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성령강림주일 -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chukang 2011. 6. 11. 06:31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요엘 2:28-32

 

  요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엘리사 선지자와 동시대로 열왕기 하 9-11장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주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여 당시 온갖 우상을 섬기며 악정을 일삼던 아합의 손자 요람 왕과 아직 살아있는 아합의 왕비 이세벨을 죽이게 했습니다. 남 유다의 왕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왕비로 맞이하였습니다. 여호람이 죽고 아하시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예후는 이스라엘의 왕과 또 함께 있던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죽였습니다.

  아하시야의 모후 아달랴는 때를 틈타 유다의 정권을 장악하고, 다윗의 후손들로 내려오는 왕손들을 모두 죽이는 과정에서, 아하시야 왕의 누이이며 당시 대제사장의 아내가 된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출해 내어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서 보호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우 어려운 시기이며, 이세벨의 딸 아달랴로 인해 유다 전체가 우상 숭배로 물들어 있을 당시였습니다. 이런 때에 갑작스럽게 메뚜기의 대재앙이 남 유다 땅을 휩쓸게 되었고, 그 결과 남 유다 전국토가 황폐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4을 보면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먹고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팟종이, 데뚜기, 늣, 황충’은 모두 메뚜기를 가리키는 단어들인데, 이처럼 메뚜기라는 한 곤충을 각기 다른 네 가지 명칭으로 반복 서술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메뚜기 재앙이 너무나 가공할만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중근동 지역에서 가끔씩 발생하여 큰 피해를 가져오는 메뚜기 대군(大群)은 주로 아프리카의 동북부 지역에서 발생하여 요르단,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는 이라크를 습격한다고 합니다. 그 후 초여름에서 초가을까지 이라크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피해를 끼치고 다시 9월이 되면 아프리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러한 메뚜기 떼에 의한 피해는 비단 농작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한재가 겹쳐 사태는 훨씬 더 심각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게 되었 고 이런 재앙이 자신들에게 임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요엘을 보내셔서 이 같은 재앙의 궁극적인 원인은 남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과 죄악에 있음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인 유다에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불신앙이 휩쓸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셨고, 나라가 평안하고 살기에 불편함이 없으면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에 메뚜기의 재앙과 한재를 내리셔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만들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재앙은 장차 임할 더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Day of the Lord)'의 심판의 전조이며 이 날이 임하기 전에 속히 회개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권면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재앙들이 우리에게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비만 조금 늦게 와도, 눈이 조금 많이 와도 아우성이지 않습니까? 작년에는 배추 농사가 망쳤다는 소식에 한 포기에 만원이 넘었던 것이, 올해는 700원으로 떨어지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재앙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작은 어려움에도 그토록 어려움은 토로하는데, 만일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재앙들이 온다면 어떻게 견디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작년에는 북한의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폭격 사건 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재앙들은 인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일어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뒤에는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한 하나님의 경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유다는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술에 젖어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술에 취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오히려 포도주를 얻지 못하는 것을 위하여 애곡하라고 말합니다. 이 재앙의 원인이 포도주에 취하여 방종한 그들의 죄악 된 생활에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포도 수확이 풍요와 하나님의 주신 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메뚜기 재앙으로 인하여 포도를 전혀 재배할 수 없게 되고, 포도즙을 음료로 마실 수 없게 된 현실은 분명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1:7)고 하였습니다. 메뚜기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껍질까지 모두 벗겨낸 후 부스러기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포의 재앙의 결과로 농작물이 온통 멸절되고 폐허가 되는 처참한 광경에 대한 묘사입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필수품들로 이스라엘의 경제적 형편을 상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자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와 무화가나무가 멸절되는 재앙은 유다 백성들에게 미칠 경제적인 곤고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죄를 짓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징계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서라도 우리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삶에 고난과 좌절이 오면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간과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합리화시키는데 급급하고, 더 나아가서는 미화시키기까지 하는 것이 바로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징계를 주시지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새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낼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는가? 그 원인을 찾아내어 제거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요엘이 선포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한 가지 더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 잘못을 숨기지 말고 자기 자녀에게 고하라는 것입니다(1:3). 사실 사람들은 자신이 잘한 일, 자신이 성공한 일, 상 받은 일 등 좋은 일은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또 자녀들에게 말하지만, 자신의 잘못이나 실패에 대하여서는 말하기를 매우 꺼려합니다.

  성공담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면, 실패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그 원인과 실패에 따른 쓰디 쓴 결과를 간접 체험하게 하여 다시는 같은 실수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자자손손에게까지 실패의 경험을 알려 그들의 삶의 거울로 삼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비록 범죄 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죄를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제거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실패를 발판삼아 더욱 성숙한 믿음의 길로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는 다른 한편으로는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심판의 경고가 주어질 때에 회개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결코 용납지 않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죄인 자체에 대해서는 무한한 용서를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벧후 3:9).

  회개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복들에는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2:19)라고 하는 물질적 복이 있습니다.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2:20)라고 하는 국가적 평안과 강성함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들은 오늘 말씀에서 주시는 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하시는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바로 “성령의 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복은 영혼 구원의 복입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여기에서 “내 신(루아흐:רוח)”은 성령입니다. 만민은 28, 29절에 나오는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일차 성취가 되었으며, 현재에도 계속해서 성취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성취되어갈 것입니다.

  ‘부어 주리니’(솨파크:שׁפך)는 비나 폭포수 같이 많은 양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 부어지는 것을 뜻하며, 성령 강림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허락하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선한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풍성함은 영적인 풍성함을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제한되었던, 즉 왕이나 선지자 혹은 제사장 등 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특별한 직분자에게 국한 되었던 성령의 임재가 신약시대에 들어와 신분이나 성별, 연령 등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도 차별되는 일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양적으로도 충분하고 풍성하게 주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만민에게’(코르 바사르:כל־בשׂר)는 ‘모든 육체’입니다. 이는 성령의 강림과 그의 은혜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만세대의 전인류에게 공히 적용될 것을 뜻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일어날 현상의 한 단면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보다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고 자유롭게 계시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자녀, 늙은이, 젊은이’ 등으로 언급한 것은, 연령 계층에 따라 각기 다른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전체가 해당이 되고(보편성), 풍성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언, 꿈, 이상을 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신약시대의 사도들과 같이 특별계시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7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 교통을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신약시대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예언, 꿈, 이상은 특별계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제의 수단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구약 시대에서 대표적인 성령의 수혜자는 왕, 선지자, 제사장 등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신인 성령이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주어진다고 하는 약속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입니다. 여기에서 남종과 여종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집에서 종살이하는 남자 종과 여자 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이 말을 왜곡하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축소하여 ‘남자 교역자와 여자 교역자’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석을 해야 여자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 시대의 종교상황에서 여자 목사를 반대하면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이 될 정도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한 성경의 잘못 된 해석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축소시키는 마귀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여자도 목사가 되도록 성령을 부으셨다고 인정할지 모르지만, 결코 올바른 해석이 아니며, 단지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려 여권 신장의 결과와 교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잘못된 마귀적인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40일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2-3) 이 말씀은 남녀의 구분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는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는 말은 성령 강림 뒤에 일어난 특별한 현상으로서의 ‘방언의 은사’가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에 성령을 받은 여자 성도들이 모두 목사가 되었나요? 한 사람도 목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체험한 후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뒤에서 조용하게 뒷바라지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들이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히려 ‘숨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사명인 것입니다. 앞에 나서서 대표로 일을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여자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앞장서서 대표로서의 일을 금지하라고 교훈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의 대표자는 아담이 되는 원리와 동일한 것입니다.

 

  성령이 왜 주어졌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요엘 선지자에게 성령 강림에 대한 예언을 하도록 하셨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영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 강림의 목적은 은사가 아니고, 여자 목사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간이 변하려니와’ 이는 종말의 때에 나타날 현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공포 속에 우왕좌왕 할 때에 성도는 구원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오히려 안연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시대로 말하면 칠칠절입니다. 이 칠칠절은 밀과 보리를 수확한 후에 지키는 감사절입니다. 바로 이 맥추감사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은 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허락하신다는 뜻이며, 앞으로 있는 더욱 무서운 불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신다는 은혜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32) 신분과 성별과, 연령의 구분이 없고,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민족적 차별도 없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인종이 여호와를 알게 되고 경외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방인들이 감히 마음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는 새로운 시대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나는 죽고, 그 대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회개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게 되어 우리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기 전에 행하던 모든 악한 모양의 행실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워져서(고후 5:17),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는 삶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성령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붙들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다시는 죄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많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즉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가운데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 우리의 아픈 곳을 치유하시는 성령님, 육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영혼의 상처까지 치유해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빌 바를 알지 못해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롬 8:26).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감사하며 온전한 믿음을 이루기 위해 힘써 달려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