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1장 강해 - 바벨탑 사건과 셈의 후손
전반부 1-9절은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하여 각지로 흩어져 나가 다른 민족을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후반부 10부터는 26절까지는 셈의 후손에 대한 내용과, 27부터 끝까지는 아브라함 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온 땅의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온 땅은 시날 평지 등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과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구음은 ‘하나의 입술’ 즉 하나의 언어를 가리킵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류가 세상에 흩어지기 이전까지 온 인류는 모두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옮긴다는 말은 말뚝을 뽑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천막생활을 했던 고대 유목민들이 거주지를 옮기기 위해 이동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표현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아라랏 주변에 기거했기 때문에 아라랏에서 시날 쪽으로의 이동은 정확하게 남동쪽이 될 것입니다. 시날 평지는 바벨론 지역으로 추정합니다. 바벨론 주변 지역의 비옥한 땅은 고대인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곤 평지’라는 고유 명사로 불렸습니다. 홍수 후 협소한 거주지를 버리고 부와 행복을 갈구하며 넓은 평원을 찾은 사람들이 그 후 탐욕과 방탕, 사치와 죄의 도성 바벨론을 건설한 것은 하나님의 부름에 수종하여 가산과 본토 친척을 버리고 팔레스틴으로 향한 아브라함의 신앙 행위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서로 협의하여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평지는 돌보다는 흙이 많기 때문에 이들은 흙을 불에 구워 돌의 대용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흙벽돌은 자연 광선인 햇빛을 이용하여 말렸는데, 이들이 불로 구워 더욱 단단한 벽돌을 만든 것을 보면 건축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바벨론 성이나 건축물들이 돌이 아닌 벽돌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성경의 기사가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역청은 “끓어오르다, 부풀다”는 뜻에서 나온 단어로 열을 가하면 마치 기름이 끓는 것과 같은 현상을 띤 역청(asphalt)의 특성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당시 바벨론과 사해 사이에서는 역청이 흔하였습니다(창 14:10). 시날 평원까지 이주한 사람들은 탑을 쌓기 위한 벽돌의 접착제로 진흙 대신 이 역청을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높아지기 위해 돌 대신 벽돌을,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하여 탑을 쌓으려 했던, 고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이들의 지혜는 놀라운 것입니다.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들은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동우면서 하나님처럼 높아지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처럼 선행보다는 악행에 더욱 공감대를 형성하며 악을 즐겨 도모하는 이들에게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은 인위적 장벽이 둘러쳐진 성읍 또는 도시를 말하고, ‘대’는 탑 또는 탑과 유사한 견고히 쌓은 높은 구조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이 말은 하늘들에 대의 꼭대기가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인위적인 구조물을 매우 높게 쌓는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름을 내고’ 탑을 쌓는 1차적 목적입니다. 이들은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야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보다 자신의 명예를 얻기에 급급한 자는 항상 하나님께 모반의 죄를 범할 위험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탑을 쌓는 두 번째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날 인간 창조 때부터 인류가 번성하여 당신이 창조하신 온 땅을 채우시기를 원하셨고 또 이를 직접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창조자 하나님 없이 인간들끼리만 뭉치고자 하는 어리석은 뜻에서 이 같은 시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깊이 개입하셨음을 나타내는 신인 동성 동형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시내산에서 가시(可視)적인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과는 달리(출 19:20; 34:5) 탑을 쌓는 인간의 악한 행위를 지켜보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 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심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호하고도 구체적인 결정입니다. 이제 이 결속된 연합체가 이렇게 탑을 쌓을 수 있는 것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금지시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의 악행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자’ 이 말은 ‘가자, 오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다짐이거나 삼위 하나님이 서로 권유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실 때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범죄 뒤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 행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사 59:17, 18). ‘언어를 혼잡케 하여’ 언어의 혼란이 오게 된 것은 인간들의 범죄의 결과로 빚어진 인류의 불행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방언을 말하며(행 2:1-11),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롬 15:6) 분명 죄악으로부터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비록 인류는 하나님의 징계로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인류가 온 땅에 충만한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류의 악조차도 당신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원리의 일면을 보게 됩니다.
9: 그러므로 이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בבל)’은 ‘섞다, 섞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혼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까지 높아지기 위해 탑을 쌓던 자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언어의 혼란을 가져오고, 인류는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10,11: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러하니라’는 말은 새로운 내용의 시작을 알리는 관용 어법입니다. ‘아르박삿’은 ‘영역’이란 뜻으로, 셈의 셋째 아들로(10:22, 24; 대상 1:27, 28)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483세로 죽었습니다. 아르박삿을 낳고도 셈은 계속하여 자녀를 낳고 500년을 더 살았습니다.
12-25: 아르박삿은 삼십 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 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여기에서 홍수 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첫 아이의 출산 연령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점입니다(5:21, 25), 그리고 인간의 후명은 단축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수명은 후대로 갈수록 낮아져 모세 시대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거의 70-80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시 90:10). 이는 홍수로 인한 지구 기후의 벼화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한 인간의 관습 변화의 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셀라’는 ‘무기, 물을 보내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전쟁 상황을 암시한 것이거나 홍수의 아픔을 회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벨’은 ‘건너가다’는 뜻입니다. ‘벨렉’은 ‘나뉘다, 분리’등의 뜻입니다. 이 이름은 당시 세상의 큰 분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르우’는 친구, 우정이라는 뜻이며, ‘스룩’은 활, 포도가지, 매우 단단한 힘‘의 뜻입니다. ’나홀‘은 ’숨을 몰아내쉬며 씩씩대다. 구명을 뚫다, 살인자‘의 뜻입니다. 하란의 조부이자 데라의 아버지입니다. ’데라‘는 ’표백, 지체하다, 전환하다‘는 뜻입니다.
데라는 다른 신을 섬긴 자로서(수 24:2) 아마도 우르 지방에 성행하던 달의 신을 섬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데리고 하란으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습니다(24-32).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고(32절)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12:4). 따라서 아브람은 데라가 130살 때에 태어났습니다. 결국 본절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자는 아브람이 아니라 나홀 아니면 하란입니다. 그러나 나홀이 하란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29절)로 미루어 볼 때 하란이 데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음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이 제일 먼저 언급된 이유는 이 족보가 단순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술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술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데라가 세 아들을 낳은 반복되는 기록에 이어 롯의 출생이 언급되는 것은 다음 절의 하란의 죽음과 관련이 됩니다. 그가 아브람을 따라 먼 여행의 장도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문자적으로 ‘그 아비 데라의 면전에서’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하란은 우상 숭배자인 아비 데라의 고발에 의해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비의 면전에서 신전의 불 가운데 던져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는 단순히 아비 데라의 생전에 죽었다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갈대아 우르’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 사이의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으로 아브람과 그 조상들의 고향으로 상업,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뛰어난 고대 문명과 아울러 우상숭배가 성행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세상적으로 볼 때 이런 풍요한 곳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황량한 팔레스틴으로 향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과 섭리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것입니다.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아브람은 이복 동생과(20:12), 나홀은 질녀와 각각 결혼하였습니다. 이런 혈족간의 근친결혼은 지리적 제한성과 순수 혈통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적 관습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시내산 율법이 주어진 때로부터는 엄격히 규제가 되었습니다(레위 18:6). ‘이스가’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롯의 아내라는 견해와, 사라와 동일인이라는 견해가 있어나, 당시 데라 가문에서 널리 알려진 여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믿음의 조상으로서 신앙의 가계를 이어가야할 아브람(고귀한 아비)과 그 아내 사래(나의 공주란 뜻)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붙임에 대한 기록은 언약의 씨라 할 수 있는 이삭의 출생(17:15-22;21:1-7)이 전적인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혀주는 전조가 됩니다.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가 아들 아브람, 손자 롯,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처럼 언급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람의 주도아래(12:1) 그의 가족들이 함게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도시 갈대아 우르를 뒤로 한 채 미지의 세계를 향해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떠날 당시 아브람과 데라의 의식 속에 가나안이라는 구체적인 목적지가 설정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히 11:8).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를 나타낸 표현입니다. 당시 가나안은 갈대아 지방 주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하란’은 바벨론과 지중해 또는 팔레스틴, 애굽 등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상업의 중심지로 북 메소보다미아의 주요 도시입니다. 이곳은 달의 신인 ‘신(Sin)'의 숭배가 성행하였습니다.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노구를 이끌고 장기간 여행에서 오는 피로를 회복할 심산으로 하란에 머문 데라는 결국 더 이상 가나안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의 길을 중단하는 사람은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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