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대적하라 베드로전서 5:1-11
베드로 사도는 당시 네로 황제(Nero, A. D. 54-68)의 기독교 대박해가 점차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가는 시점이며,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은 비록 산발적이고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미 상당할 정도의 박해를 이방인들로부터 받고 있던 시기에, 소아시아에 있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의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공한(公翰)이며 회람 서신을 보내었습니다. 서신을 보낸 이유는 당시 박해를 받고 있거나,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박해에 대하여 교회와 성도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을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원인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볼 때에 크게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성도들의 삶의 양식이 그곳 이방인들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이 과거 저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세상 연락과 음란과 정욕 등에서 떠나고 또 그 같은 행위들을 일삼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단절해버렸다는 이유로 당시 온갖 비방과 핍박을 받고 있었음을 베드로서의 여러 군데에서 암시하고 있습니다.(2:12;3:9,16:4:2-4,14-16) 둘째,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과도기로서 아직 성도의 신앙생활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당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정부와 신분상 상전인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많은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13-20). 당시 교회의 구성원은 그 지역의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 출신 성도들과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분상으로는 여러 계층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노예 출신 성도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과 불신자 상전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4:14) 부당하게 받는 당시의 여러 고난뿐만 아니라 로마시에서 시행된 네로의 기독교 대박해와 같은 극한 고난이 언제 소아시아 지역에도 밀어닥칠지 모르는 위기적 상황에 처해 있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위기를 잘 대처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교리들을 다시금 상기시켜서 성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받으신 그 고통의 십자가 고난을 상기시키면서 이를 본받아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며 성결한 삶과 선행과 성도간의 형제 사랑을 실행할 권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 이 내용은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비록 그 양상은 다르지만 종말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자주 여러 형태의 고난에 직면하게 되는 현대의 성도들에게도 위로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들(elders)을 향하여 충성되고 기쁜 마음으로 양무리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며, 5-6절에서는 젊은이들에게 교회의 질서 유지 및 화평을 위하여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겸손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그리고 7-11절에서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유혹에 대한 영적 경각심을 가지고 대적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church)란 이미 천국 시민권을 가졌지만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서 더 살아야 하는 성도들이 이 땅 위에 구성한 신앙공동체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성도는 복음을 계승받는 것이며, 또 이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신앙인으로서의 모든 일생생활을 이 교회를 중심으로 영위해 나가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먼저 공동체의 구성원인 성도들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상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신앙공동체로서의 여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난 중에도 교회공동체가 유지되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조직 정비와 교회 안의 질서 유지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감독, 목사, 교사)는 교회 조직의 핵심이며 그의 올바른 역할 수행 여부가 교회 질서 유지의 관건이 됩니다. 장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 위에 바로 서서 모든 성도들을 돌아보며 교훈하고 가르쳐야 할 그 역할 수행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교회공동체의 견고한 결속과 질서 유지를 위하여 젊은 성도들의 역할도 매우 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혈기를 죽이고 장로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겸손함으로 교우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공동체를 깨뜨리기 위하여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삼킬 자를 찾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전 성도가 신앙 안에서 일심 단결할 것을 베드로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에 그 누구보다도 더 박해를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다른 성도들을 염려하며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초대 교회 당시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구속사적 사명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이 땅에서의 자신의 사역이 절대 헛되지 아니하며 천국 상급을 얻게 하는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면류관은 운동 경기의 우승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주는 것은 B. C. 776년 제1회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올림픽 경기는 아테네인들이 그들이 섬기는 제우스(Zeus) 신 앞에서 행하는 하나의 제전(祭典)으로서 매 4년마다 제우스 신전이 있는 올림푸스(Olympus) 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런 올림픽 경기는 로마인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어 초대 교회 당시에는 전 세계의 관심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또 이 올림픽 경기를 위한 연습장도 로마 제국 곳곳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그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우스 신전이 위치한 성역 안에 있는 올리브 나무(Olive tree) 잎사귀로 만든 올리브 관을 씌어주었습니다. 이 올리브 관을 받은 사람은 자기 나라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는 큰 영광을 누렸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올림픽 경기 외에도 각 지역별로 경기를 하고 우승자에게는 올리브관이 아닌 소나무 잎, 파슬리(Parsley), 담쟁이덩굴 잎 등으로 만든 관을 씌워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운동 경기 우승자에게 주어진 면류관이 비록 큰 영광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것은 나뭇잎으로 만든 것이기에 곧 시들어 버리듯 그의 영광도 금방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온 세계 모든 국가들이 참여하는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고, 얼마 전에는 아시안 게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금메달을 딴 선수는 언론의 주목을 받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국가적으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며 매우 소중한 결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인 금메달은 충성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 즉 영원히 썩지 않고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과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애쓰지만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 곧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오늘도 신앙생활에 더욱 정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1. 장로들을 향한 권면
장로들은 교회의 가장 큰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도 막중합니다. 그리고 박해자들의 공격에 가장 많이 노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최고 수준의 선행을 행함으로 박해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이란 말은 구약에서는 한 가문의 어른이나(창 10:21), 한 지파의 장(레위 4:15), 또는 단지 연장자들(욥 32:4)에게 적용된 명칭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감독들’과 ‘목자들’이란 명칭과 함께 사용되는 단지 연장자가 아닌 교회의 책임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서 사도의 대표격이었으면서도 자신을 단지 형제의 입장에서 장로로 지칭함으로써 자신의 권면이 사도로서의 명령이 아닌 동역자적인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 부득이함으로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이끌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맡겨진 사명에 대하여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자신분만 아니라 양떼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원하는 것은 자기의 의사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좇아’라는 말을 넣어서 자원함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 또는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2)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들의 임무 수행 시의 자세로, 이 말의 배후에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교회의 재정과 가난한 자의 구제 업무가 맡겨짐으로 그들이 이것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유혹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만큼 가증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맡기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한 소명감을 가지고 즐거움으로 일해야만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책임 있게 돌봐야 할 성도 즉 양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닌 본이 되라고 할합니다. 주장하는 자세는 통치하고 주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2번째 권면의 ‘탐욕’에 대한 유혹보다 더 미묘한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지지를 얻어 획득한 권위는 쉽게 사람들을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마 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을 기억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언제나 권세로 다스리는 자가 아닌 자신의 모범된 행동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입니다.
2. 젊은이에 대한 권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순종과 겸손”입니다. 이들은 어린 사람이라기보다는 연령적으로 장로들에 비해 연륜이 짧은 젊은 교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당시 노예들이 입었던 앞치마와 같이 옷 위에 걸치고 끈으로 묶는 것을 묘사하는 것인데, 여기에서의 의미는 마치 노예가 주인을 섬기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듯이 섬김의 자세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요 13:1-20)
겸손은 기독교 윤리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낮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실생활 속에서 나타내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대적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낮은 자로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는 비결인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고보도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고 하였습니다.
3. 승리의 비결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굶주린 사자와의 싸움에서 삼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마귀의 사나움과 공격적인 힘을 나타낼 때에는 ‘사자’로 표현되고, 교활함을 나타낼 때에는 ‘뱀’으로 현현을 하는데, 이는 성도들에게 무서운 박해를 가하여 그들로 믿음을 버리게 하여 결국 멸망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1)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주님께서는 성도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책임을 져 주신다고 했습니다.(마 6:25-34) ‘맡겨 버리라.’는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근심과 염려와 걱정들을 한꺼번에 내어 던지라는 뜻입니다. 참된 성도는 부정적으로 자포자기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움켜지고 끙끙 앓으며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는 이런 성도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2) 근신하라 깨어라. 근신하는 것은 감정, 욕망, 염려 등과 같은 것들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깨어라’ 이것은 주님께서 자주 사용하셨고, 강조적으로 사용하신 말씀입니다(마 26:40, 41; 막 13:35, 37). 육신적으로 나태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눈을 뜨고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나태한 삶을 사는 자는 마귀의 표적입니다.
3) 저를 대적하라. 마귀가 비록 강하지만 피하지 말고 대적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도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적하라는 것일까요? 핍박하는 자들과 맞서 힘의 대결을 하라는 것일까요?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은 당시 교회 내에는 정욕에 따라 사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주는 말씀인데, 즉 마귀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에게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마귀에 대해서는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과 벗하여 삶으로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현재의 세속적인 정욕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인이며,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에 있다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죄악 된 삶에서 돌이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적하는 필승의 도구들입니다. 엡 6:1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고난 중에도 교회가 견고히 서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한 사단의 궤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여 더욱 믿음을 굳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 내 연약한 힘이나 오류와 실패로 가득한 세상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데서 오는 염려를 막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섭리와 계획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의 삶에서 오는 염려를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근신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믿는 일에 조금의 나태함이나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나를 넘어뜨리려고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작은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직 담대하고 굳건한 믿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며, 염려 대신 감사와 기쁨과 찬양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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