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 쉬운 성경 말씀

우리도 소경인가?

chukang 2011. 7. 24. 09:55

우리도 소경인가?  요한복음 9:35-41

 

  질병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병(창 20:17,18)도 있고, 마귀가 주는 병도 있습니다(욥 2:1-10). 그리고 일반적인 병은 자연적인 요인이나 본인의 부주의로 인해 생기는 병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병일 경우에도 마귀가 주는 병으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영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라면, 사리분별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통한 행위가 따라오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질병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으로 좋지 않을 때에는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구분도 역시 하지 못하게 되고, 절제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질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더위가 한창이라서 텔레비전을 보면 아이들이나 혹은 연인들끼리 옷을 입은 채로 분수에 뛰어들어 흠뻑 젖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재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사람은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뛰어드는 사람은 절제를 하지 못하거나, 혹은 강한 유혹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비를 매우 좋아해서 비가 오면 우산을 쓰지도 않고 그냥 맞으며 길을 걷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이라 보고 이런 모습 속에서 젊음을 찾고, 낭만을 찾으며, 우수를 찾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감정이 매우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를 맞고 나면 어떻게 되나요? 건강한 사람도 몸이 춥게 되고, 몸살이나 감기가 들 것입니다. 즉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결과 질병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부주의나 자연적인 질병이 아닌 마귀의 영향을 받아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에 마침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하고 여쭈어보았습니다. 이 질문 속에서 당시 유대인들이 병든 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질병은 죄를 지어서 걸린 것이거나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불치병으로 분류되는 문둥병, 소경, 귀머거리, 혈루병 같은 것들은 더욱 그렇게 생각을 하고 정죄까지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한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 당사자 외에 부모가 혹은 자식이 그 죄를 담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겔 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처럼 질병도 역시 다른 사람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도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의 혜택을 누리듯이, 뜻밖의 재난이나 질병도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의 경우에는 신앙의 연단을 통하여 정금과 같이(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만드시고자 할 경우에 질병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질병을 내리셔서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셨을까요? 3절을 보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추측한 소경된 자의 두 가지 원인 즉 본인의 죄거나 혹은 그 부모의 죄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혀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질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요 5:14에서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죄의 결과’로 생기는 질병도 있다(고전 11:30)고 하셨습니다.

 

2. 주님의 치유

  주님께서는 소경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한 약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벌레에 물렸을 때에 혹은 기타 간지럽거나 따가울 때에 침을 바르는 것처럼, 눈병이 낫을 경우 침을 발라 치유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치유의 능력이 없어서 일반인들과 같은 행위를 하였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소경들을 고치신 기사들을 보면(마 9:27-31; 12:22; 15:30; 막 10:46-52) 침을 발라서 고친 경우가 드물고 또한 말씀으로도 무슨 병이든 고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바른 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소경의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아니면 원시적인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소경이 예수님의 명령을 좇아 행할 것인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소경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발라 준 후에 실로암{실로암이라는 말은 ‘쉴로하’(보냄을 받았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 남쪽 입구에 위치했는데 히스기야 왕 시절에 만든 것입니다.} 못으로 보내서 씻도록 하셨습니다. 소경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를 시험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은 실로암으로 갔습니다.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소경이 씻은 것은 눈만이 아니라 온 몸을 다 씻었습니다. 이는 소경이 얼마나 눈뜨기를 소망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하며,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 소경에게 하신 일은 허무맹랑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과는 완전하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순종 속에서 말씀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소경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할 때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성경 말씀을 받을 때에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지켜야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 생활이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게 됩니다. 즉 내 생활, 내 생각, 주위 환경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있는 것입니다. 내 필요에 따라 행하는 신앙인 현대인의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게 됩니다. 그래야만 할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는 그래도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멀리하며 세상적인 방식에 더욱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도 병을 고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바로 소경의 신앙인 것처럼, 우리도 역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완전한 해결을 받을 수 없다는 신앙의 모습으로 내 생각, 세상 방식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3. 소경이 고침을 받은 후의 반응들

  소경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씻고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목욕도 했습니다.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고 다소 깔끔해진 모습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저 사람 저쪽 길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잖아. 아닌가? 비슷한데.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이웃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뜨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면서도 의심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세상적 지식으로 판단하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보면서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치유 받은 소경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소경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할렐루야!

  이웃 사람들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바리새인들에로 데리고 갔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보게 된 연유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대답은 동일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도 두 패로 갈라집니다. 한 부류는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닐 것이다. 또 한 부류는 죄인이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로서부터 온 자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소경되었던 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소경되었던 자의 부모를 불러서 또 물었습니다. 분명히 소경으로 태어났던 아들이 맞느냐?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볼 수 있게 되었느냐? 이처럼 세상적인 지식과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보고도 믿지 못하고, 명확한 대답을 들어도 불신하고, 또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분명하게 자신들의 아들이며, 그 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치유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시키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실로암으로 보내 씻게 한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에게 그가 누구였는지를 물어 보라고 합니다. 이는 또 다른 현대인의 한 가지의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자신이 종교를 밝히지 못하는 참으로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입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한 번 더 소경되었던 자에 물었습니다. 묻기 전에 거짓말을 할 것을 은근히 유도하며 협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그러니까 죄인에게서 병 고침을 받았다면 너도 죄인이라 마찬가지라고 하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하는 요구입니다.

  소경 되었던 자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가 죄인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소경이었던 내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저들은 또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느냐 되묻고 있습니다. 도무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질문을 하는 것을 듣는 소경된 자는 오히려 반문을 합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이에 대하여 그들은 화를 내면서 ‘너는 그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이렇게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우리는 그 율법을 믿지만, 그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경은 할 말은 다 합니다. 무식한 줄 알았더니 대답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자신을 고쳐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않습니까? “창세부터 지금까지 소경된 자가 눈을 뜬 경우가 없었는데,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눈을 뜨게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소경되었던 자는 분명한 깨달음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소경되었던 자에게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면서 내 쫓았습니다. 그들은 그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주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던 불신앙의 무리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되었던 자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있던 일들에 대하여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경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소경은 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누구인지를 도리어 물으면서,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주면 내가 믿겠다고 말합니다. “내가 바로 그로다.” 그는 즉시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을 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믿는 소경의 믿음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을 동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 지식에 비추어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깨끗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4. 영적 소경에 대한 경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에는 한 개인이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다는 의미 즉 주님의 치유 사역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경이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눈을 멀거니 뜨고서도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은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소경들을 향하여 하시는 주님의 경고는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함이라.”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들이 바로 영적인 소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주위에 있던 바리새인은 ‘우리도 소경인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소경이 아니면 누가 소경이겠습니까? 말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성도는 참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소경이 되었던 자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세상적인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지식이 도리어 주님에 대하여는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소경이 될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주님에 대하여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하여 깨달음이 올 것이며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게 되면 우리도 역시 주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경은 율법은 몰랐지만,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의 그 사랑의 행위를 체험적으로 알고 조금도 의심치 않고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고 믿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성경 말씀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많이 알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세상 지식과 편견과 개인의 처지와 입장이라고 하는 것으로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게 될 때에 소경에 일어난 것과 같은 놀라운 은혜의 역사 우리에게도 임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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