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란 결코 없는 존재 열왕기상19:1-14
성공을 위해서는 집념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목표를 정한 후에 해당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에 대한 목표 설정은 어릴 때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 대학교에 진학 한 후에도 자신의 삶의 목표를 갖지 못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40대 혹은 50대에야 비로소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향을 찾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미래를 어떤 분야를 선택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 맞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양궁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솜씨를 인정을 받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합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한 어린아이가 양궁중계방송을 본 후에 ‘나도 양궁선수가 되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거야!’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면 양궁선수가 되기 위한 기본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체력도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시력도 좋아야 하고, 판단력과 집중력도 좋아야 합니다. 어떤 운동선수든지 체력은 기본입니다. 하다못해 바둑기사나 게이머나 체력이 약하면 경기의 후반에 가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상대방에 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종목과는 관련이 없는 달리기, 역기 들기 등 여러 운동을 하여 온 몸의 균형을 맞추는 동시에 체력을 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어떤 목표를 가지게 되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수학을 못하면 안 될 것입니다. 무용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음식 조절을 하지 못해서 비만이 왔다면 안 될 것입니다. 즉 기초를 만들어 놓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잊지 않고 매진할 때에 성공을 쟁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표는 거창하게 세웠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목표가 허황된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고 있지만 성공하는 사람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게 세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목표를 잘못 설정한 경우입니다. 둘째는 목표 달성에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목표 달성에 필요 없는 요소들 때문에 방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도록 성도를 이끌어주시지만, 악한 마귀는 성도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과 목표를 설정하게 하면서, 필요한 기초는 갖추지 않아도 되며, 편법을 동원하여도 성공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을 버리고, 도리어 성공을 가로막는 것들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만, 그에 반하여 역행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바로 악한 마귀 사단의 세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목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반면에 악한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목표를 방해하기 위한 목표를 목표로 삼아 그 또한 하나님을 배신한 후로부터 지금까지 온갖 쉬지 않고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마귀의 목표는 모든 사람을 지옥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성도가 잘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선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필요한 요건들을 갖추기 위해서 열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패하고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번 성공했다고 또 다른 일을 했을 때에 또 성공한다는 보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는 반복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열매를 맺었지만 또 슬픔과 좌절의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악한 유혹에 빠질 때도 있고, 잘못된 판단에 실패를 겪는 경우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잘 될 것 같지만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오는 경우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려고 작심을 하고 책을 펴들었지만 이내 다른 생각이 내 머리를 점령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지만, 한 순간 다른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유혹이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달려가고 있을 때에 그 목표를 벗어나도록 만드는 유혹들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 존재에게 의지하려고 합니다. 즉 내가 연약할 때에 붙들어 주실 수 있는 존재, 내가 당하는 유혹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존재, 우리가 의지하여야만 하는 그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신 여호와이십니다.
그러나 일부 성도에게나 혹은 불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목표를 벗어나게 하는 유혹이 찾아 왔을 때에 그 유혹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빠져 들어가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큰 방해가 되어 목표를 잃어버릴 수 있는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마귀는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도 다 그랬어.’ ‘그런 것도 하면서 사는 거야.’ 이렇게 달콤한 유혹으로 속삭입니다. 또 이러한 작전이 통하지 않게 되면 다른 사람을 통하여 협박을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무서운 기세로 악한 원수는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와 방법을 다 동원하고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는 엘리야에게 어떤 술수를 부려서 절망 속에 빠지도록 했을까요? 그리고 엘리야는 어떻게 그 절망 속에서 일어나 다시 성공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었을까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모두 850명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 승리는 악한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엘리야에게 불로 응답하시고 승리의 역사를 나타내신 것은, 북이스라엘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이 헛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과,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대신들과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시는 역사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그들을 모두 죽이는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무릎을 꿇고 또 다시 기도할 때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던 땅에 비를 내리는 응답을 받는 크고도 놀라운 성공을 이루어내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나라를 건설하는 목표를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엘리야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내 놓았습니다. 그래서 무려 3년 반 동안 긴 가뭄과 도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우상의 선지자들과 우상 숭배에 빠진 왕과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담대하게 증거 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을 때에 그 수많은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어찌 사랑하지 않으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성공의 보장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후에 이스라엘 내에 우상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원수 마귀는 이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어도 그들의 신이 응답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있는 이세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또 다른 술수를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내가 내일 이맘때에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즉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자신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까 두려워하여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의아하지 않습니까? 그 큰 능력을 가진 엘리야가 도망을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복은 14장에서 물위를 걸어간 베드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캄캄한 한 밤 중입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작은 배는 풍랑에 휩쓸려 파선이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 제자들이 있는 배 앞으로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유령’이라고 하며 무서워 외치자,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주님께서 “오라”하시니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로 걸어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그만 물속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고개를 돌려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보았을까요 ? 그리고 그 바람이 왜 갑자기 그렇게 두렵게 느껴졌을까요?
바로 이것이 엘리야와 베드로의 공통점입니다. 엘리야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명을 위협하는 이세벨의 협박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오라 하실 때에 자신을 물 위로 걷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잊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인간의 연약함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의 승리를 한 엘리야에게도 또 베드로에게도 절대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굶주리실 때에 나타나서 3번씩이나 시험을 한 마귀는 그 뒤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서, 그리고 또 제사장과 헤롯 당원을 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하여 마침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주님께서는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악한 원수 마귀에 대한 주님의 승리입니다.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실의에 빠져 도망가 버린 엘리야를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요? 엘리야는 도망을 가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광야의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여호와의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만 하면 제 할 일을 다 한 것 같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이만 하면 오래 산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이 말은 나는 선조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못난 놈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비탄에 빠져 있는 것은 우상숭배 척결이라는 큰 사명감으로 아합 앞에 나서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이스라엘에 우상숭배 척결을 이루지 못하고 이세벨의 위협에 쫓겨 피신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허탈감과 심한 좌절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시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주셔서 엘리야의 허기를 채우시며 체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할렐루야! 엘리야가 먹고 다시 누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한 후 음식을 먹지 못하고 육체가 매우 치져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또 다시 음식을 가져와서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엘리야의 갈 길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의 목적지는 로뎀 나무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지만 더 이상 갈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무려 40일 동안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고, 한 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서 거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의 성공으로 음식을 먹지 않고도 아합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리는 모습과 지금은 현저하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실패로 인해 좌절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에서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왜 호렙산에 오게 되었는지 까닭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시 엘리야에게 소명 의식을 일깨우는 질문입니다. 다시 사명을 기억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악한 원수 마귀의 협박에 두려워 심한 무력감과 실의와 허탈감에 빠져서 하나님과 한 마디도 상의하지 않고 이스르엘을 떠나 호렙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우상숭배에 넘어갔지만 나는 홀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증거 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세벨과 같은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고 이렇게 도망하게 되었습니까? 이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도망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도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세벨도 엘리야의 행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엘리야와 함께 하시어 그를 보호하시며 능력을 주시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인다고 공갈을 했습니다. 이는 악한 자들의 허세입니다. 그 허세에 속아서 도망을 하는 것이 어찌 변병이 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했다는 변명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세벨과 그의 추종들과 싸움을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작은 성공을 거둔 뒤에 예상하지 못했던 암초를 만나 실의와 좌절에 빠지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입니다. 그동안 함께 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시련들을 두려워하고 피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맞서 싸워 이겨내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산에 서 있게 하셨습니다. 그 앞으로 여호와께서 지나가실 때에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적인 바람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지진 후에 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불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은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 특별한 표징들이지만,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런 외적인 현상이나 방법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을까요? 이는 엘리야의 생각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적을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에서 우상을 척결할 수 있고,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는 이적을 행하고도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심한 좌절과 무력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외적인 이적이나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의 불과 같은 이적으로 우상숭배자들을 한꺼번에 몰살을 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은 한 사람이도 그들이 회개하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처지와 형편에 처해 있습니까? 내가 잘 될 때에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가도 조금 어려워지면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고, 스스로 절망과 좌절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는 없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달려가는 길에 찾아오는 온갖 위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혹시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말씀을 붙잡는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의 모습을 통하여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끈질기게 찾아오는 마귀입니다. 내가 목표를 잃어버리도록 결코 포기하지 않고 유혹하는 사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역시 우리를 결코 포기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속에서 힘을 얻으라고 하십니다. 모든 문제를 말씀 속에서 찾으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마귀의 세력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응답, 이적, 기적으로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없기에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선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성공과 승리를 거두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자녀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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