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설교

2011년 부활절 설교 - 빈 십자가, 빈 무덤

chukang 2011. 4. 23. 20:58

빈 십자가, 빈 무덤 누가복음 23:50-24:3

 

  주님께서는 고난 주간 첫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렬히 환영을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로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유대나라를 해방시켜 줄 것이며, 또한 왕으로 등극하여 새로운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잠시 동안의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 보다는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현세적인 왕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바람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악을 구속하신 후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만 구성된 영적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성만찬을 나누시면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나를 파 것이라.”(막 14:20)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제각기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가 팔 것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셨습니다.(마 26:25) 그리고 유월절 성만찬을 거행하셨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6:26-29)

  성만찬을 마친 후에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감람산은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에 달릴 것을 준비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잠을 자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후에 따로 한적 곳으로 나아가서 땀방울이 핏방울과 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모든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얼마나 섭섭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그 섭섭함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입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지만, 제자들은 깨어 기도함으로써 배반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사이 빠져 나가서 대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은30을 받고 그들을 예수님 계신 곳으로 이끌고 왔습니다. 자신이 입을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니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는 화가 나서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그 귀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 매우 뜻 깊은 교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혀 결박을 당하고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로 끌려갔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하여 죄로 엮을 것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현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죽을 때까지 하는 종신직이나 헤롯 당시에는 타락하여 돌아가면서 했습니다. 안나스는 현 대제사장의 장인으로 전임 대제사장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기 위하여 유도 질문을 했습니다.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을 들은 가야바는 ‘참람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죽일 증거를 찾았으니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몰래 따라가서 어떻게 되는지를 살펴보던 베드로를 대제사장의 집에 있는 비자들이 보았습니다. 비자가 너도 갈릴리 사람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고 하니까, 자기는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또 다른 비속이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지 이번에는 맹세하며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계집종이 또 말하자 이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아니라고 부인하였습니다. 이 때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도 역시 예수님을 몰래 따라와서 살피고 있었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심한 모욕과 멸시를 당하시고 매를 맞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뉘우치고 은 30을 다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에게 네가 당하라고 매몰차게 말합니다. 유다는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 돈은 피 값이기 때문에 성소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그 뒤에 그 밭은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괴롭힘은 당한 후에 결국 다음 날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정오부터 오후3시까지 캄캄함이 임하였습니다. 오후 3시가 될 무렵 주님께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신 후에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돌아가셨습니다.(마 27:46)

  주님께서 돌아가시던 그 순간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한 것입니다. 그들은 숨어 있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주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히 9:11) 구약 시대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죽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공회원 중에 한 명인 아리마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으로 미리 준비해 둔 곳에 예수님을 세마포로 싸서 장사 지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왔으나, 갑자기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지키는 병사들은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천사는 여자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했습니다. 할렐루야! 천사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로 알고 빈 무덤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은 ‘빈 십자가, 빈 무덤’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 마음도 빈 것이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주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토록 젊은 나이에, 그 건강한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그 괴로움, 두려움, 외로움 모두 이겨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게셋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곧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한다고 했습니다(마 5:3). 십자가의 삶은 가난한 심령의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갈급해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갈급해 하고 성령의 역사를 갈급해 하는 가난한 심령의 삶이 되어야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갈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빈 십자가’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 영적으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우상화’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육신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믿으려고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 꼭대기 하나님께로 올라갔을 때에 40주야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오래 있는 것에 지쳤습니다. 의심이 들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를 마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산 아래에 남아서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던 아론을 핍박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앞세우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무엇으로 유혹해서 타락시켰습니까? 보이는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찾아 온 사탄이 제시한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떡, 명예, 권세 모두 육신과 관련된 것입니다. 보이고 손에 잡히고 누릴 수 있는 것들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육신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마귀는 결코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빈 십자가입니다. 이 빈 십자가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달려 돌아가셨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구약 율법에서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번제는 제물 자체를 완전히 태워 그 형체까지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온전한 번제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십자가에 계속 매달려 있다고 해도 부활하시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으로 하여금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여 무덤에 장사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빈 십자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십자가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모양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신교가 사용하는 십자가는 빈 십자가요,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십자가는 예수님의 형상이 달려있는 십자가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그 우상은 바로 금송아지요, 바알이요, 아세라와 동일한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우상을 만들지 못하면 사진이라도 갖다 놓아야 하고, 글씨라도 써 붙여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김생김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이 진짜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시중에 나도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림이 정말 그 옛날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형상을 만들고 그리는 것은 곧 마귀의 계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말고, 달콤한 속삭임에 속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도”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그것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매어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을 팔게 하였으며, 대제사장들과 군중들을 동원하여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판결을 할 때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마귀는 환호했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이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의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마귀는 바로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의 계략으로 예수님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것은 마귀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뜻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것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문 것이지만,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려 박살을 낸 통쾌한 승리의 사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이기는 것 같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빈 무덤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빈 십자가와 빈 무덤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신앙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고, 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부활하시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부인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육신의 생명이 소중하여 영혼을 마귀에게 파는 그런 신앙을 버리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신앙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믿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세상적인 욕심과 재물로 채워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빈 십자가, 빈 무덤의 신앙으로 마귀에게 승리하고 천국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