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2장 강해 -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본 장을 기점으로 창조 시대가 끝나고 족장시대가 시작이 됩니다. 창조 시대는 천지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의 역사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 이전의 긴 기간의 역사를 주로 인류사 전체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축약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족장 시대의 기사는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짧은 기간의 역사를 신약 교회의 구약적 예표로서, 즉 구약 시대 구속사의 주역으로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이라는 과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5절은 아브람이 택한 백성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며, 6-9절은 소명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10-20절은 아브람의 인간적 실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신앙의 결단을 내린 용기를 가진 점과 아울러 인간적 약점을 가진 사실도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그 누구도 완전할 수 없으며 다만 보다 더 성숙하려고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언약과 구원의 명칭은 ‘여호와’라는 말로 첫 구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속사를 이루어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명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 본토는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포함한 메소보다미아 지역이며, 친척은 위 지역에 살던 셈의 후손, 아비 집은 아브람의 친 혈육인 아비와 그 형제 일가들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우상의 도시에서 죄악 된 관습에 젖어 있던 과거의 모든 인연과 삶을 완전히 청산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향해 가는 첫걸음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일단 떠난 뒤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거룩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은 ‘내가 네게 보여 주고자 하는 그 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가 가야 할 구체적인 장소나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히 11: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맡긴 채 오직 당신의 인도하심을 좇아 한발짝 한발짝 발걸음을 옮겨 나간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하셨고 또 믿음의 가계를 형성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한다는 것은 단지 많은 수를 의미하지 않고, 영적, 문화적 측면까지를 포함한 총체적인 탁월함을 일컫습니다. 이 약속은 당시 불임의 고통 중에 있던(11:31) 아브람에게는 상당히 막연한 것을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신앙은 이러한 현실의 불가능을 딛고 오직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 이는 복의 시혜자(施惠者)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결코 취소될 수 없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된 복은 일시적인 것이나 후손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미의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 상실한 공동체로부터의 소외 및 기득권 상실 등에 대한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보상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이는 이름을 크게 떨치는 탁월한 존재가 될게 해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친구(약 2:23)’ ‘여호와의 종(시 105:5,6)’ ‘열국의 아비(17:4,5)’ 등의 영화로운 별명을 얻었을 뿐 아니라 구세주 예수께서 그의 혈통을 통해 탄생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예도 얻었습니다(마 1:1).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는 복 그 자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빌어 축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이웃에 대한 영적인 복의 근원, 3절에 언급되는 것처럼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저주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과 복을 주심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런 기초 관계를 기반으로 아브람은 모든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며 헌신적 삶을 사는 성도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복을 누리게 된다는 신약의 가르침과 상통하는 것입니다(마 19:29). ‘너를 저주하는~ 내가 저주하리니’ 앞의 저주(칼랄:קלל)는 멸시하다, 무시하는 인간편의 저주를 가리키며, 뒤의 저주(아라르:ארר)는 법정에서의 사법적 저주, 곧 하나님 편에서의 저주입니다. 아브람을 저주, 멸시하는 행위는 그를 절대 후원하고 계신 하나님을 저주, 멸시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브람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인정되어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실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땅에 사는 모든 족속들이 아브람으로 인하여 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놓여 있는 인류가 아브람의 씨,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는 영적인 복의 암시입니다(갈 3:7-9). 이러한 복의 언약은 아브람이 받은 모든 복 중에서 최고의 복입니다. 아브람이 받은 모든 언약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 의지를 복종시켰습니다. 신앙은 머릿속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내딛는 행동입니다. 신앙이 생명력을 갖는 것도 바로 이렇게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의 조카 롯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이후 아브람의 생애에서 그의 역할을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75세였더라.’ 현재 그의 나이는 그의 생애 최절정기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황금기에 이른 나이였지만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그의 생활을 정주하여 부와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떠도는 피곤한 나그네 생활이었습니다. 신앙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황금기의 나이에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완정한 현실 가운데서도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브람에게서 천성을 사모하며 나그네 인생을 사는(벧전 2:11) 성도가 지녀야 할 순례자적인 정신의 일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하란에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은 그들 일행이 하란에 장기간 체류했음을 암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으로 하여금 가나안으로의 여행을 망설이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현실 안주의 부드러운 유혹은 천성을 향해 가는 모든 성도 앞에 가로놓인 교묘한 함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얻은 사람들을’ 아브람의 재산을 돌보는 일꾼들과 그 일꾼들의 자녀들을 일컫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아브람이 가나안을 목적지로 정하고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란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약 480km로서 각종 재산과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하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손길만을 의지하고 유프라테스와 수리아 광야를 지나 레바논 및 다메섹을 거친 후 마침내 가나안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처럼 오직 믿음, 오직 순종으로 일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바 아름다운 복을 마침내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팔레스틴 중부 지역의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위치한 곳이 세겜 땅입니다. 이곳에는 상수리나무가 있었으며,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거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손들로(10:6) 셈족의 후손인 아브람과는 종교적으로 융합될 수 없다는 것과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가나안으로 왔을지라도 믿음의 행보 앞에는 순탄치 않는 일들이 닥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확실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이겨낸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현현을 하셨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꿈이나 환상과 같은 것이 아닌 아브람이 현실에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아브람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땅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입니다. 그리고 땅은 아브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어졌습니다. 즉 아브람은 여전히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그 약속에 너무나 감사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8,9: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 약 20km 지점에 있습니다. 이곳은 아브람 당시 ‘루스’라고 불렸으나 야곱이 돌베개 사건 이후 벧엘로 개명되었으며(28:19) 현재는 ‘바이틴(Beitin)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이‘는 폐허란 뜻으로 벧엘 동남쪽 약 3km 지점에 위치합니다. 이곳은 가나안 경내에서 중요한 요새였으나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의해 이름 그대로 폐허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수 8:1-29). ’남방‘이라는 말은 건조하다는 ’나갑(נגב)‘에서 유래한 말로 ’건조한 광야 지대‘로 가나안의 남부 광야 지역입니다(13:3;20:1;24:62).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단을 쌓는 것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께 감사와 찬송과 도고(중보기도)를 통해 공식적인 예배를 드린 행위입니다. 딤전 2:1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간구, 기도, 도고, 감사의 네 가지가 나옵니다. 간구는 긴박한 상황에 놓은 개인이나 회중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특별한 경우를 위한 애원을 의미합니다.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통하며 기원하는 모든 행위의 총칭입니다. 일반적인 모든 기도를 뜻합니다. ’도고‘는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뜻합니다. ’감사‘(유카리스티아)는 기도의 일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단을 쌓고‘ 이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믿음으로써 약속해 주신 땅을 소유했다는 신앙의 증표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온전한 신앙의 소유자만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고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은 가나안 땅이고 구체적으로는 벧엘을 중심으로 한 지역입니다. ‘기근’은 굶주린다는 뜻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공헌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척박하기도 하며 농업이 발달하지 않은 관계로 기근 시에는 식물이 풍부한 애굽으로 피신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아브람도 같이 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아니므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향한 아브람에게는 가정적 환난을 겪게 됩니다. ‘우거하려 하여’ 이는 일시적인 거주를 말합니다. 기근이 지나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브람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11-14: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라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아브람은 아내의 미모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염려하여 애굽인들에게 아내인 사래를 누이라 속이기로 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브람의 인간적인 나약함을 표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그 누구도 아브람을 해할 수 없었는데, 애굽에서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한순간이라도 인간적인 생각이 들게 되면 정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래의 나이는 65세였습니다. 아브람과 10살 차이가 납니다.(4절; 17: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90세에 아이를 출산하고 127세에 죽었다는 사실로(23:1) 미루어 볼 때 당시 사래는 중년의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진 함의 후손인 애굽인과 달리 셈의 후손으로 옅은 갈색 피부를 가졌기 때문에 유난히 특출 나게 애굽인의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이런 애굽인들의 시선은 아브람이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각하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 보존을 위하여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아내의 순결을 하찮게 한 참으로 이기적인 아브람의 행위는 근본적으로 볼 때 불신앙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었다면 이런 어리석은 자구책을 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바로는 애굽 왕을 가리키는 공식 호칭입니다. 왕, 통치자란 뜻인데, 특별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왕, 즉 바로라고만 불렀습니다. 고대의 통치자에 대한 이런 호칭은 로마 황제를 ‘가이사’(Caesar, 막 12:14, 16, 17), 블레셋 왕을 ‘아비멜렉’(Abimelech, 20:2)으로 명명한 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신하들은 사래를 바로의 후궁으로 취하여 들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통치자는 자신의 영역 내에 거하는 모든 아름다운 여인을 자기의 소유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대로 방치하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바로가 아브람에게 매우 잘 대해줬다는 뜻입니다. 신랑이 신부될 사람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결혼 예물을 주는 것처럼 바로는 오빠로 소개된 아브람에게 많은 가축을 예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아내의 순결을 담보로 취한 불의한 소득이라는 사실입니다.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래의 연고로 발생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바로는 사래를 취함으로 자신의 집안에 큰 재앙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브람도 잘못을 했지만 바로 역시 죄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라고 한 것은 사래는 구속사의 후손을 낳을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18,19: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는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이 당한 재앙이 아브람의 거짓말 때문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브람의 대꾸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자가 이방인인 바로에게 꾸지람을 들으면서 침묵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까지 은혜로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떠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위기상황을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두려운 환경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신의 인간적인 지혜를 더 신뢰하는 자는 결국 수치와 부끄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0: 바로가 그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바로는 아브람과 일행과 모든 소유를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재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때때로 불신자들의 눈에 두려운 존재로 비치는 것은 그 이면에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애굽에서의 경험은 훗날 야곱 일행이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가 약 400년간의 갖은 고통과 압박 속에 있다가 출애굽하는 전조(前兆)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을 하여 고통과 방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경고와 책망과 함께 인도와 돌보심을 통해 끝까지 구원의 길로 이끄신다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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