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열매 베드로후서 1:3-11
마귀는 항상 안팎으로 성도를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밖으로는 온갖 위협을 합니다. 건강이나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도 하고, 물질의 위협, 출세나 명예의 위협을 하기도 합니다. 안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떠나게 하기 위하여 거짓 교사들 거짓 선지자들 혹은 거짓 그리스도로 가장하여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서 성도들 스스로 믿음에서 떠나며, 자신의 생각과 편의대로 신앙생활하기를 원하고, 이단에 대한 경계를 스스로 허물어 버리고 ‘신앙의 자유’라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 불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우상숭배나 귀신이나 악령 숭배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대 신앙의 모습은 곧 사사기 시대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사사기의 교훈은 우상숭배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와 백성들의 회개로 인하여 회복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하나님의 징계가 와도 그것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이러한 문제들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는 사라졌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일이 잘 안 되면 돈이나 인맥을 동원하여 해결하려고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일을 찾거나 포기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현대인들의 신앙은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매우 심각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곧 회개라고 하는 신앙의 중요한 요소를 배제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혹 자신이 잘못한 것을 시인한다고 해도 그 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강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까지 이르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로 불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성도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다만 교인으로서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즉 하나님을 참으로 신앙하는 자세를 버리고 자신을 위안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구원의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대형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자랑을 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교인은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종교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 안타깝거나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를 삼지 말라고 하는 자리에까지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반대로 바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성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런 성도가 의외로 이단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신이 속한 교회가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기 때문에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집회나 기도원을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경우에는 정통 신앙을 소유한 교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경우이기 때문에 이단 종파에 속한 자들이 접근하여 사설을 전파하게 되면 그것에 혹하게 되고, 이단의 무리에 들어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록한 배경은 성도들의 신앙 자체를 위협하여 그릇된 사설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한 정통 교리에서 떠나게 하고 도덕적으로 세상에 속한 이방인들과 동일한 타락에 이르도록 공격하는 이단에 대한 경계와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을 통하여 주로 경건 생활과 신앙적 노력에 대하여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경건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1. 경건이란?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경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곧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생에서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천국 구원과 관련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경건 생활의 기초는 구원의 진리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3절에 ‘생명과 경건’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생명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서(요 1:4; 14:6)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근원적 본질인 ‘영생’을 말합니다. 경건은 좋은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즉 경건은 생명의 열매이며, 생명은 경건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생명과 경건은 구속하심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된 사람이 가지고 나타내야 할 영적 요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권능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에게 그 영적 요소를 충만하게 공급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죽었던 인간을 새 생명으로 탄생시키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로 양육하시며 끝내는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과 덕”이라는 것은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덕은 성도 안에서 성도들을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셔서 자기 백성을 부르고 인도하십니다.
2. 경건의 실천
4절에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는 3절의 주님의 영광과 덕을 말합니다. 주님의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는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과 영광된 삶은 결코 파기될 수 없는 것입니다(히 6:13,18). 그래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입니다. 이런 약속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정욕 때문에 썩어질 것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노예가 된 육신의 탐욕을 따라 악한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악한 것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도라고 불립니다. 교인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성도가 되고, 성도라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자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적인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악한 것에서 머뭇거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에 물들거나 동화되거나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악한 것에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도망하듯이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결단을 하게 되면 악한 것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악 속에 빠지게 될 때 그 결과는 타락과 고통과 징계라는 것을 안다면 악 속에 빠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라도 이 악 속에 빠지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그것은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에 역사하는 악한 영의 유혹으로 잠시 잠깐의 기쁨이나 쾌락을 즐기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그 유혹에 빠지게 되면 성도의 눈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교훈들은 가려지고 잊어버리게 되고 천국의 소망도 지옥의 그 무서운 고통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일이 무슨 소용입니까? 다만 한 순간의 쾌락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내게 믿음이 없다면 악한 것이 악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쾌락은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도 잘 즐기면서 살고 있는데, 나라고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악한 쾌락이 내 영혼을 갉아먹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차릴 수도 없고, 그래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악한 쾌락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유혹에 빠져들고 쾌락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악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악으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라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내가 여기에 빠질 수 없다는 결단이 없다면 결코 도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악한 것에 빠질 수 있을까? 절대로 나는 빠질 수 없기 때문에 도망하는 것이 바로 경건의 실천인 것입니다.
3. 경건의 도구
“믿음에 덕을” - 믿음(πιστις)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믿음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믿음으로부터 성결의 단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덕( ἀρέτην)’은 ‘의’와 동일한 것으로 선한 행실, 착한 행실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적 능력 또는 원기를 말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종교적 행위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건강하고 성결한 윤리적 삶을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13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바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아니라면 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온전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덕에 지식을” - 지식(γνῷσι?)은 인간의 감성과 이성과 통찰력에 의해 습득되는 일반적인 지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뜻합니다. 흔히 종교의 신비적 경험에만 의존하려는 성도들은 종종 지식을 등한시하거나 멸시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될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균형 있는 신앙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도를 은혜와 평강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 때 성도는 세상을 올바로 간파하여 세상에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에 절제를” - 절제(ἐγχράτεια)는 자제력입니다.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제한적으로 허용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성도에게는 삼가야 할 지식이 있고, 허용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만해져서 넘어서는 안 될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에는 절제가 요구됩니다.
“절제에 인내를” - 인내(ὑπομονή)는 굳게 버티는 지구력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시련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소망하며 지속적으로 차는 것입니다. 자제력은 한 순간에 끝날 수 있습니다. 신앙에는 자제력과 더불어 길게 버틸 수 있는 지구력이 필요합니다. 한 번 참고 마는 것은 참된 절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오래 절제하는 인내를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착하고 충성된 주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원수된 우리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되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길이 참으신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인내에 경건을” - 경건(εὐσέβεια)은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경건입니다. 흔히 선을 행하고 지식이 있으며 인내심이 큰 사람들은 자칫 자신을 높이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욱 더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이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여 하나님만을 경배하도록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 형제우애(φιλαδελφία)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데, 주님께서는 율법을 단 두 개의 계명으로 요약하여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4-4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경건한 자는 아울러 사람을 사랑해야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버린 인간 사랑은 거짓이며 인간을 도외시한 신에 대한 사랑은 허무라고 합니다.
“형제 우애에 사랑을” -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ἀγάπη)은 아가페로 이 사랑은 모든 덕목을 포괄하는 가장 높은 덕목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종교적 윤리적 덕목도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성도가 이 사랑을 모든 것 위에 더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모든 것을 온전케 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8가지 덕목을 가리켜서 신앙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덕복을 실행할 때, 첫째는 그리스도를 아는 데 부지런해지고, 둘째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식은 마치 희미한 거울을 통하여 사물을 보는 것처럼 불완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9, 12). 따라서 우리의 이러한 불완전한 지식은 날이 갈수록 완전한 지식으로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믿음을 통한 의로운 생활, 즉 신앙의 덕목들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는 생활을 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자라고자 한다면 주님의 뒤를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없는 자들은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요, 진리를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늘에 관한 소망이나 영적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현세의 편안함이나 인간적인 탐욕만을 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8가지의 덕목의 신앙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을까요? 10절을 보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올해는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요? 육신적인 열매가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로서 영적인 열매는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열매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을 참으로 경배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을 통하여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되며, 또 그런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올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신앙의 자세를 갖는다면 최소한 회개의 열매는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회개의 열매를 기반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더욱 사모하는 가운데 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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