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1년 성탄절 - 말구유에 피어난 사랑

chukang 2011. 12. 24. 22:31

말구유에 피어난 사랑 누가복음 2:1-20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가 본명으로 그의 외증조인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에 의해 양자가 된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로 개명하게 됩니다. 그는 로마 시민전쟁으로 무질서해진 로마의 질서를 바로 잡은 공적인 인정되어 B. C. 27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숭고한 자’ ‘존귀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에는 황제에 대한 하나의 칭호가 되어 그 뒤를 계승한 황제들에게 사용이 되었습니다(행 25:21, 25).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는 로마가 다스리는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로마황제 아구스도는 통치를 잘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미 5: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씀이 이루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12살 이상의 여인들도 모두 세금을 내야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려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베들레헴이 다윗의 동네라고 불리는 이유는,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다윗의 집 족속이라고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왜 하필이면 말구유에서 태어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로마 황제의 호적 명령에 따른 요셉의 베들레헴으로의 귀향과 같은 내용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일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단의 악한 무리는 이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업을 지금까지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저들에게는 패망 선고요 사망 선고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신 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날조하고 거짓 사상을 퍼뜨려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가짜 그리스도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어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들을 향한 사랑을 희석시키고, 세상에 계속적인 가짜 예수에 대한 소문이 자주 나게 하여 마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만들어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멀어지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다시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장소로 돌아가 보면, 요셉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잠을 잘 숙소를 구하려고 했지만 방이 없었습니다. 호적하기 위하여 몰려든 사람들이 먼저 사관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 일행은 밤이슬이라도 피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하는 수 없이 마굿간에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만삭의 몸으로 긴 여행을 한 탓인지 피곤으로 지친 몸을 마굿간에 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고, 그 몸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들레헴에 있는 한 여관의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진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만일 거짓이라고 하면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꾸며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꾸미지를 않습니다. 사실 그대로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단의 세력이나 세상 사람들은 어떤 훌륭한 인물에 대한 출생기록을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은 조금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장소와 상황에 대하여 그 어떠한 미화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에 대한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계획을 방해해야만 합니다.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곧 사단으로부터의 구원인 동시에, 사단의 멸망과 직결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역을 하시게 되면 사단은 자기 마음대로 부리던 세상의 일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사람들이 벗어나게 되면 자기의 권세가 축소되는 것입니다. 권세의 축소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해진 지옥의 무저갱, 영원한 불 못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헤롯의 악한 성정을 이용하여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악한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헤롯은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를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을 알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동방박사들의 꿈을 통하여 다른 길로 돌아가도록 만드셨고, 주의 사자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단의 헤롯을 통하여 유아 학살사건으로 일으켰습니다.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2살 미만의 모든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은 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마 2:1-21). 사단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주님께서 약자들의 편이시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는 말은 잘못 오해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잘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라도 생각하기도 합니다. 용모나 체격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스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배경이 없다는 것입니다. 왕족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큰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하층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 시대에서 미남으로 인정받는 얼굴로 그려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얼굴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놓고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큰 교회일수록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고, 긴 수염에 지팡이를 들고 양을 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큰 현수막에 인쇄를 하거나, 교회 전면에 스테인드 그라스로 만들어 놓기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모습이 결코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상상으로 그린 것을 예수님이라고 교회에 걸어 놓고 있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학문적 배경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신 시기도 인간성이 상실되고 매우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생활을 하시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간고’ 즉 슬픔(sorrow)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질고’ 육신적인 고통과 질병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시고 살아가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말구유’라고 하는 천한 곳에 뉘임을 받은바 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는 육신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정작 성경학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혀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직분을 가진 사두개인들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동방 박사로 인해 헤롯왕은 어렴풋이 눈치를 챘지만, 하나님의 지시대로 다른 길로 돌아가는 바람에, 아무런 죄가 없는 영아들만이 희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 경배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동방 박사 외에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추운 밤에 이슬을 맞으면서 양떼를 지키는 가장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주인들로부터 양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이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심, 가장 천한 목자들의 경배는 예수님의 사역이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고와와 과부 등에게 큰 관심을 가지시고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법을 모세를 통하여 세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약한 자들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물론 약한 자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다 사랑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하층민으로 천대 받고 살고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경배한 목자들과 같이 아무도 감독하지 않는 캄캄한 밤중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주님께서는 이런 연약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는 사단을 십자가와 부활로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도 연약한 자들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성령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자들은 세상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주님께서 초청한 잔치를 외면하였지만, 세상의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자들은 그 부르심에 감사함으로 참예하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3. 어떤 곳이라도 소망은 있다.

  이렇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가장 비참한 곳에서부터 주님의 일생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그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후에 성장과정은 어땠을까요? 요셉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수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예수님이시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돈이 없어도 따랐습니다. 권세가 없어도 따랐습니다. 고운 모양과 풍채도 없으신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은 오직 주님만 믿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해치고 싶어 잡아들이고 싶지만, 군중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군중들이 배가 고플 때에는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아플 때에는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에게서는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헐벗고 고통 받는 자들의 처지와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만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괴로움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마굿간에서 태어난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인생의 모든 질고를 경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님께 내 모든 문제를 내어 놓기 바랍니다. 내 미래를 상의하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뿐만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도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가장 초라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연약한 인생들 어려움을 겪는 인생들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고 인생의 모든 질고를 왜 겪으셔야만 했을까요? “내가 그토록 어려운 일을 다 겪어 보았기 때문에 너희들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도 다 알고 있노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으실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책으로 보고 배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게신 것이 아닙니다.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 잘 보이려고 포장할 것도 없으며 다만 이 모습 이대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디며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택한 백성들을 돌보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종국에는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주님을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의 그 어떤 것으로도 천국행 티켓을 살 수는 없습니다. 오직 마굿간에 육신으로 오신 그 예수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닌 주님,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 바로 그 주님만이 차별이 없는 곳, 가난과 배고픔이 없는 곳, 멸시와 천대가 없는 곳, 부자라서 대접해 주지 않는 곳, 지식이 부요한 자라서 대접해 주지 않는 곳,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대접을 해 주지 않는 곳, 주님을 믿기만 하면 갈 수 있고, 성도라면 누구나 대접을 받을 수 있고 천사가 수종을 들어 주는 그 곳, 바로 그런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