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 왕국(The Kingdom of Messiah) 이사야 9:1-7
지난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경에 북한군은 연평도에 100여발이나 되는 포탄을 발사했고, 이로 인하여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을 입었습니다. 12월 20일에는 우리 군에서 사격 훈련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이러한 큰 사건으로 인하여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정상적인 사격 훈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응하는 공격을 한다는 보복성 발언을 하여 우리 국민들이 큰 혼란에 빠지기도 했고, 일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에서는 사격 훈련 자체를 하지 말라고 북한 편을 들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입니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모든 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그 나라의 국정 및 모든 생산물에 대하여서도 소유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승자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전쟁에서 패한 나라는 주권이 없어지고 맙니다. 내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한 번 전쟁에서 패하게 되면 그 나라는 거의 다 망가지고 맙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쓸 만한 사람은 포로로 끌려가서 적국의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노예들의 대부분은 학식이 있고, 체격도 좋은 대부분 부유층 혹은 권력층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국가 간의 전쟁만이 아니라 한 나라 안에서도 정당 간의 정권투쟁에서도 승리한 쪽은 막대한 권리를 갖게 됩니다. 기업과 기업의 싸움이 있습니다. 학교 간의 싸움도 있습니다. 불량배 집단 간의 대결도 있습니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싸움도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군대의 힘을 기르고, 경제적인 힘을 기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 간의 정보 싸움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아버지는 이 대학교, 어머니는 저 대학교, 자식은 또 다른 대학교에 각기 입시 원서를 들고 가서 경쟁률이 가장 낮아 합격이 가장 높은 대학교에 원서를 제출하려고, 무전기까지 동원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던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실정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이긴 자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민주주의도 역시 알고 보면 귀족들의 회의에 불과하였습니다. 전쟁은 이긴 자가 모든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이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을 길러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면 남의 힘이라고 빌려야 하는 것이 전쟁의 역사입니다. 전쟁 외에도 살인 방화 약탈 폭력 등은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있어서 안 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힘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힘의 논리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지만, 이 관점이 우리의 영적인 것과 절대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힘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무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가나안과 이방 나라들에게 큰 공포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저들은 최신 병거를 이끌고 전쟁을 하였지만 창칼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이스라엘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어린 나이에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 단 한 개로 쓰러뜨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힘과 덩치에서는 골리앗보다 더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키가 여섯 규빗하고도 한 뼘이 더 있었습니다. 무려 3미터나 되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다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하고 외치면서 물맷돌을 던질 때에 그의 이마에 박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아무 어린 다윗이라도 그가 강건하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과 대적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원리는 바로 육신과 영혼의 결합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말에서도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혼이 잘 되면 우리의 육신도 잘 되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논증이지만, 귀신들린 자가 있을 때에 그를 괴롭히면 귀신도 두려워합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의 알 수 없는 신비한 결합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영과 육이 동시에 다 강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신에는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고, 영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할 때에 균형적인 건강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영과 육 모두가 강건함으로 여러분은 꼭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악의 무리들과 같은 방식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하시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적인 힘의 논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고, 또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가 되면 이러한 세상적인 힘의 논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질 것입니다. 전쟁도 없을 것입니다. 악한 자, 힘 센 자, 간교한 자의 횡포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사야 65:25을 보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완전한 평화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천 여 년 전에 주님께서 이 땅에 아기로 태어나신 것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평화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에 맞서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실 분으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들은 주님께서 잡히시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실 때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면서, 죽음과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었습니다. 이것은 세상과 권세로부터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한 평화를 이루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부활하셨음에도 완전한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고 지금도 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요, 이것을 믿는 자는 완전한 평화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십자가의 군사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달음질이 끝나는 그 때가 바로 완전한 평화를 쟁취하는 날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개인적인 종말과 세상적인 종말입니다. 평화는 이 두 가지 모두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할 때에는 남유다가 전쟁의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였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의 침공으로 말미암은 위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그 위기 상황을 세상 제국인 앗수르에 의지하여 해결하려 하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대하여 적대적인 북이스라엘과 앗수르 제국에 대해서는 철저히 심판하시는 반면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통하여, 그리고 신실한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메시아 왕국“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공의와 평화의 나라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흥황하여가고 반면에 세상 나라는 철저하게 멸망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6절을 보면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는 “어깨에 맨 열쇠”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떤 뜻이냐 하면 “어깨에 다윗 집의 열쇠가 놓여져 있다.”(사 22:22)는 말씀과 같이 한 왕국의 고통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탁월한 모든 업무를 홀로 맡아 수행하는 왕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메시아께서 세상의 다른 군왕들과는 달리 스스로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탁월하고 성실하게 통치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기묘자라.” 기묘자는 “모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놀랍고 기적적인 분”을 의미합니다. 존귀함과 탁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자연 법칙을 초월해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세력을 멸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고 죽으사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신 신비로운 그 사역을 반영하는 이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기묘한 부화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였습니다(골 2:3).
“모사라” 모사는 지휘자, 가르치는 자, 의존자‘의 의미입니다. 죄악 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완벽한 계획과 방법을 가지고 계신 메시아의 온전하신 지혜를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이는 비록 육신을 입으셨지만 신성이 전혀 훼손되지 않은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라고 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필요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엡 1:17).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메시아의 신성과 전능성에 대한 호칭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결코 하나님으로서 찬양을 받기에 결코 걸림이 될 수 없으며, 연약한 그의 인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능하심으로 구원 사역을 온전히 이루신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신성과 전능성을 가지고 계시며 동일한 경배를 받으실 존재라는 것입니다(빌 2:10,11).
“영존하신 아버지라.” 아버지는 아들과 상대되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창조주’ 혹은 ‘보호자’를 뜻합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아께서 바로 영원하신 창조자이시며, 선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보호자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5-17을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평강의 왕이라.” 메시아께서 행하실 사역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타락으로 인해 진정한 평강이 깨져 버린 인류에게 영원히 변치 않을 평화를 주시려고 오시는 분이십니다.(롬 5:1;빌4:7;골3:15).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통한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평화와는 다른 십자가의 구원을 통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그리고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이룰 영원한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적인 거짓 평화에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적인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통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완전한 평화로 다스리실 분이십니다. 억압과 착취와 불공평과 부정의가 없는 나라로 만드실 분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원수로부터 보호하셔서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강한 질투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평화를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말세의 징조이기 때문에, 이럴 때 일수록 성도는 말세에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를 굳건히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성경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성도를 그의 강한 팔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내일도 말세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를 위하여 오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롬’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뜻인데,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의 승리 후에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이는 실제 전쟁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심은 곧 평화를 주심입니다. 우리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 싸움은 영적인 것을 포함하여, 세상적인 것들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다만 성도로서의 정당한 방법을 통하여 싸움을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의 차이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와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마음에 모시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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