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기를 잡고 누가복음 9:57-62
요즘은 성인 치고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을 잘 하는 사람일까요? 처음 운전을 할 때에는 앞만 똑바로 보면서 사이드 밀러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로 운전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모님은 자기는 20년 동안 운전을 했는데, 사이드 밀러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운전을 했다고 자랑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에 사고가 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간증이 아닙니다. 운전을 잘 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이드 밀러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차선을 변경하고 자우회전을 했다면, 그 차 뒤에 따라오는 운전자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운전이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이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과속을 하기 시작합니다. 끼어들기도 함부로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느라고 눈을 자꾸 돌립니다. 이야기를 해도 앞만 보면서 이야기하는 운전자가 바른 운전자입니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느라고 눈을 심하게 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가 비뚤게 갈 수밖에 없겠지요. 또 막상 차를 몰고 출발하고 나면 깜빡 잊고 가져오지 않는 물건 등이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차를 돌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가야 할까? 망설이게 됩니다.
운전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결정을 하고 일을 시작하려고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도 생기고, 다른 방법이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까지도 고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건너라는 말처럼 안전한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런 조심성이나 상황적 변화의 예측과 같은 것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검토했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시행하기로 최종 판단이 섰으면 그 일을 추진하는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힘차게 달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조금 하다가 잘못되었나 걱정이 되어서 다시 되돌아보고, 또 조금 하다가 되돌아보고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면 그 일은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조심성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추진력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바른 결정, 옳은 결정을 하고도 걱정이 되어 뒤돌아보며 주저하는 사람에 대한 교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지역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사마리아 땅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하다가, 배척 받으신 후 다른 길로 우회하여 유대 땅을 향해 가시는 도중 제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의 조건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의 조건을 3부류의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포기할 줄 아는 사람
이솝 우화에 보면 한 욕심 많은 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뼈를 하나 발견한 개는 그 뼈를 물고 집으로 돌아와서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오는 길목에는 개울이 있었고, 그 위에는 다리가 있습니다. 개는 그 다리 위를 건너다가 우연히 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 속에는 다른 개 한 마리가 뼈를 물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개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지 모르고, 다른 개의 뼈가 탐이나 멍멍하고 짖었습니다. 그 순간 물고 있던 뼈는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써 또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합당하지 않는 자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면서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에도 주님께서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주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마 19:22) 오늘 말씀 중에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을 좇겠다는 사람에 대하여 ‘서기관’(마 8:19)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의 결정을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 선생인 서기관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요, 다른 것 즉 자신의 신분과 관련되어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요한과 야고보와 그들의 어미와 같이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셨을 때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지금 당장은 불이익을 조금 받을 수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기만 하면 자신의 출세길은 보장이 되고, 지금 당하는 수모나, 재산상의 불이익은 단번에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출세와 재산에 관심이 있던 서기관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우나 새도 집이 있습니다. 사냥이 끝나면 쉴 수 있는 자기들만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땅을 기는 파충류까지도 일정한 거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동쪽에 있는 집에서 밥을 먹고, 잠은 서쪽에 있는 집에서 자게 되는 처지를 여우와 새에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주님의 생활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만족시키거나 보장 받을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행로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고자 할 때에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서는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이 여자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로 그녀는 창기였습니다. 그가 모아 놓은 전 재산이 바로 옥합에 들어있는 한 나드의 향유입니다. 값으로 치면 3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일 품삯이며, 로마 병정의 1일 급여에 해당합니다. 빌립은 5천명이 모인 무리에게 한 끼 먹일 수 있는 금액을 200데나리온으로 계산했습니다(막 6:37). 300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먹지도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입니다. 거의 일 년 치 품삯을 예수님께 다 부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난날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오직 주님만 섬기며 살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내가 가질 것은 다 가져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겠다는 것입니다. 편하게 즐기면서 따르겠다는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버릴 것을 버리고, 내게 힘들고 어려운 연단의 시간들이 필요할 때에는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해에는 내가 버릴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께로만 향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결단할 줄 아는 사람
함께 길 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에게 직접 주님께서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에 나온 서기관의 맹목적인 열정과 대조가 되는 미지근한 신앙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장례식을 엄숙하게 거행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분명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장례식은 다른 어떤 사회적 관습보다도 고귀한 의무였습니다. 모든 일에 우선하는 것이 장례식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 사람의 청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핑계로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앞의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자기의 죽은 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죽은 부친의 장례식은 불신자에 속한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불효라고 매도하는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습니다. 비윤리적인 종교라고 폄하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영에 속한 자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고 하셨습니다. 즉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주된 목적과 부수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고 바꾸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논쟁을 할 때에도 본질을 벗어나 다른 것으로 쏠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런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제, 우리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믿고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감사하며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끝까지 열심을 다하는 사람
흔히 사람은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오늘은 이것이 옳다하고 내일은 저것이 옳다하는 신실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 앞에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도 바른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결 같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농부가 일단 쟁기를 잡게 되면 그 논밭을 갈아엎는 일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면 쟁기질이 비뚤어지게 됩니다. 마치 운전자가 앞을 보지 않고 옆을 보면 차가 비뚤게 나가고 사고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직 앞만 바라보고 쟁기질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다가도 세상 친구가 유혹하면 얼른 따라갑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는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주일 성수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지만, 믿음이 약한 성도는 오히려 주위에서 유혹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교회에 빠질 수 있고, 주일 성수할 수 없었다고 핑계 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된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소돔 성에 남겨둔 재물이 아깝고, 그곳에서 즐기던 향락이 아까워서 뒤를 돌아보다가 저주를 받아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 19:2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만 향해 달려가라고 권면하였습니다(빌 3:13,14).
쟁기를 잡은 농부는 온 신경을 쟁기에 쏟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1년 농사는 쟁기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즉 쟁기를 힘 있게 눌러서 땅을 깊게 파고 갈아엎어야만 농작물이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 다 구경하고, 다른 생각에 빠져있게 되면 쟁기질은 제대로 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부는 그저 땅만 파고 씨를 뿌리고 때때로 잡초를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름대로 절기에 맞추어서 할 일이 반드시 있고, 그 때를 맞추지 못하면 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일 년 내내 열심히 철을 잘 맞추어서 하지 않으면 추수 때에는 수확이 적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해는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철부지’라는 말을 다 아시죠. 철 즉 절기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농사일은 절기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봄의 절기는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여름의 절기는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이며 가을절기는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이며, 겨울 결기는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으로 24절기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옛날 농부들은 이 절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절기 즉 철을 놓치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농부들은 계획적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을 반드시 마쳐야만 또 내일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쟁기를 잡으면 계획한 일을 마치기까지는 놓지 않는 것이 농부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우리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예배 한 번 빠져도 괜찮아. 전에 그런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해. 오늘 하지 말고 내일하면 되잖아. 또한 우리는 다 양 같은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툭하면 곁길로 빠지려고 합니다. 핑계는 왜 또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머리가 이렇게 핑계 댈 때처럼만 좋다면 다 천재 소리를 듣겠지요.
우리는 오직 한 길, 십자가의 길을 멈추지 않고 달려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는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어떤 상급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여 사랑 받고, 칭찬 받고, 면류관과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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