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립보서 1:27-30
빌립보라는 도시는 에게 해에서 내륙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평야지대와 성읍을 관통하여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통하는 육로가 있어서 고대에는 주요 군사로 및 무역로로 이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근에는 금광이 있어서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인 필립 2세(Phillip II, B. C. 359-336)가 이 지역을 점령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사람들을 이주시키면 자신의 이름을 본 따 빌립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큰 도시가 아닌 빌립보는 로마의 동진 정책과 이탈리아로부터 온 이주자들과 아시아인 등 여러 민족들의 이주로 인구가 크게 증가되었고, 로마 본토와 똑 같은 권리를 지닌 자치권을 지니게 되어 특별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시의 특징은 회당이 없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로 유대인들이 흩어지고, 유대인이 열 명의 남자만 있으면 회당을 세우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하나도 없었고, 기도소가 있었을 뿐이라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16:13). 따라서 빌립보는 거의 완전한 이교의 도시였습니다.
이런 빌립보에 주님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이던 A. D. 52년경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의 드로아에 있을 당시 환상 중에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고, 이에 아시아 전도를 멈추고 빌립보의 관문인 네압볼리를 경유하여 빌립보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빌립보를 유럽 최초의 복음 전도지로 삼았습니다(행 16:6-12).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 여인인 루디아나 또 귀신들렸다 바울에게 치유를 받은 여종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들을 최초의 성도로 하여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행 16:15-34).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기독교 역사상 큰 전환점이 됩니다. 빌립보 교회가 유럽의 첫 교회가 되어 이후 기독교 역사가 아시아 중심에서 유럽으로 넘어가 유럽을 근간으로 오늘날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믿는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은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었고,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에도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고후 8:1-4;빌 4:15, 16) 보입니다. 이 교회는 초대 교회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이송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이 서신을 보면 바울은 자신을 위하여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헌금을 보내주기도 하며 여러 방면에서 자신을 염려하며 힘서 도와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에 잠긴 그들에게 자신의 근황을 알려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또 그들에게 필요한 권면과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의례적인 인사의 내용과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와 기도가 기록되어 있고, 감옥에 갇힌 이유에 대하여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간증 형식을 빌어 투옥의 의미와, 생사의 의미, 그리고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투옥의 의의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누군가가 감옥에 갇혔다고 하면, 그 사람이 죄 값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미 끝났다. 즉 앞으로 감옥에서 나온다고 해도 살기가 참 어려울 것이라고 단정을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투옥이 도리어 복음 전파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12절의 “복음의 진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 옥에 갇힌 자신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생겨났다고 합니다(15-17).
당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 때문에 용기를 잃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바울의 투옥은 복음의 패배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속되는 사단의 세력의 유혹과 중상모략은 빌립보 성도들을 더욱 어렵게 했을 것ㅎ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투옥이 오히려 복음 증거에 진보가 되었음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알려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며, 핍박 때문에 복음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복음에 헌신하게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복음의 진보된 첫 번째 사실은, 바울의 매임 즉 감옥에 갇힌 것이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어 복음이 진보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은 어떤 나쁜 죄를 지은 것 때문이 아니라,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고 한 것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이 전해진 것입니다.(행 25:9) 바울을 로마로 호송하는 책임을 맡았던 백부장은 바울이 죄가 없으며 복음을 위해 세움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행 27:9; 28:6). 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2년여 동안 바울이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그의 매임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복음이 진보된 두 번째 사실은, 형제들 중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한다.’는 말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 바울의 투옥된 일로 더욱 주님을 확고하게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성도들은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태연함에 용기를 얻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할 때에도 항상 나쁜 감정이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착한 뜻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지만, 어떤 사람은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런 상황에 대하여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라고 말하면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바울의 위대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사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 사역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의 동기가 자신에 대한 투기와 분쟁으로 인한 것이든지 존경과 사랑으로 하는 것이든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방법으로든 오직 복음이 증거된 사실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때의 복음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당시에는 개인적인 감정은 있었지만, 이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단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로 인하여 염려하고 슬퍼하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생사관(生死觀)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소망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든지 그것을 통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증거되고 또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만을 원하였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장차 있을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어 석방되면 자유로운 상태에서 복음을 증거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도록 하려 했고, 사형이 선고되면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리스도만이 존귀롭게 되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자세는 바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주님의 뜻이요, 주님만 존귀하게 되면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하는 것의 동기와 힘과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생각과 이상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이제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셨습니다(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처럼 우리 성도의 삶은 오직 주님을 존귀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내가 죽어질 때에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고, 내가 없어져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내가 낮아질 때에 주님께서 높아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죽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이 되고 참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것도 그의 사명인 복음을 전파하는 열매를 맺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무조건 살아야 한다,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사관은 철저하게 주님과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생명에 대한 선택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예정에 온전히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를 바라는 소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실 비록 죽음과 삶이라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을 놓고 갈등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고역과 오해, 결박과 고독의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기를 더 소망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합니다. 죽는 것은 자신의 육체가 받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익하지만,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 성숙과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바울이 사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소원과 유익을 억제하고 성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을 택하려는 바울의 목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나는 조금 더 힘들고 어렵지만,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바울의 마음이요, 그 마음을 빌립보 성도들과 또한 우리들이 갖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고난의 의의
당시 폭군 네로의 통치하에 있던 로마 제국 내의 모든 성도들에게는 언제 달칠지 모르는 환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전쟁을 할 때에 심리전을 많이 사용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즉 같은 편끼리 서로 마음이 맞지 않도록 만들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요, 이 방법에는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친한 사이를 갈라놓고, 가정을 분열시키고, 교회에 파당을 지어 서로 싸우게 합니다. 바울은 마귀의 계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첫 번째 조건으로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협력하라”고 말합니다. 한 정신, 한 마음으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야말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큰 힘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두 번째 조건으로는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한 일이 없을 때에 떳떳하게 말하고 나설 수 있습니다. 즉 지금 핍박을 당하고 있는 자신은 물론 빌립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계략으로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위축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적들이 아무리 거센 공격을 해와도 주님의 십자가 꼭 붙들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대장으로 모시고 전쟁에 임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적대자들의 박해에 직면하여 있어도 태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임하면 그것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빙거(憑據: 의지하여 증거로 삼는 것)가 되고,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의 빙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핍박을 이겨내는 것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되지만, 반대로 박해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어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세 번째 조건은, 고난당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짓을 해서 고난을 받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애매히 고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여 슬픔을 참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고난은 고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참고 이길 때에 그것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와 연합하여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또한 주와 연합하여 그의 영광에도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8:17).
누구든지 고난을 받으면 괴롭고 슬프고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은 고난 뒤에는 더 큰 고난이 뒤따라오기도 합니다. 작은 고통을 참고 이기면 그보다 좀 더 큰 고통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고난, 고통을 이겨내기보다는 포기하는 세태에 살고 있습니다. 작은 문제만 발생해도 포기해 버리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쉬운 길로 돌아가려고만 합니다.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조선 말기, 일제 강점 시대, 6.25 전쟁을 통하여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은 부모들이 자식들만을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힘든 일은 부모가 할 테니 너희들은 편하게 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게 된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을 하면,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잡아다 먹여만 준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합니다. 부모가 잘해주고 칭찬해 주는 것에만 익숙해서 다른 사람이 바른 말해도 기분 나빠합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해도 기분이 나쁩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다시 노력해서 올리면 되는데,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하는 학생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작은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체득하지 못해서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찾아오면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작은 고통일수도 있습니다. 그 고통은 내 마음 속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조금이라도 믿음이 있고, 믿음을 따라 살려고 하는 진실한 성도라면, 아 내 믿음은 왜 이렇게 연약한가? 하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라 살려고 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핍박하며 조롱합니다. 믿지 않는 저들은 예수 믿는 우리와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은 좋지 않은 일만 있어도 무조건 예수 믿는 우리들의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것들 모두가 고통이라고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것을 통하여 연단을 받으면서 내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더욱 자라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야말로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우리가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낮아질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임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이 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오늘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또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난이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면 받을 복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높임을 받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난 주간 동안이라도 우리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작고 못난 나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수난을 당하셨는데, 나게 오는 이 작은 고난을 이겨내진 못하면 안 될 것입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에게만 승리의 기쁨과 면류관이 주어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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