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 제32장 강해 - 모세의 마지막 노래

chukang 2010. 12. 18.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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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제32장 강해 모세의 마지막 노래

 

  모세는 죽음 앞두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율법을 지킬 것을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염려하셨던 것은 가나안 정복 자체가 아니라, 가나안 정착 후 이스라엘의 배교였습니다. 그 배교의 내용을 모세는 성령의 감동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본 장의 내용입니다.

  1-4절은 서로 부분으로 여호와의 말씀의 본질과 그 분의 공의의 속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생명을 얻지만 불순종하게 되면 죽음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을 교훈합니다. 5-14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비가 되시며 온갖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5-25절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 인해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교만해져서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배교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26-43절에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에 대적들을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대적들이 자만하여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또 그것이 여호와의 징벌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단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되면, 그 도구들도 역시 징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4-47에서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노래에 대한 적절한 보충 설명이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48-52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임종을 앞 둔 모세에게 염하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에게 느보 산에 올라가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가나안 전역을 두루 살펴보게는 하셨으나 새삼 그의 범죄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사실을 숨김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노래의 서두에서 천지를 부르는 것을 그 내용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노래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한편으로는 천지를 증인으로 삼는 것은 여호와의 창조물이며, 모든 열방의 신보다 뛰어난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율법의 명령과 규례에 불순종하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인으로 세워진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와 그들의 반역을 증거해 줄 것입니다.

 

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가는 비와 아침의 이슬에 말씀을 비유하여,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에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표현하였습니다. ‘내리는 비’는 빗물이 하늘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특성으로 표현하여 이 교훈의 말씀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온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맺히는 이슬’은 마치 안개가 대기를 감싸며 풀잎에 맺혀 촉촉하게 적셔 주듯 여호와의 교훈이 영혼을 소생케 하며 생동감을 일으키며 또한 삶 전체에 배어 있어서 활력을 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는 비’ 이는 실가랑비를 가리키는 말로 연한 풀잎에 묻는 먼지를 씻어주고 생명력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죄를 씻어주며 부드러운 생명력과 감화력을 주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 비’는 때때로 ‘소나기’, ‘많은 비’를 가리키기도 하는데(시 72:6; 호 6:3) 주로 여름 가뭄 때에 대지를 흠뻑 젹셔 모든 식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을 가리킵니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전파하다(카라:קרא)”는 말은 ‘부르다,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고 찬양할 때 백성들도 화답하여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 것을 권고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엄(고델:גדל)’은 ‘큼, 고귀함’이라는 뜻으로 영광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시 29:1,2; 96:7,8)

 

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반석(추르:צור)’은 사막의 모래산과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제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어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여행자들을 보호해 주는 안전한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심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하심을 나타냅니다(창 39:24).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반석이라고 표현한 곳은 약 18회나 됩니다. 고전 10:4에서는 ‘신성한 반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덕이 완전하고’는 그의 일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흠이 없고 순결하며 구부러짐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길이 공평하여’ 그가 하시는 일이 완전한 이유는 그가 일하시는 모든 방법이 공평하고 공의롭기 때문임을 나타냅니다. 공평(미쉬파트:משפת)은 법률적으로 선언된 공의로운 판결을 가리키며,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편벽됨이 없는 정의를 나타냅니다. ‘진실무망하신’ ‘신실하시고 악함이 전혀 없으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공의로 심판하심에 있어 전혀 게으르거나 불의가 없으심을 증거하는 말입니다(삼상 15:29; 욥 14:10; 시99:4).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이스라엘은 사악한 행위로 하나님께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완고하고 패역한 세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이 인간을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잘못되어 비뚤어지고 비꼬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6: 우매 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이처럼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학대와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너의 아버지’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언약과 율법을 주고 가나안 땅을 상속할 확실한 후사로서 준비시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하셨습니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가 이르리로다.

  옛날과 역대의 연대, 곧 한 세대 한 세대가 지나온 세월은 아브라함 때부터 출애굽, 그리고 광야 시대부터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를 가리킵니다. 곧 아득한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어 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어떠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그 아비와 어른들에게 묻고 마음 속 깊이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대,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열국은 이방 나라를 포함하여 여러 나라의 민족과 백성이며, ‘주다’는 것은 분배하여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즉 모든 민족이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인 땅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께서 열국들을 시작하게 하셨으며 간섭하신다는 것과, 또한 각 민족마다 분깃으로 받은 고유한 땅에서 살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입니다. ‘인종을 분정하실 때’ 분정하는 것은 흩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각 민족으로 세상에 흩어져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세상 모든 국가와 민족들에게 땅을 정하신 뜻대로 나누어 살게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에게도 그 자손의 수효에 적합하게 분깃을 나누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야곱은 이미 뱃속에서부터 택함을 받은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줄로 정확히 측정해 놓은 것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가운데 특별히 구분해 놓은 하나님의 소유된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황무지는 황량하고 황폐한 땅으로 애굽을 상징하며 광야는 짐승이 우글거리는 척박하고 위험한 사막으로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연상시킵니다. 황무지와 광야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위험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기억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곳에서도 이스라엘을 눈에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방법을 독수리가 그 새끼들을 돌보며 키우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잠을 깨우며 분발시키는 독수리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가짐과 훈련의 기초 단계를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새의 날개 치는 모습입니다. 새끼가 날려고 할 때 떨어지려고 하면 당장 그 강한 날개로 감싸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미가 새끼 곁에서 날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새끼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날개 짓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높은 공중에서 새끼를 떨어뜨렸다가 급강하하여, 다시 날개를 펴서 새끼를 안전하게 받는 것입니다. 강하고 튼튼한 날개를 갖도록 이런 훈련을 수없이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연단하시기 위하여 애굽의 참혹한 종살이와 광야 생활을 겪게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있습니다. ‘업는 것 같이’ 새끼를 적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고 구출시키는 돌봄의 표현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온갖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안전한 곳에 옮겨 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인도하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과, 또한 그들의 반역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든지 변명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른 신’은 ‘낯선 신’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13: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본 절과 다음 절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누리게 될 풍요로움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높은 곳ㅎ은 통치자, 주인이 거하는 자리나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타고 다니다’는 것은 그 땅을 소유하여 지배하며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을 다스릴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이 이렇게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지위를 얻게 된 사실에 대한 찬양입니다.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자갈과 반석이 많은 가나안 땅에서 조차 복을 받아 많은 소산물을 얻을 수 있게 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의 바위틈에서는 야생 꿀 이 많이 나오고, 자갈이 많은 척박한 땅에서도 감람나무가 자라며, 산지에서는 포도와 무화과나무 같은 유실수들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14: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소의 젖’을 응고시켜 주로 치즈나 버터를 만들어 먹고 양이나 염소의 젖은 그냥 액체 상태의 우유로 마셨다고 합니다. ‘어린 양의 기름’은 최상품의 어린 양을 가리킵니다. ‘기름’은 가장 좋은 것을 가리킬 때 쓰는 상징어입니다. ‘바산 소산의 수양’ 바산은 요단강 동북부에 위치한 비옥한 고원 지대로 목초지가 넓고 물이 풍부하여 목축이나 곡물 재배가 잘 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키운 수양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밀’ 이것은 콩팥의 기름이 희생 제물의 가장 좋은 기름이므로(레위 3:4, 10; 4:9) 밀 가운데서 가장 풍성하고 영양가 있는 것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포도즙의 붉은 술’ 포도를 짜서 즙내어 발효시킨 술입니다. 술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것은 술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듯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최고의 기쁨으로 풍족하게 채울 것임을 가리킵니다.

 

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여수룬’은 ‘의롭다, 정직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의인’(민 23:10), ‘정직한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하신 백성이라는 뜻으로서 사용하고 있습니다.(33:5, 26; 사 44:2) 이렇게 여수룬이란 별명을 부름으로써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냄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배신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사악한 가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찌매 발로 찼도다.’ 이는 마치 육축이 잘 먹고 살이 쪄 비대해지자 더 이상 주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6:11; 8:10; 31:20), 이스라엘의 배신이 어리석은 육축의 행위와 동일한 것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즉 어리석게 행동하다, 조롱하다는 ‘나발:נבל’이라는 단어로,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의 보호하심을 믿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어리석은 행위를 꼬집는 말입니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우상 숭배로 인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에 대한 지적입니다. 우상 숭배로 결혼 관계보다 더 단단히 매여져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가증한 것으로 심판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의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므로 여호와의 질투(4:24;5:9;6:15)와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입니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드려야하는 섬김의 제사를 헛된 우상에게 팔아버리는 배교 행위에 빠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마귀:쉐딤(שדים)’는 ‘지배하다’는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주(Lord:바알)'라는 뜻과 같은 말입니다. 이러한 마귀는 선택된 백성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곧 전혀 무가치하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고전 10:20). ’근래에 일어난 새 신‘은 주변국의 이방신들을 가리키며, 또한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최근에 새롭게 생겨난 발견된 신들을 가리킵니다.

 

18: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

  15절의 반복입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세우신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낳다:얄라드(ילד)’는 반석의 하나님이 그들을 부성적인 사랑으로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상관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식이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아무런 존경심을 표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패륜입니다. ‘너를 내신’ ‘내신:훌(חול)’은 진통을 겪는다는 것으로 어미의 뱃속에서 아이의 형태가 조성되는 것에서부터 진통하며 해산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은 해산의 고통으로 이스라엘을 낳으신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나타냅니다.

 

19: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케 한 연고로다.

  ‘보시고(야레:ירא)’는 ‘두려워하다’ ‘놀라다’는 뜻으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이 자기를 버리고 가증한 우상을 숭배한 사실에 대하여 크게 분개하시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미워하셨으니(나아츠;נאץ)’는 ‘경멸하다, 혐오하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기로 결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20: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종류요 무신한 자녀임이로다.

  ‘무신한(에문:אמן)’은 신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신의가 없는 불신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내려질 것은 그들의 완악함과 불신실함에 대한 멸망과 저주의 심판입니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질투를 격발시키며 아무 것도 아닌 것(우상)으로 하나님을 모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모든 사랑과 복을 다른 민족에게 주어, 이스라엘이 시기하며 질투가 나도록 만들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은 다른 측면에서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됩니다(롬 10:19; 벧전 2:10).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잘났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마 3:9)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2: 내 눈의 물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음부(쉐올:שאול)는 죽은 자들이 가 있는 지하 세계로 이해가 되었습니다(창 37:35; 욥 26:5). 그리고 이것이 더 발전하여 ‘사후 세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데스(ἅδης)’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담긴 심판은 주의 적들을 음부로 몰아 영원한 불꽃과 끝없는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쏘다(칼라:כלה)’는 ‘끝내다, 멸망시키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전사처럼 재앙이라는 화살을 쏘되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극심한 분노를 나타냅니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파리하며 불같은 더위와 독한 파멸에게 삼키울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23절의 ‘화살’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인한 심한 굶주림과 각종 질병, 전쟁, 들짐승과 독충의 재앙입니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청년 남자와 처녀와 젖 먹는 아이와 백발 노인까지리로다.

  전쟁으로 인하여 남자들은 칼레 죽고, 성 안에 부녀자들이나 노인들은 전쟁의 공포로 인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전쟁에 패배하고 외부와 교통이 단절된 성안에서 얼마나 비참한 일이 발생하는지는 이스라엘의 후기 역사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왕하 6:24-29; 애 1:20).

 

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인간에서 그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다마는

  ‘흩어서(파아:פאה)’는 ‘숨쉬다, 입김을 불다’는 뜻으로 마치 먼지나 재를 입으로 훅 불어버릴 때 완전히 흩어지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파멸시키고, 없어져서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27: 대적을 격동할까 염려라 원수가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라 하시도다.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것 때문에 대적들이 자극을 받아 교만할까봐 염려하심을 뜻합니다. 즉 대적들이 스스로 교만해져 강함과 지혜로운 전술을 자랑할 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백성 가운데 남은 자들과 그 후손들이 전혀 여호와의 심판을 알지도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열국도 여호와의 존재하심을 완전히 망각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29:24-29 참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해하고 말하기를 우리 수단이 높음이요’ 이 말은 이방국들이 오해하는 것은 여호와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주요 원인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교만 때문입니다(사 10:12-14). 곧 마음으로 교만하고 또 자기들의 군사력과 전략이 뛰어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여기서는 이방국이 그처럼 오해하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비참하게 멸망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율법이나 교훈의 말씀에 대한 신중함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모략(에차:עצה)’은 충고, 계획, 신중함, 목적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의 탄식처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는 말로써 표현이 됩니다(호 4:6).

 

29: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배신하게 될 때 당할 심판이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였다면 이처럼 열국의 조롱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말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지혜(호크마:חכמ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는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현대의 물질 만능주의와 이데올로기 등의 우상을 따르지 않도록 하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

  ‘내어주다(사가르:סגר)’는 자기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뜻입니다. 반석이 되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이요 분깃인 이스라엘을 포기하여 대적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패망시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의 문제는 반석의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헛된 우상을 섬겼지만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31: 대적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못하니 대적도 스스로 판단하도다.

  ‘대적의 반석’은 대적들이 믿고 의지하는 이방신입니다. 대적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자신들이 믿는 우상과 다르다는 사실, 곧 하나님의 크고 무서운 힘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출 4:25)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고백은 결코 아닙니다.

32: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에 비유되지만 여기에서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사악한 열매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쓸개포도 즉 그 결과가 독하여 치명상을 입게 될 이스라엘의 죄악된 행위를 맺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쓸개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치명적인 뱀의 독에 비유된 것은, 이스라엘이 그 포도주에 취해 더욱 악한 범죄에 빠진다는 것입니다(사 29:9;51:21; 렘 23:9; 51:7). ‘뱀(타닌:תנין)’은 해상이나 육상의 괴물로 ‘바다뱀’ 또는 ‘들개’를 가리키며 ‘독사(페텐:פתן)’은 살모사와 같이 한 번 물리면 곧 죽게 되는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는 뱀을 가리킵니다.

 

34: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이것’이란 부패로 인하여 징벌이 쌓여진다는 의미에서 뱀의 독으로 비유된 포도주, 즉 이스라엘의 죄악입니다. ‘쌓다’는 ‘저장하다’는 의미로 35절에서 ‘봉하다’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스라엘의 부패와 죄악이 곳간에 임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 계속 쌓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징벌의 심판이 하늘 곳간에 저장되어 보관되다가 때가 되면 그들 위에 쏟아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곳간(오차르:אצר)’은 하늘을 가리킵니다.

 

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모든 심판의 결정권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때가 되면 봉해졌던 심판이 그들 위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심판을 현재까지는 연기하고 있지만, 그 일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마땅히 시행할 것이기에 최후의 날에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실족할 때가 어느 때를 의미하는지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재난이 시작될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재난을 당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응징자로서, 심판자로서 그 재난을 가중시키며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패하고 악한 반역에 대한 징계로서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3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판단한다’는 것은 참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을 분명히 가려내어 징벌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은 패역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진실 되고 참된 백성을 구별해 내십니다. 롯을 구원해 내시듯이 심판 가운데서도 의로운 자들은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도 포함하고 있습니다(벧전 4:17).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 ‘후회(나함:נחם)’은 원래 한숨을 쉰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의 상태를 보고 후회함을 의미하나 동시에 동정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 전체를 판단하신 결과 그들의 죄악이 너무 커서 의로운 자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의 종들 때문에 이스라엘을 측은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렘 31:20). ‘갇힌 자나 놓은 지가 없음을 보시는 때’ 여기서 ‘갇힌 자’는 전잰 중에 성읍에 갇혀 있는 자, 또는 포로가 된 자를 가리킵니다. ‘놓인 자’는 노약자 등을 포함하여 성읍에 남은 자유로운 자입니다. 혹은 종이나 자유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성읍 안에 생존한 자들이 거의 없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며, 하나님께서 보시는 때는 이스라엘이 힘과 기반이 전혀 없어 불쌍히 여기시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37: 여호와의 말씀에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그들의 피하던 반석이 어디 있느냐.

  그들의 신들이란 어리석게도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각종 우상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때에 이스라엘이 섬기는 우상들은 아무런 힘과 도움이 되지 못하는 헛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38: 그들의 희생의 고기를 먹던 것들,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로 일어나서 너희를 돕게 하라. 너희의 보장이 되게 하라.

  이스라엘이 헛되이 섬겨 바친 희생 제물과 제사의 술을 먹고 마신 우상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즉 제사할 때에 제단에서 태워지는 동물의 기름진 부분과 제단에 부어진 술을 말합니다. 거짓 신들에게 바쳐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섬기던 신들로 하여금 너희를 위하여 도움이 되게 하고 너희의 피난처가 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숭배하던 신들이 재앙과 환난 가운데서 구원시키기는커녕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는 헛된 신을 섬기는 어리석음에서 돌이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여호와만이 유일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여호와와 비길 만한 신은 그 어디에서 없음을 이스라엘에게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행하심을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우상을 섬겨서 다시금 재앙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아올 대에는 다시금 구원의 삶을 주신다는 은총의 약속입니다.

 

40: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나의 영원히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들고 말하노라’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표현(신인동형동성론적)입니다. 일반적으로 맹세를 할 때는 자기보다 큰 것을 두고 맹세하게 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맹세는 결코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습니다(사 2:1).

 

41: 나의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에 심판을 잡고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할 것이라.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마치 병사가 손에 칼을 잡고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실적인 징벌이나 파멸, 또는 심판에 쓰이는 무기는 아닙니다. 심판의 주권성과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의 대적에게 보수하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교만한 자들을 하나님은 대적하십니다(벧전 5:5).

 

42: 나의 화살로 피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피살자와 포로 된 자의 피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화살과 칼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행해지는 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포로 된 자의 피’ 일반적으로 포로의 목숨은 살려주는 것이 국제법상 관례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포로 된 자들에게까지도 임할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이는 통치자들의 목숨까지도 파멸시킨다는 뜻이므로 모든 백성들이 멸망을 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43: 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여호와를 분명히 알고 여호와를 찬양하게 되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즉 바알 신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왕상 19:18)과 같은 의인들과 함께 동참하여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결국은 여호와와 그의 백성 간에 화목이 이루어 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예표합니다.

 

44: 모세와 눈의 아들 호세아가 와서 이 노래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여 들리니라.

  ‘호세아’는 ‘예호슈아(יהושׁע)’의 단축형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의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입니다.(민 13:8, 16).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가 붙인 이름이며 본래는 호세아로 불렸습니다(민 13:6).

 

45,46: 모세가 이 모든 말씀을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모세의 노래’가 담고 있는 이 말씀은 율법에 순종하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당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명심하여 지켜야 함은 물론이며 그 자손들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때문에 교육의 의무가 더욱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6:7;11:19).

 

47: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인하여 너희가 요단을 건너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아무 쓸 데 없는 무익한 말이 아니라 생사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결코 식언치 아니하시며(민 23:19) 한 번 맹세하신바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신다는 단호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가나안 땅에서 장구하게 살 것입니다.

 

48: 당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래를 가르친 바로 그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시 확인을 받습니다(민 27:12-14).

 

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요단 동편에 위치한 산맥이 ‘아바림’이고 그 산의 가장 높은 곳이 ‘느보 산’(해발 800m)입니다. 팔레스타인 전역을 살펴보는 데는 이곳이 최적지며 청명한 날에는 멀리 예루살렘까지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50: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호르 산은 가데스 바네아 북동쪽 13km 지점에 있는 에돔 변경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모세의 형 아론이 죽은 곳입니다(민 20:22,27). 모세는 느보 산에서 가나안 전역을 살펴보고 거기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미래를 예고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모세는 영원한 안식처에 들어갈 것입니다.

 

51,52: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여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고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한 번 므리바에서의 모세의 잘못(민 20:2-13)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다분히 위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의 아픈 심정을 이해하신 하나님의 깊은 애정의 표현입니다. 이때에 모세는 비록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땅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히 11:13)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온유함으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한 것(벧전 3:15)에 대해 회개하면서 겸손하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