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창세기 제17장 강해 - 할례언약

chukang 2011. 6. 9. 16:23

 

창세기 제17장 강해 - 할례 언약

 

 

  이스마엘이 출생한 후 13년 뒤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할례를 명하시고, 아들에 대한 약속을 주심으로써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할례를 행함으로 할례 언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할례언약은 횃불언약의 재확인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례언약이 주어진 시기는 아브람이 소명을 받은 지 24년 후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으로서 이는 오랜 세월의 인내 뒤에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언약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1년 뒤에 있을 이삭의 초자연적 출생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고하심에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른 구속사 전개의 일환임을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횃불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었지만, 할례언약은 인간의 응답으로 필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1: 아브람의 구십 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가나안으로 이주한 지 24년이며,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13년째 되는 해입니다. 13년 동안 아브람의 행적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엘 솨다이:אל שׁדי)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무한하시고 절대적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여호와’와 구별이 되고, 자연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로힘’과도 구별이 되는 명칭입니다. 이 호칭은 99세나 된 아브라함이 후사에 대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계시하신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이 말은 비겁하게 내 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에서 당당한 걸음으로 행하라는 뜻입니다. 즉 경건과 근신의 요청인 동시에 오직 믿음으로 일관하라는 신앙에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바로 행하는 자만이 세속의 유혹을 극복하고 참 경건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약 1:27). ‘완전하라’는 말은 도덕적 순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하갈을 취한 일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자는 그 분의 거룩하심과 같이 내 자신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마 5:8; 요일 3:3)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이 언약은 새로운 언약이 아니라 이미 세운 후사에 대한 그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후사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 태어날 아이가 후사임을 암시합니다.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이 말씀은 앞에서도 3번이나 언급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시점에서(12:2), 조카 롯과 작별한 이후(13:16), 메소보다미아 동맹국들의 침공을 물리친 후 후사 문제로 근심할 때(15:5)입니다. 이스마엘 출생 후 13년 만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과거의 이 언약을 반복하시는 것은 과거의 언약이 이스마엘의 출생과는 무관하며 또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에 대한 예비적 선포라고 하겠습니다.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자신의 잘못에 대한 회개와 아울러 존귀하신 절대자 앞에 경배의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가득 찬 인간은 누구나 절대지존자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날 자녀들이 무수하게 많을 것임을 다시 한 번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육적인 자손이 야곱의 12아들을 통하여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또 이스마엘의 12아들을 통하여서도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영적인 아브라함의 아들인 믿는 성도들이 무수히 많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갈 3:7)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며 아브라함은 ‘열국(列國)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의 개명은 장차 무수한 후손들로 인해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보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성취되어질 인류 구원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과 관련하여 그 성취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꾸기도 했습니다(32:27,28). 오늘날 새 언약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 성도‘로 불립니다. 이는 이름만 개명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 그 영원한 미래가 완전히 바뀐 영화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무수한 번성에 대한 약속이며, 여러 나라의 왕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서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위대했던 족장이나 왕국 시대의 유다, 이스라엘 왕과 주변 중근동 지역의 고대 왕이나 중근세사의 사라센 왕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이면에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언약은 아브라함은 물론이요 그 후손까지도 대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언약의 파기가 없다는 변함없는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거입니다(행 2:29).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지금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우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직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 후손들은 앞으로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앞으로 ‘영원한 기업’이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천국을 차지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알려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반드시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는 할례의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육체적인 할례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거짓으로 할례를 받을 수도 있고, 처음에는 진실한 마음으로 할례를 받았다가도 변절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의 할례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10,11: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陽皮)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양피를 베는 것은 남성의 성기 끝부분을 제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구별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이는 자신을 죄로부터 정결케 하여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산다는 의미도 포함이 됩니다. 또한 이전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한 새 피조물로 살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는 육체적 행위 자체보다 그 상징적인 의미,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율법을 좇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에 더 비중이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신실한 일꾼들은 할례를 육신이 아닌 마음에 할 것을 가르쳤습니다(신 10:16; 렘 4:4; 겔 44:7; 롬 2:29). 그렇기 때문에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할례는 남자에게만 행해졌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대부분의 의식이 남자 성인만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선민의 대열에서 제외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성은 두 성(Gender)을 대표하는 남성에게 복속되어 하나님께 함께 나아갔을 뿐입니다(2:21-24). 바로 그런 맥락에서 할례의 상징적 의미가 여성에게까지 적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식솔들은 이방인도 예외 없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장차 신약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이방인들도 언약의 백성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참예할 수 있다는 복음의 개방성과 포괄성을 뜻합니다(갈 3:14). 할례는 생후 8일 만에 시행이 되는데, 그 이유는 첫째 신체적으로는 적어도 8일이 되어야 육체적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하며, 둘째는 의식적으로는 모든 피조물은 태어난 지 1주일 동안은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레위 22:27). 셋째 영적으로 8일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로 새로운 1주간의 첫 날로 시작과 소생, 곧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하나님의 언약의 징표인 할례가 몸에 흔적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할례도 마음의 할례를 수반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돌 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도 마음 판에 새기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신 6:6: 렘 31:33).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백성 중에 끊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징계로 죽음을 당한다는 의미로도(출 31:14; 레위 17:4, 민 15:30) 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추방된다는 의미(출 12:19; 레위 7:20,21; 민 19:13)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언약의 백성이 누리는 모든 특권이 박탈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체결된 언약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은 인간의 구원과 생존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인간은 그 언약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그 언약을 등하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언약을 파기하고 배반하는 죄악으로 간주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래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列王)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의 후사가 사래를 통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사래 역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하여 ‘여주인’, ‘나의 공주’라는 이름의 ‘사래’ 대신에 ‘열국의 어미’라는 뜻의 ‘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새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대한 보증입니다. 사래가 한 가정의 여주인으로서의 지위에 국한 된 것이라면 ‘사라’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통해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예시하는 예언적 성격까지 함축하고 있으며, 또 그를 통해 많은 영적 자녀의 어미가 되는 영광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의 모습은 불신과 의심의 웃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기쁨과 환희의 웃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칼빈은 이를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접하여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웃는 웃음이라고 주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으니라.”(요 8:56)고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였다.’(롬 4:19)고 표현한 것을 볼 때에 기쁨과 환희의 웃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입니다. 이렇게 나이를 밝히는 것은 1차적으로는 자연 질서 내지 상식으로는 도저히 임심이 불가능한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2차적으로는 이 불가능한 상태를 믿음으로 극복하려는 그의 거룩한 열정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입니다(롬 4:19). 믿음은 자연 질서와 이성을 능히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약속의 아들 외에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에 참여할 것을 기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은 90세 된 사라를 통해 후사를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신뢰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둘째, 단순히 이스마엘과 후손을 통해 주의 언약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과 본질 전후의 분위기를 살펴볼 때에 모두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도 사라를 통해 후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었다는 바울의 증을 통대로 할 때, 이스마엘까지도 하나님의 은총 속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기도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라는 것에서 아브라함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니라’라는 단어는 “아발(אבל)로 ‘진실로’, ‘참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녕’이라는 단어는 반복되는 언약에 대한 재확인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 절은 아브라함의 회의에 대한 하나님의 반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감사와 놀라움에 대한 언약의 재확인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츠학:יצחק)’이라는 단어는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놀라움과 기쁨의 웃음을 웃는 아브라함의 신실한 믿음을 기념하기 위해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20: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이스마엘’이라는 뜻이 ‘하나님이 들으심’인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말을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하나니은 아브라함의 현실을 깊은 이해하시고 그의 거룩한 탄식을 경청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 대한 문제를 크게 번성케 하는 것으로 해결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후사에 대한 언약 성취는 앞으로 1년 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막연하고 더딘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때를 모를지라도 성도는 항상 믿음으로 기도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떠나 올라가다.’는 원어 “알라(עלה)”는 수직 이동이라는 의미 외에, 본디 모습으로 회복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천상 세계로의 이동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해 친히 현현하셨던 모습으로 벗고 본래의 영적인 존재로(요 4:24) 되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올라가신 뒤에 아브라함은 즉시 할례를 시행하였습니다.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종들이 결혼하여 낳아 기른 모든 아들들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구원의 복음이 신약 뿐 아니라 구속 역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시대에서부터 이미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보편적으로 적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25: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 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 세이었더라.

  앞에서는 자신을 100세라고 했는데(17), 여기에서는 99세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앞에서는 이제 곧 100세가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의 후손인 아랍인들은 대개 13세에 할례를 하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26,27: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아브라함도 역시 할례를 받았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신속하게 완수하였습니다. 할례라고 하는 신앙의 증표를 삼는 일에 믿음으로 신앙의 열의를 보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는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순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삼상 1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