에 빠져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충격을 받은 그녀는 그 혐오감을 억누를 수 없어 어느 날 카지노에서 남편인 앨런과 춤을 출 때 " 난 봤어! 다 알고 있어! 당신이 메스꺼워......" 하고 불쑥 매몰스럽게 쏘아붙이고 맙니다. 앨런은 피를 토할 듯 한 수치심에 그만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결혼에 실패한 불랭취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고 메우기 위해 남성 편력에 깊숙이 빠져들어 끝내는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쳐 교직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오갈 때 없는 블랭취는 뉴올리언스에 사는 동생 집에 찾아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블랭취 동생의 남편인 스텐리에게 그녀의 불미스러운 과거가 여지없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진실이며 안식처이기도 했던 허식의 세계가 벗겨지면서 급격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동시에 마지막 한 가닥 소망이었던 스탠리의 볼링 친구인 밋치와의 결혼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스텐리에게 몸까지 짓밟히는 수모를 겪게 되고 발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과거 부자로 살던 시절을 잊지 못하고 쾌락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한 여주인공 블랭취가 결국에는 미치광이가 되고 마는 모습과, 잘못된 성적 타락인 동성애에 빠져 자살한 블랭취의 남편 앨런의 모습과, 블랭취의 여동생의 남편의 가학적인 모습 등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당시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적타락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물질에 집착할 때에 타락하여 파멸에 이르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이 집착하는 물질과 애정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한 결과를 통하여 절제의 삶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는 말세에 나타날 종교적, 도덕적 타락상을 19가지로 예고하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심각성을 일깨우며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세(末世)란 좁게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의 때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앞으로 올 날들, 곧 현재로부터 주님의 재림 직전까지의 미래의 날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이제 하나님의 구속사의 최종 성취를 앞두고 사단이 자신의 최후가 멀지 않았음을 깨닫고 더욱 극성을 부려 기독교 정통 신앙을 왜곡 호도하며 사람들을 도덕적, 종교적 타락으로 이끌고자 합니다.
이러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성도들이 끊임없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고통하는’ 이 말은 위험한, 위태한, 힘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고초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타락과 하나님을 배신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제일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다른 모든 악의 뿌리가(딤전 6:10)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말세에는 재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세에 나타나게 되는 전형적인 타락의 모습으로써 사람이 다른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 물욕과 자신의 쾌락 추구에만 탐닉하게 되는 시기가 오게 될 것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자기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요소이며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하나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지나치게 될 때에는 교만보다 더 큰 죄악이 되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스스로 우상이 되어 버리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결과가 오늘날의 ‘post modernism'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며,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남이 자신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 은대로 하는 것이 곧 포스트 모더니즘입니다. 이러한 것은 가족을 파괴시키고 공동체 사회를 파괴시킵니다.
마태복음 19:16-24에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나이까?’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가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많은 것들을 놔두고 ‘재물’을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청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재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부자 청년은 재물로 인하여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으로 인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긍하며, 교만하며’ 자긍하는 것은 남을 멸시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때 교육방법 중에 ‘칭찬하라’는 것이 대유행했습니다. 칭찬해 주는데 싫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냉철하게 판단하면 칭찬만 받고 자란 아이는 결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왕자병, 공주병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은 자신이 남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를 갈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기주의의 산물입니다.
사랑에는 칭찬만이 아니라 훈계와 채찍이 함께 해야만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잠언 23:13-14을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군들 자기 자식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귀할수록 그 아이의 장래를 위하여 훈계와 채찍은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6:5을 보면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 멸방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잠 16:18; 18:12). 상대방을 멸시하는 것이 교만이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대로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계명까지도 어기는 것이므로 어찌 하나님께서 멀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과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출 20:7; 계 16:9). 또한 이웃이나 친구에게까지 확장되어 저들에게 악담과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막 7:22; 딤전 6:4).
말세에 나타나는 또 한 가지의 특징은 ‘권위에 대한 이유 없는 거역’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모의 권위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엡 6:1). 그 이유는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한 가정을 책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의 세태를 따라서 가정마다 자녀들이 오히려 부모의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교만의 모습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는데, 자녀가 크면 부모를 멸시합니다. 자기가 배운 것이 과거에 부모들보다 더 나을 것이지만, 그 지식으로 부모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것은 분명히 마귀에게 영혼을 빼앗긴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받은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모든 덕의 근본입니다. 살전 5:18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세에는 사람들의 심령이 굳어져 감사할 줄을 잘 모르게 됩니다.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부모와 이웃에게도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성결한 삶을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들은 자신의 정욕을 좇아 제멋대로 살기 마련입니다.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좇아 아니하며
‘무정하며’ 무정하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대신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의 결과가 곧 무정함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억울한 감정을 삭히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도 지나친 자기 사랑과 자기 집착의 결과입니다. 자신만이 사랑을 받아야 하고, 자신의 입장만이 옹호를 받아야 하고, 자기의 의견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소하며’ 참소한다는 말은 남을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극악한 이기주의입니다.
‘사나우며’ 사납다는 것은 성격이 포악하여 남에게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선한 행실을 힘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을 도모하는 것초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양심이 돌과 같이 굳은 자의 모습입니다.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배반하여 팔며’ 이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상대방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의 대표가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은30이 탐이 나서 예수님을 팔고 말았습니다(마 26:14-16).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말세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쾌락을 즐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증오하게 취급될 것임을 예고해 주는 것으로, 실제로 그런 현상을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세상적인 관심거리가 인간의 구원과 직결된 영적인 문제보다 더 크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5:44에 나오는 대로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다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교회 생활을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저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자들은 신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처럼 행세한다는 것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즉 거짓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입니다. 즉 종교적인 형식은 갖춘 자들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과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경건은 기독교인의 신앙과 올바른 생활을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서 자신을 세속에 물들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약 1:27). 따라서 경건의 모양만 갖추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자들은 실제로 경건을 힘쓰는 것이 아니라 흉내만 내는 것이므로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는 외식하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이 자신을 세속에 물들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세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곧 갈라디아서 5:22-23에 나오는 성경의 열매들이며,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열매는 ‘절제’의 열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해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였습니다. 넘치는 것은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사랑도 무조건적 사랑, 맹목적인 사랑은 안 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때로는 쾌락을 즐길 수도 있지만,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긍심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교만과 같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나 성도나 절제가 없는 생활은 방종으로 흘러가고,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마귀가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한 번 달리기 시작하여 속도가 붙으면 즉시 멈출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쾌락이 몰려 올 때에, 육체적인 즐거움이 달려 올 때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길 때에는 “아 제발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빠져서 이성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즐거움과 쾌락이 올 때에 멈추어서 뒤돌아보는 절제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떤 것에 유혹을 받게 될 때에 한 번쯤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내게 유익한 것인가? 육신에 유익한 것일지라도 영혼에는 독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의 삶에는 악한 것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하였습니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혹은 국가 대표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체급이 있는 경기는 체중 조절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합니다. 수도 없이 달리기 연습을 하고, 역기도 들고, 근력 운동을 해야 합니다. 똑같은 동작은 수 만 번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왜? 상을 받기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욕망도 절제하고, 쾌락을 절제하고, 갖고 싶은 것도 참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열심히 운동하여 국가대표가 되고 아시아 경기,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경기에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절제가 없이는 결코 잘 될 수가 없고, 신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지 않고는, 육신적인 일도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실 때에 베드로에게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들을 멸하려고 하셨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절제하신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