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chukang 2011. 6. 4. 20:33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골로새서 3:1-11

 

  오늘 말씀을 보면 인생이 후회하게 되는 일은 반드시 육신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육신적인 쾌락을 위하여 좀 더 놀고, 좀 더 즐기고, 좀 더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한 결 같이 “젊었을 때에 내가 좀 더 절제하였다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후회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신앙과 생활의 관계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참으로 유익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후회하는 일이 없을까? 하는 문제 대한 답을 오늘 주신 말씀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내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성도가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즉 성령 세례를 받아 내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상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유효적 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도가 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위엣 것’입니다. 이는 성도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성화되어 하늘나라에 가 있는 것이 아니며, 여전히 이 땅,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 참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선과 진리와 의와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위엣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의 종착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나라입니다. 나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부지런히 위를 향해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땅엣 것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것은 반대로 땅에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또는 내가 원하고 있는 삶의 가치는 어떤 것입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아니면 땅의 것입니까? 인간은 자기가 속해 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에 속한 자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며, 땅에 속한 자는 땅엣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땅에 것을 완전히 버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이상 땅엣 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땅엣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땅엣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땅엣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염세주의나 금욕주의의 생활을 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늘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늘나라 중심으로 살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땅의 것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원칙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우리의 육신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이 육신을 의미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자신의 육체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옛 사람이 갖고 있는 죄의 본성을 말합니다. 성도들에게 육을 따라 사는 죄의 본성을 제거하는 일에 과단성이 있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邪慾)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음란은 불법적인 성관계 또는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지칭합니다. 이번 고려대 의대생들의 성추행 사건이 바로 음란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한 순간을 참지 못하여 학교에서 퇴학을 당할 위기에 까지 처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가지고 의대에 입학하고 의사가 되기 위한 길을 가고 있지만, 한순간의 음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음란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이 음란죄는 동성애까지 포함합니다.

  부정은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도덕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가리킵니다. 사욕은 감정적 욕망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마음입니다. 악한 정욕은 죄악 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욕망을 말하며, 탐심은 경제적 욕구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을 지칭합니다. 여기에서 특히 바울은 ‘탐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탐심이 물질을 추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물질을 하나님의 위치에까지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사람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이 높아지려고 하고, 그 권세를 이용하여 특별한 혜택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며, 권세가 있으면 물질을 소유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내게 주신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그 물질을 사랑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에서 보듯이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다 탐심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산저축은행 임직원뿐만 아니라,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검사 출신 변호사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탐심은 그 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징벌을 하십니다. 죄란 그것이 크든지 작든지 간에 악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에서 나온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십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욕망 가운데 모든 사람이 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을 보면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로새 교회의 성도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 모두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벗어버려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모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원죄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구원 받기 전에는 죄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주님을 통하여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성도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모를 때에는 본성에 충실하게 됩니다. 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놀고 싶으면 놀고, 정욕이 동하면 행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왜 잘못인지, 내가 갖고 싶으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에 오염된 상태에서는 올바른 이성과 판단력과 도덕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또 버려야 할 것은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과 옛사람과 그 행위”입니다. ‘분’은 마음속으로 화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밖으로 표출이 되면 ‘분노’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마음속으로 화를 품고 있어도 죄가 되고, 이 화가 밖으로 표출이 되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되는 동시에 더욱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악의’는 타인을 해치려고 하는 의도나 감정입니다. ‘훼방’은 본래 하나님께 대한 불경의 말을 의미했으나 여기에서는 타인에 대한 비방과 중상모략을 뜻합니다. ‘부끄러운 말’은 음란한 말 또는 비방의 말입니다.

  거짓말은 사실이나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악한 마귀의 속성입니다(요 8:44). 거짓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와해시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거짓은 탐심과 함께 악의 전형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계 21:8, 27). 거짓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무서운 죄의 형태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아무리 가벼운 거짓말이라도 삼가야 합니다. 사단은 가벼운 거짓말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더 큰 죄를 심어 놓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옛사람과 그 행위”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가지고 있는 5절과 8,9절에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모든 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행하면서도, 성도가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지되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도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을 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의 이 작은 잘못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자 하는 악한 마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가 되었지만 아직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악하고 추한 것들을 벗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는 말로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은 죄의 의문에 대하여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하여 다시 거듭난 신분입니다. 성도가 소유하게 된 이 신분을 ‘옷을 입는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 옷이란 입은 사람의 신분과 인격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다는 이 표현은 악인에서 선인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된 성도의 신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우리 성도들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 곧 이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라 하나님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재창조 된 사람을 말합니다.

  ‘재창조’라는 말의 의미를 알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감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가 되었습니다(창 1:26). 그러나 아담은 죄로 말미암아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구속하시고 자기 형상으로 성도들을 새롭게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재창조는 처음 창조처럼 상실의 위험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재창조에 의해 새롭게 된 피조물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존재로 지으심을 입은 영광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가리켜 ‘성도(聖徒)’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심’은 단 한번만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인 갱신을 말합니다. 새 사람은 확실한 존재이지만 아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성을 향해 항상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발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할 때에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새 사람을 입었다 할지라도 옛 본성이 성도 안에서 그대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갈등과 번민 속에 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옛 품성과 행위들에서 과감하게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 창고에 자신의 재물을 쌓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마 6;33; 눅 12:15-21) 이 땅에서의 삶도 천국의 영화로움을 바라보며 고난 가운데서도 천국 시민으로 적합한 의로움을 잃지 않는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내 편한 대로의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거나 반대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도 안 됩니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주님을 찾고 간구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옛사람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노력하고, 오직 위엣 것을 사모하며 고통을 참고이기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모든 환난과 역경 속에서 반드시 구하시고, 좋은 것으로 반드시 채워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후회가 줄어드는 삶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절망 속에서 후회만이 있는 삶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손 꼭 붙잡고 땅엣 것을 죽이며, 위엣 것을 바라보는 삶 속에서 위로 받는 평강의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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