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나실인이 태어나기까지

chukang 2010. 11. 6. 23:10

 

첨부파일 나실인이 태어나기까지 사사기 13.hwp

 

나실인이 태어나기까지 사사기 13:8-25

 

 사사기는 신앙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사망한 후에 지도자가 없는 가운데 표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같이 순종하면 복을 받아 가나안에서 오랫동안 잘 살 수 있을 것이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외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죽어나가며 먹을 것이 없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고 강력하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말씀을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백성들의 타락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그 징계의 내용은 주변 국가들이 침입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미디안, 모압, 암몬 등이 하나님께서 주로 사용하시던 징계의 막대기였습니다. 이들을 남겨두어 이스라엘에게 “찌르는 가시”가 되도록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신 것입니다.

  삼손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기 전에 이스라엘은 “다시” 악을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를 자행하였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죄를 짖는 이스라엘입니다. 이 죄는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블레셋이라는 나라를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침범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압제 속에서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압제 아래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라고 하는 사람의 아내에게 나타나셔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하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당시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족장시대에 사라도 90세나 되어 아들을 낳았고(창 21:1), 사무엘(삼상 1:20), 세례 요한의 부모(눅 1:36)도 오랫동안 자식을 낳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렸습니다.

  예로부터 동양 사회는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큰 수치였을 뿐만 아니라 온 가정의 불행한 일로 여겼습니다. 특히 자녀를 많이 낳을수록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이요, 부의 상징으로 여겼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시 127:3-5;128:3; 잠 17:6).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아이를 잉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특별한 목적을 갖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종종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기도 했습니다.(삼상 1:2) 이렇게 하여 바쳐진 자를 소위 “나실인(Nazirite)"라고 합니다. 물론 나실인은 단지 부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서원(행 18:18)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눅 1:15)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어날 삼손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나실인으로 구별된 것입니다.

  단 지파 사람 마노아와 그의 아내도 자식을 얻기를 얼마나 소망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이었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소망이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시 블레셋의 압제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마노아의 아내의 태를 열어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 소식은 마노아 부부의 개인적인 소망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어서 큰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여호와의 사자’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신 기록이 있습니다(창 22;11; 삿 2:1).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은 18절에 보면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에 “기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기묘라고 하는 이름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즉시 남편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고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노아는 즉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은 이 놀라운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사자를 보내주시고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줄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노아에게 즉시 응답을 해 주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임하였습니다. 평상시와 동일하게 일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다시 임하신 것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즉시 남편에게 달려갔고, 남편이 밭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먼저 아내에게 임한 여호와의 사자인지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의 말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아이를 ‘나실인’으로 키우되 아내에게 말한 그대로 다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1. 나실인이란?

  나실인은 남녀 모두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제도는 당시 남성 우월주의 사상이 팽배하고 있는 시대에서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로 범죄 이후 여성은 남성의 권위 아래 놓일 뿐 아니라, 아예 예속되었으며, 남성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제한된 존재입니다(창 3:11). 그러나 나실인의 규정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의 독립적 위치를 차지하게 한 것입니다.

  나실인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과 약속을 해야 합니다. 그 약속은 특별한 헌신을 하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맺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봉헌 된 사람을 말합니다. 나실인은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성별한 영혼입니다. 따라서 나실인은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동안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며 봉사하기로 서원한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를 가리킵니다. 나실인에는 자원하는 경우와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하여 부르신 경우와 부모에 의한 경우가 있는데, 삼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한 것이며, 사무엘의 경우는 부모의 서원에 의한 것입니다.

 

2. 나실인이 금해야 하는 것

  첫째,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포도주는 포도즙에 누룩을 섞거나, 포도즙에서 자연발효가 일어나서 술이 된 것을 말하며, 독주는 포도주 외에 모든 술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레 10:0;눅1:15). 옛날 애굽 인들이나 현대인이 즐겨 마신다는 맥주도 독주에 속합니다. 나실인은 이 모든 술의 탐닉에서 자신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강한 명령입니다.

  술은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자극시키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으로 향락과 무절제의 대명사입니다(삼상 25:18; 잠 31:5; 호 3:1). 이 금지의 목적은 멸망당한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보듯이 성화(聖化)를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누구든지 술을 멀리하지 못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육체적 소욕에 더욱 얽매이게 되며,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기쁨으로 삼을 수 없게 되므로 나실인으로서는 절대 금해야만 합니다.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도 마시지 못합니다. 초는 발효된 것 혹은 신맛이 나는 것입니다. 포도주의 초는 히브리 가정에서 빵을 먹을 때 양념용으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룻 2:14). 심지어 포도와 관련된 모든 것은 나실인은 먹을 수 없습니다. 생포도, 건포도와 같은 몸에 유익한 것도 먹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분리, 그 가능성마저도 완전히 제거해 버리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술이 아닌 ‘포도즙’도 마실 수 없습니다. 포도즙은 즙 틀에서 포도를 짓이겨 짜낸 즙으로 대부분 물로 희석해서 먹습니다(욥 14:11).

  이렇게 포도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기간 동안에는 철저하게 분리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정해진 날이 지나면 평범한 백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모한 금욕주의자들로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을 성실히 준행할 수 있는 신실한 인간,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절제할 수 있는 의지를 소유한 사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삭도를 머리에 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서원을 하고 시작할 때에는 모든 머리를 다 밀게 되어 있습니다. 서원 기간 중에는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는 그 사람을 지배하는 어떤 절대적 권리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고전 11:3-10). 삭도는 면도칼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머리를 짧게 깎은 그리스 사람이나 면도질한 애굽 인들과는 달리, 머리가 남성의 남자다운 힘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머리가 자라면 힘도 자라고 머리가 쇠해짐에 따라 그 힘도 쇠약해 진다고 보았습니다. 나실인의 자르지 않은 머리 다발은 힘과 생명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수사자의 갈기와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머리카락과 수염을 단정하게 잘랐습니다(레 21:5). 소위 성화라고 하는 예수님의 그림을 보면 머리를 산발하고 수염을 길게 기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 잘못된 그림들입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 됩니다. 시체 즉 죽음은 죄악의 치명적인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창 3:19; 롬 6:23). 따라서 시체 접촉은 의식상 죄악과 부패의 접촉으로 간주가 됩니다. 따라서 당연히 나실인은 멀리해야 합니다. 부모가 죽은 때에도 동일합니다. 제사장도 구별된 직분이기 때문에 자기의 부모가 죽어도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레 21:11,12). 거룩하신 하나님께 구별된 자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혈육의 죽음에 직면했을지라도 죄와 부패에 오염된 시체에 근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나실인이 금지조항을 위반했을 경우

  나실인들은 서원한 동안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 다른 무엇을 휘해서도 활동할 수 없었으며, 그 구별 기간이 최소한 30일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 따라 세속의 기쁨을 멀리하고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죄를 청산하고 단절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했는데, 공교롭게도 나실인에게 접촉하게 되었을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하여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지금까지 헌신해 왔던 기간은 모두 허사가 됩니다. 그리고 나실인으로서의 헌신에 대한 기간을 새로 정하고 서원을 다시 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악이 가져다주는 폐해가 얼마나 큰 가를 깨닫게 해 주고, 더불어 범죄한 영혼일지라도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 회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가리켜 성경은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성도(聖徒)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거룩하게 구별된 신도를 가리킵니다. 단지 믿는다고 약속한 신도가 아니라 성도라는 점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어디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를 가리켜 베드로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2:9) 우리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왕과 같은 제사장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즉 우리가 나실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노아는 아내의 말을 듣고 태어날 아이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먼저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나야 하며, 그 아이에게 무엇을 행해야 할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바로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무척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인생을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인생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는 자신의 욕망이나 계획에서 나온 인위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행하는 것들이 진리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내 자식에게도 그것을 따라가도록 요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그런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결정할 중대한 시기에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에 이끌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자라고 속단했던 것입니다(삼상 16:6). 세상적인 기준이나 흐름과 개인적인 판단은 선지자조차도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미혹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그런 잘못된 판단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려고 한 것입니다. 마노아의 자세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1.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낳으리라고 선포했는데, 마노아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의 이 말을 점검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청원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아내에게 주어진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을 믿었지만, 혹시 잘못 듣지는 않았을까 점검하는 자세도 되는 것입니다. 즉 진정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기 위해 힘써 기도한 것입니다.

 

2. 말씀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에게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말씀대로 성취될 것이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태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이 임하기를 간구하는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시간에도 모든 결정을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마 26:39). 성도는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말씀을 행해야 합니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와 그의 아내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행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기르며, 행하는 기준을 말씀에서 찾은 것입니다. 마노아는 아이에 대한 모든 판단과 계획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다 보면, 그 목표가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런데 성취 욕구가 너무 강하면 때때로 환청이나 환상이나 혹은 꿈을 통해서 자신의 목표를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에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기록된 말씀만을 완전한 계시로 알아서 그것대로 행하며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마노아의 이런 신앙적 자세로 인하여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물론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부모로서의 책임을 100% 다 수행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성경을 통하여 보면 정말 힘써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런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쾌락에 빠져들고, 이방 여인과의 교제를 나누게 되고, 나실인으로 금지한 머리카락의 비밀까지 누설하게 되어, 블레셋 병사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히고, 연자 맷돌을 돌리는 형벌 속에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회개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여, 집을 받치고 있는 두 기둥을 양손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블레셋 사람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지도자를 얻은 이스라엘이었지만,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삼손의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성경에도 기도할 때에 이루어주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 생각이 되지만, 삼손의 경우를 생각하고 언제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을 주시고, 응답을 주신대로 언제 행하실 것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인내할 때에 반드시 응답과, 응답의 열매는 반드시 맺히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 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어려운 그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기라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처하여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간절한 기도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으면 간절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로 인한 것이나, 혹은 다른 이유로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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