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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18편 강해 - 즉위 감사 찬양

chukang 2010. 11. 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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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18편 강해 - 즉위 감사 찬양

 

  한낱 목동이었던 자신을 택하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많은 연단을 거친 후에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하는 시입니다. 이 시는 일평생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한 용사로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속에는 다윗의 자만보다 승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 과 구원의 역사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인생들은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말씀에 순종하여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3절은 승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다윗 자신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표현하고 있으며, 4-28절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장엄한 묘사와 의를 행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에 대해 노래합니다. 29-50절은 시인 자신의 승리와 대적의 패망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인한 것이라는 고백과 이로 인한 감사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노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랑(라함:רח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 것과 동일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힘’이 되셨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보호하심과 긍휼히 여기시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표현인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하고 마는 그런 일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은혜가 있다고 할 때만 고백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겨 있는 다윗이요, 다윗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감복하였고, 동화가 되어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힘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는 단어로 비유하여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은 대부분이 군사적인 용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피신 생활을 할 때(삼상 22:5; 24:1,23) 또한 일국의 왕으로서 주변국들과의 많은 전쟁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군대 장관처럼, 때로는 피할 요새와 같은 구원을 베푸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뿔(horn)'은 대개 힘과 권위와 명예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대적을 무찔러 승리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3: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 표현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찬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피조물은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5: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사망의 줄과 음부의 줄, 사망의 올무라는 모두 같은 의미를 단어를 나란히 제시하여 그 의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대적(大敵)으로부터 당한 환난이 극심하여 죽음의 위기까지 이르렀었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또한 ‘얽고, 두르고, 두렵게 하다, 이르렀도다.’라는 표현은 점진적인 표현으로 점점 더 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전(殿)’ 즉 성전이라는 단어인데, 다윗 시대에는 성전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흠집 내고자 하는 자들은 다윗보다 후대에 지은 시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무엘 시대에도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해 둔 성막(tabernacle)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므로(삼상 1:9; 3:3) 일고의 신빙성이 없습니다. 또한 ‘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의 처소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사냥꾼의 올무에 잡힌 짐승과 같은 위기 중에도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했을 때 곧 여호와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던 과거의 경험을 회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7: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

  다윗의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는 땅을 진동시키시고 산이 요동하는 것으로 대적들에 대한 진노를 나타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출 19:16-19). 자신과 관계가 없는 내용을 빌어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8: 그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이것은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마치 사람이나 기타 동물들의 모습으로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으로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습니다.

 

9: 저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 말 아래는 어둑 캄캄하도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에 산 위에 구름이 빽빽하게 드리워지고 그 아래는 흑암에 휩싸였던(출 19:16) 것에 빗댄 표현으로 대적들에게 진노를 발하시기 위해 저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흑암은 대적들에게는 공포를 상징합니다.

 

10: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그룹’(cherubim)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적 피조물인 처사들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보좌하며 수종드는 존재로 그 기능과 모양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출 24:22; 민 7:389; 삼상 4:4; 대상 93:6; 시 80:1; 겔 1:16).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룹을 타고 날으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절대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바람 날개로 높이 뜨셨도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펴 공중 높이 떠 있다가 쏜살같이 땅으로 내려오는 표현입니다.

 

11: 저가 흑암으로 그 숨는 곳을 삼으사 정막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죄 있는 인간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 거룩하심과 엄위하심을 흑암, 장막, 구름으로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살아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만일 보게 되면 죽임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출 19:21).

 

12: 그 앞에 광채로 인하여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雨雹)과 숯불이 내리도다.

  빽빽한 구름은 먹구름이며, 그 구름 사이에서 번개가 치고 우박이 쏟아지는 상황을 악인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고 맹렬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 내린 10대 재앙에 포함되어 있으며(출 9:24), 다윗의 대적 자에게 임하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번개가 번쩍인 후에는 곧 이어 들려오는 우렁찬 천둥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비유하여 하나님의 위엄을 강조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14: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번개를 여호와의 심판의 화살로 묘사하여 대적들을 신속하게 파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5: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에 바다를 가르신 이적을 연상하게 됩니다.(출 15:8). 꾸지람은 대적들을 향한 하나님의 엄위하신 호령이며, 콧김은 대적들을 향해 분을 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말합니다. 물은 시인을 둘러싼 대적들의 큰 힘을 말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대적들에 의해 사면초가에 빠져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6: 저가 위에서 보내사 나를 취하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 내셨도다.

  앞 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대적들을 많은 물료 표현하였고, 익사 직전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7: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여고로다.

  다윗의 원수는 대표적으로는 사울이지만, 그 외에도 압살롬이나 다윗의 일생 동안 그를 대적한 모든 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18: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닌 다윗이 자신들의 대적들로 인해 극도로 위기에 이르렀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반드시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확고하게 가질 수 있었다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19: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

  넓은 곳은 안심하고 뛰어다닐 수 있는 자유스러운 곳(욥 36:16)을 의미하고, 좁은 곳은 절벽 옆으로 난 좁고 위태로운 길입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만 해안 지대와 그 밖의 몇몇 지역에서만 평야를 볼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지형적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넓은 곳(평야)은 실로 이스라엘이 정착하기를 의망한 안전한 삶의 터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신 이유는 자기를 기뻐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자신을 구원하시고자 선택하셨고 계속적으로 사랑하셨음을 믿는 시인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또 장래까지 변함이 없이 사랑하고 계셨으며, 또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20: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인간에게 ‘완전한 의’는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자들과 악인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의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과 우리 성도들의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롬 3:28)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다윗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보시고 공의의 보응을 베푸셔서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삼상 24:19).

 

21: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의 도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모든 인생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임을 나타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악하게 배신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죄를 범한 때도 있었을 것이며, 또는 알고도 지은 죄가 있기는 하지만 배교(우상숭배)와 같은 악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적인 면에서 죄를 지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22: 그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규례’, ‘율례’는 모두 율법과 같은 뜻입니다. 엄격히 구별을 하면 규례는 공의의 법, 율례는 계약 내용을 기록한 문서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내 앞에 두었다는 것은 율법을 삶의 지표로 삼아 의를 행하였다는 뜻이며,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다 지켜 행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으로 성실하게 지켰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23: 내가 또한 그 앞에서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

  시인은 계속하여 자신의 의로움과 완전함을 주장합니다. 전혀 죄와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심입니다. 자신은 죄에 바지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죄의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며, 성화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4: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 목전에 내 손의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앞의 20절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25: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베푸시는 공의의 보응과 원리에 대한 내용입니다. ‘자비한 자(하시드:חסיד)’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수평적으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경건하고도 신실한 자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자’는 23절의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즉 피조물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합당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26: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깨끗한 자(나바르)’는 ‘분리된 자’ 즉 자신을 스스로 죄악된 세상과 구분하여 악을 멀리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런 자가 바로 ‘성도’ 즉 구별된 자입니다. ‘사특한 자’는 생각이 바르지 못하고 비뚤어졋으며 언행이 바르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시 101:4). 의인에게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악인에 대하여는 그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곤고한 백성’과 ‘교만한 눈’ ‘구원하시고’ ‘낮추시리이다’를 각기 대조하여 표현하는 것을 ‘반의대구법’이라고 합니다. 26절에서도 ‘깨끗한 자’와 ‘사특한 자’, ‘주의 깨끗하심’과 ‘주의 거스리심’이 각기 대조되는 ‘반의대구법’이 사용되었습니다. 25절에서는 ‘자비한 자’와 ‘완전한 자’, ‘주의 자비하심’과 ‘주의 완전하심’이 대구를 이루는 ‘동의대구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나타내고 높이는 교만한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꺾으실 것입니다.

 

28: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흑암 속에서 밝히 빛나는 등불은 안전과 구원을 의미하며, 영광과 존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위기 중에 처해 있던 시인을 구원하사 존귀하게 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세상 어둠의 권세로부터 성도를 구원하실 사실의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용사들이 적진을 뚫고 거세게 말을 몰아 달리며 높은 성벽이라도 거뜬히 뛰어넘는 전쟁의 이미지를 통하여 기개가 넘치는 시인의 신앙 자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평생 전쟁터에서 살아온 다윗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신앙인의 호방한 기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비록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오히려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 더 치열한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여야 함은 물론 다윗과 같은 담대함과 기개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정미하다는 말은 순수하다는 의미로 광산에서 막 채굴되어 다듬어지지 않은 광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제련된 순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순전하여 그 말씀대로 행하는 성도들을 사단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막아주는 완벽한 방패(마 4:4,7,10)가 될 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사단의 궤계를 파괴하는 공격용 무기가 됩니다(엡 6:17).

 

31: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뇨.

  여호와는 구원의 언약과 관련하는 명칭이며, 하나님이라는 것은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자, 전능자, 절대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여호와만이 우주와 역사의 절대자이시며 또 그분만이 반석과 같이 가장 안전한 의뢰할 자이심을 나타냅니다.

 

32: 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케 하시며

  군인이 군복을 입을 때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매는 것은 그렇게 할 때 힘을 제대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띠 띠우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덧입혀 주셔서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시인의 앞 길을 고르게 평정해 주셨다는 뜻으로 시인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대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3: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암사슴은 순간적인 동작이 매우 민첩한 짐승입니다. 시인은 그런 암사슴의 발에 비유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기민하게 적진을 달리면서 패주하는 적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 시에 적군의 고지를 점령한 것을 연상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하게 하사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34: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감한 전사로 조련시켰다는 뜻으로 승리의 원천이 자신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놋 활은 보통 사람의 힘으로는 당길 수 없는 강한 무기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당겼는데,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오른손은 대개 두 팔 중에 힘이 센 팔로 힘과 권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주의 온유함은 다윗을 세심하게 지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36: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주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셔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37,38: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미치리니 저희가 망하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저희를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리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원수가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싸우겠다는 다윗의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의지 표명은 단순한 정치적인 야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위한 그의 신앙적인 열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 때에 대적을 완전히 진멸하지 못함으로써 도리어 저들로 인해 많은 환란을 당했습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위하여 대적과 싸우는 일에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39: 대저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셨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대적을 굴복케 할 수 있었음을 앞에 나온 구절들(32-38)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40: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

   전쟁시에 자신의 등을 상대방에게 보이는 것은 곧 패배하여 도망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적들을 도망가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적들이 패하여 도주할 때 그 뒤를 쫓아가서 멸절시키는 통쾌한 승리를 거둠으로 다윗은 여호와의 능력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41: 저희가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지 아니하셨나이다.

  다윗 당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주변 이방국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여러 신들 가운데 능력이 뛰어난 한 신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급할 때에 자기들이 섬기던 신들에게 부르짖음이 소용이 없자 비로소 황급히 하나님께 부르짖은 저들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리 만무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평상시에는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제야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자세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42: 내가 저희를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바람에 날리는 땅의 티끌이나 거리의 진흙은 전혀 무가치한 것 또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것에 비유하여 전쟁에서 멸절당해 대적들의 시체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은 악인의 종말의 비참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43: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아마도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의 많은 분쟁을 헤쳐 나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고 왕위를 견고하게 하셔서 이방인들까지도 복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다윗의 왕권은 궁극적으로 메시아 왕국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하는 것으로 장차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44: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다윗이 이방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는 나머지 주변의 이방 국가들이 이스라엘에게 즉각적으로 화친을 도모한 것입니다.

 

45: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이방인들이 겁에 질려서 그들의 요새에서부터 벌벌 떨며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은 다윗의 승전 소식을 듣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무조건 항복하거나 겁에 질려 그들의 요새에서 도망치기에 바븐 것을 말합니다.

 

46: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생명이 없는 이방신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다윗이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반석과 구원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잘 모르는 사람 중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본절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47: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도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들로부터 놓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을 대신하여 친히 원수들을 멸해주신 하나님의 보응 때문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9에서도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48: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실로 나를 대적하는 자의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셨다는 47절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다윗은 유사한 말로써 거듭거듭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악인에 대한 공의의 보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사울과 그 추종 세력만 아니라 다윗을 대적했던 그 밖의 모든 사람들과 이스라엘 주변의 적대국들을 다 포괄합니다.

 

49: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지금까지 앞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늘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마땅히 감사 찬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50: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일차적으로 신정 왕국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인 다윗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과 그 후손도 일차적으로 다윗 왕가의 후예들을 의미하나, 궁극적으로는 혈통상 장래에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네 집과 네 나라가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말씀과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의 예표에 불과한 지상의 다윗 왕국은 비록 멸망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영적 다윗 왕국인 모든 시대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인들의 우주적 공동체인 교회의 영원한 통치자가 되시니 하나님과 다윗이 맺은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의 영원불변성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