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으로 복 받는 새해 신명기 28:1-6
“복”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저나 여러분들 모두가 복을 많이 받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올해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가정과 또한 여러분들과 관계된 모든 곳에 큰 복을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먼저 ‘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잘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과 믿음과 신앙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복은 어떤 면에서 보면 ‘은사’와 동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교회에 봉사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주시는 것이 바로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물질적인 복입니다. 아마도 이 물질적인 복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이 물질의 복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 복이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을 받는 비결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루는 복은 ‘물질적인 복’입니다.
영적인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산다고 은혜적인 측면에서 말하지만, 교회 내에서나 목회자들 가운데에서도 이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도 매우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이 물질의 복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고 살고 즐기는 데에는 많은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좋은 옷, 좋은 가전제품, 좋은 생활용품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거의 다 장만하고 나면, 이제는 취미생활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겨울이니 돈이 많은 사람은 스키장에 가고, 돈이 좀 적은 사람은 눈썰매장에 가고, 돈 많은 사람은 최신 개봉영화 보러가고, 돈이 적은 사람은 집에서 비디오, 혹은 CD, DVD 빌려다 봅니다. 요즘은 골프 치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필드에 나가서 게임하고, 돈이 적은 사람은 스크린 골프라도 쳐야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즐기면서 살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따갑게 듣는 말들이 있습니다. ‘기복(祈福)신앙’이라는 말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불신자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비아냥거리는 표현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성도’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성도(聖徒)’라는 말 그대로 거룩한 생활을 하기보다는 그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만 교회에 다니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기도(祈禱)’는 교회와 성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세상적인 모든 종교에서 기도하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사람이 신에게 혹은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모든 존재나 자연 만물을 향하여 비는 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기도합니까? 복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합니까?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만 ‘기복신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실 기복신앙의 진수는 불신자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들은 아무리 기복신앙적인 복을 간구해도 괜찮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흉을 보고 책을 잡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는 모두 다 버리라고 합니다. 다 버리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는 그런 종교에서도 복 받기 위해서 절을 백번, 천번, 만번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스스로 그들 종교가 타락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런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또 들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할 때에 분명히 복을 주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믿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우리에게 기복신앙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에 각성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에는 그 받은 복을 좋은 곳에 사용하라고 주시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받으면 첫째는 내가 좋고 나를 위해 사용하지만, 거창하게는 국가와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도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즉 가난하고 힘없고 외롭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것에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희는 왜 복을 너희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용하느냐?”고 하는 책망이 바로 ‘기복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은 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복을 주셨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 정말로 주신 복을 나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에 대해서 또 한 가지 분명하게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왜 복을 받지 못하느냐? 왜 형통하지 못하느냐? 너의 신앙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럴 때에는 이런 반문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신자들이 성도들보다 더 형통한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열심 있는 신앙생활의 결과는 무슨 일을 하든지 형통하고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의 어려움이나 뜻하지 않은 재난이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일이 생기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하면 무조건 나태한 신앙이요, 죄를 지은 결과라는 결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성도들에게도 불의의 재난과 경제적 궁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의 신앙을 더욱 더 공고히 하도록 주시는 연단의 방편으로 그런 시련을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계속해서 베드로는 권면하기를 4:12-13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영적인 면을 강건하게 만들어서 더욱 충성하게 하기 위한 방편임도 알 수가 있습니다.
불신자가 물질적인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불신자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즉 해가 성도에게만 비취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에게도 비취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성도의 논밭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의 것에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연 은혜 혹은 일반적 은혜, 일반적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성도로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특별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수 중의 정수입니다. 기독교의 다른 그 어떤 교리들도 ‘구원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즉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곧 구원이요, 이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지 모릅니다. 이렇게 이미 천국 시민이 된 우리가 물질을 조금 적게 가지고 있다고 불신자 앞에서 기죽을 이유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너무 기가 죽을까? 너무 소침해지지는 않을까? 또한 “네가 나를 믿으니 나도 네게 복을 주마!”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 내가 네게 물질의 복으로도 보상을 해 주겠노라!”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구원의 복이요, 그 다음은 영적인 복이요, 그 다음이 물질적인 복이라는 것만은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시면서 한 가지의 조건 밖에 건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너에게 이것을 해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래?” Give and Take. 거래(去來)가 있습니다. 조건이 반드시 따라 붙습니다. 상대방에게 손해가 되는 것을 요구하고, 불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세상적인 조건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시면서도 복을 주신다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 조건은 바로 ‘순종’입니다. 1-6절에 나오는 복들은 하나님께서 각 개인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먼저 ‘생활의 복’이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3) 성읍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는 생활의 주요 장소입니다. 옛날에는 어떤 나라에서든지 생업을 하는 터전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반드시 논과 밭으로 나가야 하고, 어부는 강이나 바다로 가고, 임업을 하는 사람들은 산으로 가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일만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일을 하고 수확을 하였으면, 나와 내 가족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다른 물건을 바꾸기도 하고, 돈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친교도 하는데, 그 장소는 성읍입니다. 따라서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복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는 직장에서도 복을 받고 그 외에 친교나 휴식을 할 때에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올해는 말씀에 꼭 순종해서 성읍에서나 들에서나 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생의 복’(4)을 받게 됩니다. 자손의 번성으로 가문이 번창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창 22:17; 사 61:9) 요즘은 자식이 없는 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속담 중에 부정적인 것으로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식은 분명히 그 부모에게 면류관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전통에 살이 가득한 사람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않는다고(시 127:5)고 했습니다. 집안에 달랑 두 사람이 살면 젊을 때는 편하고 재미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외로움, 허전함, 부족함, 후회 같은 것들이 오기 마련입니다.
국가적으로도 중국을 보세요. 그들이 처음부터 그토록 큰 땅 덩어리를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의 서안 쪽은 대부분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위쪽에는 몽고, 서쪽으로는 티벳, 또 양자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이 대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다보니 처음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생계적인 측면에서는 힘든 점도 있지만, 그들이 장성하여 힘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개척을 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게 되고, 지금은 그 땅들에서 세계적으로 희귀한 ‘희토류’와 같은 광물 자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국가가 부강해지면 각 개인에게도 그 혜택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아랍권은 전세계를 무슬림화 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하면 자식을 많이 낳아 그들을 수출하는 것입니다. 즉 이민을 갑니다. 그들은 한 번 무슬림이면 영원한 무슬림이라 개종을 꿈도 꾸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무슬림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인구의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막강한 것입니다.
한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힘이 들지만 자식이 여럿이 보태면 부담도 적어지게 되고, 농사를 짓든 어떤 일을 하든지 여럿이 힘을 합하면 쉽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나쁜 일이 있으면 안 되지만 그럴 때에 힘을 합하면 쉽게 해결해 낼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적에게 수치를 당치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농업, 축산업에서의 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생산되는 모든 것들이 풍부하게 될 복입니다. 많은 생산으로 인하여 생활이 윤택해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우상숭배에 빠져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3년 반이나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왕상 18: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절히 내리셔서 토지를 적시어 농사가 잘 되고, 초지에는 푸른 풀들이 솟아나 가축이 살찌게 먹고 번성하고 젖도 풍부하게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는 토지 소산물을 담아 곳간에 넣어두는 그릇입니다. 떡 반죽 그릇이란 매일 필요한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 밀가룰 반죽을 부풀리는 ‘반죽 통’으로 매일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는 모든 그릇을 말합니다. 곳간에 있는 광주리마다 열매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릇에는 반죽이 부풀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풍부합니다. 이는 먹을 것 걱정하지 않는 안정된 생활의 복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집 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항상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임하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복이 오고 화가 오는 것은 각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인과응보로 주어지는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실 복과 내용을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나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받게 것입니다.
힘들 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등 그런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은 언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로마서 8:18에서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힘쓰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더욱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주님을 따라가며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세계 민족 위에 뛰어난 성도가 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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