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18장 강해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예고

chukang 2011. 6. 17. 17:01

 

창세기 제18장 강해 -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예고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15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은 천사로 오신 하나님과 다른 두 천사를 잘 대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라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시고, 사라는 자신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하여 웃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웃음을 들으신 내용입니다. 16-33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대한 고지를 하시고, 아브라함은 이에 대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문에 앉았다가

  아브라함이 장막을 친 곳은 아모리 사람 ‘마므레’라는 사람이 소유한 상수리 숲입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작별한 후 줄곧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후사와 기업에 관한 언약을 받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정 즈음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때는 점심 식사 때나 혹은 식사 후 휴식을 취할 때입니다. 대개는 뜨거운 햇볕을 피해 장막문 앞에 더위를 식히는 것이 관례라고 합니다.

 

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나머지 둘은 천사로 봅니다.(19:1; 히 13:2)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현현하시는 이유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 풍습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관례 이상으로 적극적인 환대의 표시로 몸을 땅에 굽힐 정도의 예의를 보이며 나그네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타난 3사람이 보통의 나그네가 아니며 그 중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달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아브라함은 나그네에게 “주(아도나이:אדני)”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엎드렸던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며, 또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하여 겸손하게 여쭙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표현은 겸허한 자세로 간청하는 관용적 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과 천사들에게 그냥 가지 마시고 유숙하기를 간청하였습니다.

 

4,5: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 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나그네를 대접하는 방법 중 발을 씻도록 물을 가져다주는 것은 당시의 정중한 예법입니다. 고대에는 대개 샌들을 착용하였으며, 발이 가장 먼저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집 주인이 제일 먼저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입니다.(19:2; 24:32; 43:24; 눅 7:44). ‘쉬소서(솨안:שׁען)’라는 말은 ‘기대다, 팔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팔에 기대어 비스듬히 눕는 것은 팔레스틴 사람들의 일반적 식사 관습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쉬라는 의미만 아니라 식사를 즐기며 휴식을 취하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쾌활케’라는 말은 원기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고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지친 심신을 편히 쉬게 하라는 뜻입니다.

 

6-8: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접대하는 내용입니다. ‘스아(세아:סאה)’는 곡물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로 한 스아는 7.33ℓ(4되)입니다. 이는 에바의 1/3에 해당합니다.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급히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누룩 없는 떡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떡은 화덕이나 불에 달구어진 뜨거운 돌 위에 놓고 구웠다고 합니다. 뻐터는 오늘날과 같이 우유에서 지방 성분을 추출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응고된 우유, 즉 엉긴 적(삿 5:25; 욥 20:17)를 가리킵니다. ‘진설’은 음식을 마련하여 상에 베푼다는 뜻입니다. ‘모셔 서매’ 이는 ‘그가 모셔 섰다.’라는 말입니다. 나그네에게 식사를 배설한 아브라함이 곁에서 시중들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손님과 함께 식탁을 받지 않고 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은 고대 근동인의 손님 접대법 중 최고의 예법이라고 합니다. 주님과 두 천사는 식사를 했습니다. 주님과 두 천사는 본래 ‘영(靈)’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지만, 이때는 사람으로 현현하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주님과 두 천사의 현현이 단순한 환상이 아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비로소 나그네들의 방문 목적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또 고대 동양인의 관습상 남의 아내를 호명하는 결례를 무시하고 사라를 찾는 것만 보아도 이들이 보통 나그네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내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문에서 들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즉 이삭을 낳을 시기에 다시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랜 기간을 아브라함에게 기다리게 하셨지만, 그의 고민인 후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라는 장막 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11,12: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경수’는 여자로서 항상 있는 것으로 월경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 사라가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노쇠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는 사라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주님의 언약에 회의를 갖게 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웃었습니다. 이미 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신다고 하니 우습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사라는 자연적인 흐름에 따라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상징인 경수마저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자조적인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사람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바로 그 때가 또 다른 시발점입니다. 그 시발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하는 출발점인 것입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불신앙적인 생각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사라나 인간의 편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연의 섭리와 질서를 거스리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주만물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여자로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라가 자신의 육체의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불신앙적인 태도를 불식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때에 반드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15: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으니라.

  사라는 자신에 관한 대화를 몰래 엿듣던 중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심을 깨닫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네가 웃었으니라.’고 거짓말을 일축하셨습니다. 사라는 침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은 시인의 표시입니다. 물론 사라는 나중에 잉태하게 되고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들을 주신다는 언약의 확증을 심으시고 이제 소돔을 심판하기 위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두 천사를 배웅하기 위하여 일정한 거리까지 따라 나섰습니다.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께서 소돔 성의 심판의 비밀에 대하여 알려주시는 것은 첫째, 언약(12:1-3; 15장)을 재확인하여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해서 이 땅의 온전한 역사를 펼쳐갈 것임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도, 즉 여호와의 신앙을 달려 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을 받고 참된 번영을 이루는 것임을 소돔의 멸망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셋째, 여호와의 거룩한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죄악을 도말(塗抹)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이 되는 것은 친히 택한 백성을 통해 실현하시지만, 그 첫 단계는 죄악을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라고 하는 것 위에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죄까지 회개하고 제거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며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번성하게 하는 이유는 천하 만민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임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여호와 한 분만을 올바로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삶 즉 여호와의 도를 지켜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택함을 받은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극도에 다달았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범죄 도시의 대표적 유형으로 취급이 됩니다(계 11:8). 영어로 “소도마이트(Sodomite)"가 ‘남색자’(게이)란 의미를 갖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아마도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를 배웅하기 위하여 같이 간 곳은 사해 부근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해 근방에 위치한 소돔과 고모라로 내려가고자 하시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자 하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죄악이 가득 차 죄악이 절정에 달했는지의 여부일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악행이 절정에 이르기까지 심판을 미루시는 이유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벧후 3:9). 하나님께서는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죄악상을 다 알고 계시지만, 직접 내려가서 한 번 더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고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죄인이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22,2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떠난 그 사람들은 두 천사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여호와 앞에 계속 머물러 서 있는 상황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구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구원을 베푸시고 악인에게는 형벌을 내리시는 분이심을 잘 알기 때문에, 혹시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지 모르는 의인을 언급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24,25: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 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 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악인에게 형벌을, 의인에게 구원과 상을 베푸시는 것을 ‘공의’라고 합니다. 이런 공의의 하나님께서 악인과 의인을 똑같이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공의를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든지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한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 오십 명’을 언급한 것은 단지 그 오십 의인만이 구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하는 내용의 요점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의인 오십을 찾게 되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공의 앞에서는 마땅히 멸망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속의 원리와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공의로 죄를 도말하기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것이며, 또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요일 4:10).

 

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가리켜 ‘티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철저히 부정하는 최대의 겸손의 표시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절대 지존자이신 하나님의 긍휼에 의하여 택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음을 감사하면서, 계속하여 아브라함과 자신과 같은 존재인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28-32: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일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친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50인에서 45인으로, 40인으로, 30인으로, 20인으로, 마지막에는 10인만이 있더라도 구원해 주십사고 하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마음을 잘 알기에 의인 10인을 위해서도 멸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까지도 죄인들을 위해 간구하셨습니다(눅 23:34).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인 지혜나 도덕에 의해 흥망성쇠를 결정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곧 성도들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 것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일단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아브람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떠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기도가 끝났기 때문에 즉시 그 자리에서 떠나셨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기도의 모습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