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9장 강해 - 무지개 언약
본장에서는 대홍수의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신 것과, 노아의 실수와, 또한 자녀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무지개 언약은 창조 당시 아담에게 주셨던 전 우주의 위임 통치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재인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 끝날까지는 더 이상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역사를 단절시키는 전 지구적인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보장입니다. 노아 역시 사람의 모든 허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 포도주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은 반면, 함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지금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들에게 주시는 복은 태초에 아담에게 주시는 복과 동일합니다. 즉 노아는 아담과 같은 위치 곧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된 것입니다. 홍수 후 이제 가장 시급한 것은 인류의 번성이기 때문입니다.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아담은 하나님께로부터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1:28). 타락 전에 인간은 영적 권위를 가지고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타락 후 인간은 영적 권위로는 더 이상 만물을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그 권위가 파괴되고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들에게 인간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주입시켜 복종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타락 후 인간은 사랑과 권위로서가 아닌 힘과 위협으로 짐승을 다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권위까지도 갉아먹는 암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모든 짐승은 다시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간의 확실한 소유로 허락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맹수들이 동물계 자연계를 떠나 인간의 거처에 마음대로 침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께서 동물을 채소와 같이 인간들에게 먹을 수 있도록 공식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단 ‘산’것에 한 합니다. 후일 모세의 율법(출 22:31; 레 22:8)에는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은 먹지 못하도록 성문화되었습니다.
4: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고기를 먹지만 피는 절대로 먹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피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레위 17:11,14에서도 피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의 생활 규범에서도 적용이 되었습니다(행 15:20,29). 이는 모든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5: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이는 살인할 경우에 반드시 하나님의 보복과 형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피는 편의에 따라 흘릴 수도 있으나 사람의 피는 거룩하고 침해할 수 없는 신령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결단코 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이 말은 짐승이 사람을 죽였으면 그 짐승을 죽일 것이며,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이 말은 사람이 그 형제나 이웃을 죽이면 그에게 보복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이 말씀은 고의적으로 살해한 경우를 말합니다. 실수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오살(誤殺)한 경우에는 후일 도피성(逃避城)제도로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민 35:9-15).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살인자에 대한 심판권을 인간에게 맡기시겠다는 의미로서, 곧 법적 재판과 형무관 제도를 시사하고 있습니다(민 35:29-31; 롬 13:4). 하나님의 형상의 거룩한 모습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7: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상호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깨달아 피 흘리는 일을 일절 금지하고 땅 위에서 번성하고 편만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8-1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언약의 대상은 노아와 그 가족과 그리고 모든 후손, 그리고 모든 생명체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홍수가 다시없을 것이라는 말은 국지적인 홍수까지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땅을 멸하고 침몰시키는 홍수는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2,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되 ‘영세까지’라고 하셨는데, 영세라는 말은 감춰진 세대까지라는 뜻으로,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 까지 효력이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 증거로 무지개를 두셨다고 하였습니다. 무지개(케쉐트:קשׁת)는 ‘활’이라는 뜻입니다.
14,15: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는 주로 소나기가 온 후에 햇빛을 등진 태양 맞은편 구름 가운데서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비의 근원인 구름이 많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 언약의 증표인 무지개가 있으면 노아 홍수와 같은 위험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는 ‘혈기’ 즉 피와 살을 가진 모든 육체를 멸하는 일이 없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6,17: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행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는 구름떼가 모여들면 또 다시 물 심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불안과 공포로부터 인류를 자유케 하기 위해 무지개 언약을 주셨습니다. 구름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불안의 상징이라면(겔 30:3,18; 32:7; 욜 2:2), 무지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와 은혜의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의 세 아들은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시조들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다시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손자들 중 특별히 함의 아들만이 소개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곧 이어지는 노아의 술취한 사건으로 저주를 받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개되는 성경 역사에서 가나안의 후손들이 선민 이스라엘과 매우 깊게 연루되기 때문입니다. 셈과 함과 야벳을 시조로 하는 그들의 후손들이 지구 전체로 급속하게 그리고 골고루 확산되고 정착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번성과 충만은 홍수 후에 내리신 특별한 은총에 근거한 것입니다.
20,21: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 다시 땅을 경작하여 포도나무를 재배했습니다. 그 지역은 아라랏 산이 있는 아르메니아 산간지대로 지금도 유명한 포도 재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다는 것입니다. ‘그 포도주’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지은 포로로 만든 포도주인 동시에, 포도주가 주는 해악을 알고 있는 바로 그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농사가 잘 되자 마음이 해이해진 노아가 포도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다보니 주체하지 못하고 취하도록 마신 것입니다. 노아는 비록 당대의 의인이었지만 포도주라고 하는 술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입니다. 술을 취한 후의 행동은 옷을 벗어 던져 알몸이 된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당 시대의 죄악의 관영함까지도 극복한 노아지만 안일한 가운데 부끄러운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 즉 선 주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하체(에르와:ערוה)’는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몸의 중심 부분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 이후 인간의 하체는 주로 수치 혹은 간음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레위 18:6; 신 24:1). 여기서 함의 잘못은 아비의 하체를 우연히 목격한 그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함은 아비의 하체를 악의적으로 즐기며 모욕한 것입니다. 함은 아비의 수치를 사랑으로 덮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경멸과 조롱의 태도로 떠벌려 스스로 저주를 자초하고 만 것입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과는 달리 셈과 야벳은 아비의 수치를 사랑과 존경으로 덮어준 것입니다. 이는 효행입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는 후일 십계명에서 명시되었듯이, 인륜의 으뜸입니다. 이들은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사려 깊은 행동입니다. 그들은 비록 실수 중에 있는 아비지만 최대한의 존경과 효로서 자식의 예를 표한 것입니다. 이는 남의 수치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과 존경의 본보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신 것처럼, 인간 또한 남의 수치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마 18:21-35).
24,25: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작은 아들은 맏아들 밑의 아들로 함을 말합니다. 나중에 노아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에게 저주를 하였습니다.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는 저주를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함에게 직접 저주하지 않고 그 아들 가나안에게 했을까요? 그래서 노아가 술에 취한 시기를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포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기까지 또 많은 세월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의 아들 가나안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많이 탄생하고 성장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나안의 품행이 가장 나빴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지적하고 저주를 하였고, 그런 성품의 가나안으로부터 태어날 후손들이 역시 악한 죄에 빠질 것을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에게 저주를 하였지만, 그 저주에는 함도 연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들의 종’이란 말은 가장 비천한 종이라는 뜻입니다. 이 예언은 후일 그대로 성취되어서,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을 당해 비천한 종의 상태로 전락되었고(수 9:23),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완전 정복을 당했습니다(왕상 9:20,21). 가나안과 함 계열 소속의 베니게인과 카르타고인와 애굽인 등 역시 야벳 계열의 페르시안과 마게도니아인과 로마인 등에 의해 철저히 정복당하는 굴욕과 노예로 전락한 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26,27: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이라고 말하여, 앞으로 셈이 받아 누릴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셈의 후예들은 특별히 종교적이고 영적인 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후일 역사에서 그대로 입증이 되었는데, 셈 계열의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고(출 19:5,6; 신 7:6-11),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셈의 후손 가운데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 곧 만백성의 구원자인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야벳에게는 ‘창대’의 복을 주셨는데, 이는 넓고 많은 공간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야벳 족속이 널리 퍼지고 확장할 것이라는 번영의 복입니다. 이 복은 단순히 많은 인구와 넓은 영토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지적이고 문명적인 활동에도 적용이 됩니다. 노아의 이 축복은 야벳이 14족속의 선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10:2-5),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헬라 철학, 로마의 법률과 군사, 그리고 유럽의 근대 과학과 문명 등이 창달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받은 복은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즉 야벳 족속이 셈 족속의 종교적 특권에 동참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비록 얼마 동안은 야벳 족속이 셈의 종교적 장막을 떠나 거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셈의 후손으로 태어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셈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증거는 오늘날 유럽에 퍼진 기독교 정신과 문화입니다.
가나안에게도 한 가지 더 추가적 예언이 주어졌습니다. 가나안은 야벳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종교적인 복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 아니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종의 신세라도 주인의 장막에 더불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종교적인 복, 곧 복음은 빈부귀천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갈 3:28; 골 3:11) 모든 인류에게 전파될 것이며 누구나 받아 누릴 수 있는 복인 것입니다.
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950세로 아담보다 20년 더 살았고, 인류의 최고령자인 므두셀라보다는 19년 적게 살았습니다. 노아는 장수의 복을 받았고, 그의 생전에 바벨탑 사건과 인류의 분산을 보았을 것이며, 성경에 따른 연대를 계산해 보면 노아가 향년 950에 때에 아브라함은 58세가 되던 해입니다. 결국 경건한 의의 전파자로서 홍수 전후 시대에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산 노아도 모든 인생의 길을 따라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또 한 시대가 마감이 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려지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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