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6장 강해 - 하갈과 이스마엘의 출생
아브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출생에 대한 약속을 몇 번이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믿음이 부족하였던 부인 사래로부터 충동을 받아 사래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람도 아직 구속사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육적인 후손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고대 세계에서 자녀 특히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로 여겼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징계로까지 간주되었습니다(20:17,18). 더욱이 후사에 대한 언약이 몇 차례에 걸쳐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자녀를 얻지 못하는 것은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큰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녀 문제에 대한 아브람의 근심과 잘못 선택한 해결 방법은 아브람의 가정에 큰 우환을 가져다주었으며, 또한 아브람의 신앙에도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급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면 누구나 이 같은 실수를 범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택한 시기와 방법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래의 여종 중에 ‘하갈’이 있습니다. 이 여종은 애굽 사람입니다. 하갈은 아브람이 가나안 기근 시에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사래를 바로에게 주기로 하고 바로로부터 받은 재물과 함께 받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은 ‘도망하다’는 뜻입니다.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생산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은 ‘생산(태)을 닫아두셨으니’라는 말입니다. 사래가 자신의 불임 원인을 순전히 하나님께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래는 자신을 불임케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거나, 언약하신 대로 자신의 태를 열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신앙적 방법보다는 스스로 그 약속된 바를 성취하려고 하는 인간적 방법을 취함으로써 마침내 가정적, 민족적 비극의 화근을 만들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래는 결국 아브람에게 자신의 여종과 동침할 것을 아브람에게 권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신 말씀이 부인인 ‘사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인들도 포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결국 아내의 권고로 하갈을 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아브람이 언약의 성취에 대한 방법에 대한 고려는 배제한 채 단순히 언약 성취의 목적에만 집착하였을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사래가 여종을 남편에게 권한 것은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태어난 이스마엘로 인해 멸시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인내로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자행자지((自行自止)한 인간적인 판단과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은 누구나 범하기 쉽습니다. 인내하며 겸손히 주님의 뜻을 기다릴 줄 아는 자가 온전한 신앙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얻는다는 말은 ‘세운다’는 뜻입니다. 사래가 하갈이 낳은 아이로 인해 계속해서 집안을 세워나갈 수 있기를 갈망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 관습으로는 첩이 낳은 아이도 본부인의 자녀로 간주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축첩 제도는 성경의 결혼 원리인 일부일처제도(2:24; 막 10:5-9)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족장 시대에 일부다처제가 유행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를 적극적인 측면에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 정해지기 전에 제한적으로 묵허(黙許)하신 것일 뿐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의 권고를 거부의사가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역시 아브람도 사래와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아브람이 하갈을 첩으로 취할 때의 나이가 85세라는 말입니다(12:4). 이때 사래의 나이는 75세입니다(17:17). 따라서 아브람은 후사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있은 후 10년 동안 언약의 성취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은 이로부터도 15년이 지난 후가 됩니다(21:5). 이런 기간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엄청난 오랜 시간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오래 공백 기간을 통하여 인간이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훈련을 쌓게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당시 여인의 불임은 매우 치욕적인 일이요(30:1,23; 레위 20:20), 많은 자녀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복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시 127:3). 하갈은 자신의 신분(종)을 생각지 못하고 여주인을 멸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이는 훗날 브닌나가 무자한 한나를 멸시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삼상 1:6). 이는 없는 자가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자기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기 좋아하는 교만하고 간교한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잠 29:21)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는 자신이 받는 멸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먹고서도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기억나게 합니다.(3:12,13). 사래는 자신의 잘못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잘잘못을 가리자고 요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호를 함부로 부르는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이런 잘못을 범하는 것은 하갈을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분한 마음으로 성급하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급하게 분노를 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교훈을 받게 됩니다(약 1:20).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아브람은 사래에게 하갈의 본래 신분이 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책임을 면하고자 하는 아브람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아브람의 말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여 가정의 화평을 도모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지만,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언약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그 책임을 더욱 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일들은 그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고통과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도 역시 자신의 불신앙과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범하는 대부분의 잘못은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살펴보거나 인내하며 다스리지 못하는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실수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갈은 도피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런 사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를 통한 언약의 후손을 주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7,8: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견해는 천사, 여호와 하나님, 성령, 예수 그리스도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경배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단순히 부림을 받는 영으로 피조(被造) 된 천사(히 1:14)와는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성부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죄인은 하나님을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출 19:21-24). 사자를 가리키는 말은 ‘말라크(מלאך)’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성부 하나님 자신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불가시적인 성령이 이난으로 현현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분으로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며, 신약과 구약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모든 구속사에 간여하셨습니다(48:16; 출 14:19; 수 5:13-15). 이렇게 볼 때 하갈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에서 역하신 그리스도의 현현(Christophany)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의 샘‘ 유목민이나 대상(caravan)들이 즐겨 찾는 일종의 오아시스입니다. 이곳은 사람이나 가축이 목을 축이며 잠시 쉴 수 있는 간이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술 길 샘물‘ 여기서 술(Shur) 길은 팔레스틴 남서쪽에서 아라비아 광야 북서쪽으로 난 대상로입니다. 이 길은 애굽으로 통했으며 거기에는 대상들에게 널리 알려진 샘물이 있었습니다. 이로 보아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 듯합니다.
이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하갈의 행선지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행위를 한 번 더 돌이켜 보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 질문을 통하여 하갈이 사래에게 했던 행위를 돌이켜 보게 하며, 또 주인에게서 도망하는 것은 노예로서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며, 또 다시 우상과 죄의 상징인 애굽으로 향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깨닫게 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갈이 도망하는 그릇된 삶의 방향은 바로잡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하갈은 ‘나의 여주인’이 자신을 학대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는 자신이 사래를 멸시하던 때와 다른 모습입니다. 즉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진정한 종의 신분과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진 풍파는 때때로 자신이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이는 하갈이 여주인인 사래에게로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노예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호와의 사자가 어찌 하갈의 형편을 모르며, 또 사래의 잘못을 모르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에는 ‘원칙’이라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형편이나 인간적인 그 어떤 방법보다 우선 되는 원칙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비록 하갈의 아들에게서 생겨날 자손들이 언약의 후손은 아니었지만, 이들 역시 아브람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아브람의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신다는 주의 약속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은 12족속으로 번성이 되어 오늘날 아랍 족속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25:12-16).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먼저 이름이 고지(告知)된 첫 번째 사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신 만큼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것은 아마도 그 아이가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한 혈통을 있는 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탄식을 듣고 그에 대한 평안의 응답으로 주신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들으신 것처럼,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모든 백성들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들나귀’는 히브리 시에서 광야를 종횡 무진 누비며 매우 자유분방하게 사는 자를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욥 34:5-8; 사 32:14). 따라서 이면에는 매우 거칠고 난폭한 자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들나귀 같은 특성은 오늘날 중근동 지역의 각지에 흩어진 베드윈 족(The Bedouin)을 위시한 여러 아랍 계열 사람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끊임없이 이웃과 불화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후 모든 역사에서 가장 잔학하고 난폭한 방법으로 이웃 족속과 국가들을 유린하였습니다. ‘나 이외엔 모두 적’이라는 아랍인들의 공통된 인식은 이들의 침략 근성을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는 말은 동방은 실제적인 동쪽보다는 원어적인 의미를 좇아 ‘면전’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살고 있고, 또한 일정한 영역을 점유하고 살고 있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감찰 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은 ‘자신을 눈에 띄게 보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지켜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도 됩니다. 주인의 학대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하던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뒤 감사와 겸손의 자세로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방황과 고통에 처해 있는 하갈에게 나타나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여전히 황량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과 은혜의 복음으로 초대하시고 하늘나라의 무한한 복락과 소망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갈은 자신이 하나님을 뵙고도 어떻게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이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브엘라해로이는 ‘살아계셔서 감찰하시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방황하고 고통을 당하는 자신에게 찾아와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기념하기 위해 하갈이 그곳에 있던 우물에 붙인 이름입니다. 가데스는 이스라엘 남부 즉 신 광야 북쪽 끝에 위취하며, 베렛은 정확하지 않으나 가데스의 북서쪽으로 추정합니다.
15,16: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 세이었더라.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를 내어 다시 아브람의 집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아브람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이었지만 ‘육체를 따라 난’(갈 4:23) 육의 자손이었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자들 가운데도 언약의 백성이 아닌 육의 자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마 3:9). 결국 구원은 혈통적 유산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 내려진 은혜임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엡 2:8).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후사에 대한 언약이 11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의 나이에 대한 기록은 모두 아브람의 생애를 통해 중요한 신앙의 전환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11년 만에 언급된 것은 아브람의 신앙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키포인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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