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 제30장 강해 -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chukang 2010. 11. 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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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제30장 강해 -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제27장부터 30장까지의 제3차 고별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면서 신명기 전체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 1-10절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타국의 포로가 되었을 때라도 만약 다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이스라엘의 옛 지위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 것이며,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복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11-1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의 준수가 결코 혹독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며, 마음만 있으면 지킬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그 상반된 결과를 제시하면서 순종의 자세를 가다듬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자발적인 순종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 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앞에서 언급한 모든 복과 저주가 임할 때 이스라엘이 그것을 표적과 감계(28:46)로 삼아 여호와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추방되어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라도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계신다는 표적으로 다시 복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기억이 나거든” 기억이 난다는 히브리어는 ‘하쉐보타:השבת’는 ‘돌아가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스스로 깨닫게 하다’(왕상 8:47)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한 복과 저주가 강한 자극제가 되어 과거 자신이 행한 범죄에 대해 자복하고 현재의 자신의 생활 전반에 걸쳐 반성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스스로 마음의 회개를 한 사람은 또한 실천적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와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참 회개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골 3:1-10). 순종하는 삶의 근본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인격적인 사랑(6:5; 마 22:37)은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지 어떤 요구를 하시든지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됩니다.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포로(쉐부트:שבות)’는 문자적으로 ‘돌이킴’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돌리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브:שב’는 ‘쉐부트’와 같은 ‘슈브:שוב’에서 나온 것으로 ‘돌아갔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여호와께서 너의 돌이킴을 위해 돌아갔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개한 자에게로 돌아오셔서 그의 돌이킴(회개)가 헛되지 않도록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돌아온 자들의 고통을 멈추게 하사 그의 긍휼하신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비로소 회개한 자들의 고통과 고뇌는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욥 42:10; 렘 30:8; 겔 16:53). 이렇게 돌아온 자들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은(마 23:37) 것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에 흩어버리는 것의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열국 백성 가운데서 산산히 흩어졌지만(시 44:11, 렘 29:18)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시 모으셔서 회복시키는 것은(렘 28:4, 29:14)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과 사랑 때문입니다.

 

4: 너의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이는 반드시 모으시리라는 강조적 과장법적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방, 곧 땅 끝에서 온 알지도 못하는 민족(28:49)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회개한 자를 불러 모으실 때도 땅 끝에 흩어져 있는 포로들까지도 모으실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능력의 무한하심을 동시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로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은 땅의 회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언약의 3대 요소가 바로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의 소유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창 12:1-3)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의 회복은 열국의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상징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소유를 예표하는 것입니다(출 19;5). 따라서 이같은 사실은 후에 포로 귀환의 소망을 더욱 강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스 2:1-70; 7:1-10; 느 2:9-11). ‘네 열조보다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여기서 열조는 출애굽 세대를 가리키며, 번성은 야곱의 가솔 70명이 장정만 계수하여 60만이 넘는 엄청난 수로 배가된 것을 연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번성을 뜻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그만큼 팔레스타인 땅에서 번성한 적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타국에 흩어져 있거나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영적인 뜻으로 메시아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번성과,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일으키게 되는(암 9:11,12; 행 15:15-17) 이스라엘의 마지막 구원에 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서 그 언약에 순종할 것을 약속하는 표시로 행한 것입니다(창 17:10,12; 출 12:48). 할례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확인하고,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주권자가 되심을 스스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할례 의식은 자칫 외형적 의식으로 인식되어서 ‘우월한 선민사상’으로 그치거나, 또는 이방 민족에 대한 무조건적 배타성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영적 “인”을 치는 것입니다(출 28:11; 폼 4:11; 고전 9:2). 육적인 할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국한 되었다면 마음의 할례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 성령께서 인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통해 완성될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히 8:8;-13; 9:15; 10:16).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마음의 법을 기록하며 그 백성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겔 36:26,27), 백성들은 스스로 겸비하게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음의 할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창 12:3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것의 성취를 말하는 것으로, 저주가 이스라엘로부터 그 대적과 핍박하는 자에게로 극적으로 전환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즉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떠날 때에 받는 저주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더 이상 쏟아지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가 죄 없는 열방에게 아무런 연고 없이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패된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의 저주를 당하는 것입니다(사 13-21장). 따라서 원수의 악을 징벌하시고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너’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의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9,1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본래 가나안 땅에서 받기로 약속된 모든 복을 받게 될 것임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영육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될 때에 영적인 복과 함께 현세적인 복도 동시에 풍성하게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를 다시 기뻐하사’ 마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 기뻐하는 자‘(마 3:17; 17:5)라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당신의 기뻐하는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완전한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조건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다시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결코 어렵다고 변명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 11:30)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교훈입니다.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명백하게 게시된 것들임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늘의 법이지만 땅에 있는 인간들에게 이미 드러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율법주의의 어려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나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롬 10:1-9).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율법은 우리의 실제 생활과 상관이 없는 접근이 불가능한 먼 곳에 있는 것(사 45:15)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구체적인 교훈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딤후 3:16, 17). 또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거나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초인간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토론하여서 실제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방법들을 강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본 절은 12,13절을 요약한 것으로 율법의 준행은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일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친 율법주의나 지식을 추구하지 말 것을 가리킵니다.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 즉’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시 19:10).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적으로 이해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롬 10:10). 또한 구약적인 배경 속에서 이를 이해하면 자녀교육(6:4-9)을 통하여 말씀을 항상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신약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아름다운 전도자의 외침이 어느 곳에서나 있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율법은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진실하게 믿는다면 아예 처음부터 그 말씀을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 그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에 말씀을 싫어하는 자들은 행하기도 전에 이해하기 어렵거나, 하늘 위에 있어서 너무 멀리 있으며, 바다 밖에 있어서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변명한다는 의미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모세는 본 절에서 이스라엘 앞에 예비 된 두 길, 즉 생명과 복의 길과, 사망과 화의 길 가운데 어느 길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은 스스로 택하는 길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릴 수밖에 없음을 언명하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궁극적인 결과를 말하며, 화와 복은 현세적인 저주와 복의 결과에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은 이 땅에서의 말씀 순종 여부에 따라 결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성경은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요 14:6).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계명을 실행하는 첫 번째 원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36-38).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고 그 계명을 지켜 행하지 않는 자는 곧 거짓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 15:10).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요일 2:5; 3:24).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기하는 결정적인 범죄는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에게로 향하는 것으로 이것은 영적 간음이며 배신행위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필연적으로 사망의 길이 예비 될 것입니다.

 

18: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선언한다는 히브리어는 ‘나가드:נגד’로 원뜻은 ‘정면에 두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입장이나 견해에 대해 반대 견해를 정면적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강한 확신과 신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죄악을 저지른 경우 반드시 멸망할 것임을 선포하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자신의 전인격을 다하여 확신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을 선택할 것을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모세는 자신의 설득을 좀 더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천지로 증거를 삼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처지가 요지부동한 것처럼 복과 저주의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며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과 그 후손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증거 할 수 없는 때에는 천지가 증거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이는 현재의 선택이 자손들에게까지 중차대한 영향을 미침을 보여줍니다. 이는 조상들의 죄나 선행이 직접적으로 자손들에게 상급이나 벌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겔 20:1-8) 조상들의 삶의 양식과 교육이 자손들에게 생명과 죽음을 좌우할 만큼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附從)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부종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ק’로 연합하다, 밀착하여 달라 붙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창 2:24)과 동일한 의미로, 히스기야의 삶이 이와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 18:6). 즉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연합하여 친밀한 교제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네 생명이시요’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